[여성시대] 영상작가를 꿈꾸는 탈북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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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올여름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여성탈북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인생에서 결코 이른 나이라고 볼 수 없는 50대 초반인데요,

박경애: 영상 시나리오 전문 교육원에 들어가다 대학 졸업했거나 현재 대학생인데 모두 열정의 포부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한국 생활 2년이 지난 박경애 씨의 말인데요, 여성시대 오늘은 박경애 씨가 시작한 새로운 도전을 소개해 드립니다.

북한에서도 아실만한 작가들도 있을 텐데요, 한국의 유명한 작가 박완서 씨는 40살에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와 지금 80에도 여성 문인 원로로 인기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유세계에서는 나이나 학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열성이 있다면 언제나 무엇이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박경애 씨에게 남한에 이런 작가가 있다고 소개했더니 용기가 난다며 반가워했습니다.

중국에 머물다 2008년 동남아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간 박경애 씨는 늦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설레는 음성으로 전했습니다. 보통 탈북여성들이 선뜻 나서기 어려운 영상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박 씨는 이전에는 남한에서 여러 가지 일을 가리지 않고 하다 생각 저편 있던 글 쓰는 일,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 즉 대본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건져낸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글을 쓰고 싶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거죠.

박경애: 북한에서는 글을 써서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나 하지 못하게 해요. 대학 졸업해서 작가로 된 사람만 하지 대한민국처럼 자유롭게 누구나 다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북한에서도 학교 다닐 때 글짓기를 잘해 작문 시간이면 뽑혀나가 발표를 한 적이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박경애: 학교 다닐 때도 작문 짓기 때 계속 앞에 나가서 발표를 많이 해 칭찬받던 일이 생각나요. 그런데 나는 새엄마 손에서 희망을 펼칠 수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재혼해 새어머니와 함께 산 세월은 어려움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배불리 먹을 수 없는데다 새엄마의 학대로 성년이 돼 선전대에 들어가자 새어머니와는 떨어져 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글 쓰고 싶다는 힘은 북한에서 예술 선전대 활동을 한 것과 인연이 있다고 말합니다.

박경애: 엄마와 떨어져 예술 선전대 들어가 거기서 1년 반 연예생활을 하다 메가폰을 쥐었어요. 마이크죠. 메가폰을 쓰는 것은 자기 능력입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막상 마이크를 들이대면 못하죠. 말을 엮어 나가려면 능력이 있어야지 대본 없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을 엮어 나가야 합니다. 천성적으로 된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자기 재능 것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안 박 씨는 자신이 품었던 희망과 포부를 직접 실현하기위해 영상작가 전문교육원에서 작가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같이 경제적인 여건이 힘든데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내게 되었는지 궁금한데요.

박경애: 저는 책을 쓰고 싶어서 스토리, 줄거리를 잡아서 시작했어요. 글을 쓰다가 언니뻘 되는 집에 갔는데 그 집 아저씨가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는 사람이었어요. 새터민이거든요. 그러더니 내 글 쓴 것을 보면서 '이 스토리가 좋네요' 그러더라고요. 어머니가 의용군으로 전쟁 1세대가 2세대로 넘어갔잖아요 그러니까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극본으로 쓰면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교육받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박경애 씨 어머니는 남한출신 의용군 이었습니다. 고향이 공주인 어머니는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다 남한으로 진격한 북한군들이 데려간 학도병, 의용군이었습니다.

박: 서울에서 집단적으로 학생들을 의용군으로 입대시킨 거죠. 공산군에 입대한다면서 여성만 몇 십 명이 입대해서 전쟁터를 따라다니며 간호 병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북으로 올라간 거죠.

북한에서는 어머니가 남한 출신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박경애 씨는 식량난이 터지자 탈북해 중국에 머물다 어머니의 친척을 찾겠다는 마음에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갔습니다. 한국에서 고모를 비롯한 친척들도 만났습니다. 박경애 씨는 자신과 얽힌 가족사를 글로 쓰고 싶어 영상 작가 전문 교육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라고 밝힙니다.

박경애: 지금은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교육받으면 달라지고 계속 작가로서 자기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서요 그리고 우리는 북한 사람으로 남과 북을 다 경험했잖아요 그래서 우리에게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경애 씨가 영상 작가 전문 교육원에 원서를 내고 면접 등을 보는 경험도 새로웠다고 하는데요,

박경애: 이력서, 자기소개서 제출하고 교육원 원장님 등 면접 보고 그곳 선생들이 합의해서 선발했어요

잠시 담당 교수인 영상 작가전문학원 문성룡 교수로부터 얘기 들어보죠.

질문: 박경애 씨가 그 전문학원에 지원할 당시 모두 몇 명이나 지원을 했나요.

----한 60명 정도 지원했어요.

60명이 모두 입학이 됩니까?

----수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선별합니다.

대개 젊은 층이 많이 지원하나요?

----특별히 젊은 층이라기보다 미래 전문직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 직업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의사분들, 교장 선생님 출신도 오시고 공무원 출신도 많이 오세요.

물론 이런 분야의 직업을 가지려고 오는 젊은 층도 오겠죠?

----국문학과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주로 오죠.

그러면 영상 작가가 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지요?

---이 분야도 작법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는 건데요, 영화화될 수 있는 소재나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소재가 있어 작법을 풀어간다면 등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지원한 박경애 씨를 어떻게 보셨나요?

----자기가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보고 있죠.

수강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기초반 6개월 전문반 6개월 연구반 6개월 1년 반 과정입니다. 빨리 성공하는 사람은 전문 반 때도 당선이 되어 등단하는 경우도 있고 작기 작품이 소재가 좋아서 영화사에서 선택해 영화로 만들겠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1년 반 과정을 마치면 작가가 될 수 있는 거죠?

---- 그렇죠. 우리가 작가 준회원 자격을 주고 앞으로 다른 영화사나 제작사에서 필요로 하면 우리가 추천해 줍니다.

지원자 중 10명이 떨어지고 자신이 합격한 사실에 박경애 씨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박경애: 선생님이 첫날 소개하고 나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제가 물어보았어요. 이 교육원에 북한 사람들이 다닌 적이 있거나 현재 있는 지 물어보니 내가 북한 사람으로 처음이고 단 한 명이라는 거죠.

박경애 씨는 자신의 소개서를 쓸 때도 작가를 희망 하게 된 동기 앞으로의 포부, 성격의 장점 등 을 모두 조목조목 다 채워 썼다고 합니다.

박경애: 포부는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을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로 현시대의 흥행하는 작품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교육원을 지망하게 되었다고 밝혔죠.

박경애 씨는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쓴 글로 수기나 단편 소설이 많은데 대부분이 고난의 행군시기에 가족들이 굶어 죽는 얘기, 헤어지는 아픔, 강제 북송되어 교화소에서의 부정부패, 비참한 생활 등의 내용이라며 자신은 두 여성, 친어머니와 새어머니의 얘기를 쓰고 싶다고 밝힙니다.

박경애: 새엄마는 원래 우리에게는 못되게 굴었지만 새엄마 그 여성 자체가 불쌍합니다. 6.25때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는데요, 일주일이면 사랑하던 남자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 결혼식을 앞두고 새엄마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종군기자로 남한에 내려간 여성입니다.

새어머니에 대한 절절하고 정말 소설 같은 사연이 많고 또 친어머니의 사연도 평범한 얘기가 아니라고 박경애 씨는 전합니다.

박경애: 어머니도 북으로 들어가서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북한 사람과 우리 아버지죠 아버지와 결혼해서 북조선 사람이 되었죠.

박 씨의 친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남긴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경애 씨는 이런 슬픈 가족사를 시나리오로 쓰겠다는 희망으로 영상 작가 전문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한국의 인기작가 박완서 씨도 1930년 개성에서 떨어진 벽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로 갔는데요, 박완서 씨는 6.25전쟁 중 빨갱이로 몰렸다 다시 반동으로 몰리는 등의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SBS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상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 겪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박완서: 제가 살아온 시대의 어려운 것을 내가 언젠가는 증언해야겠다 이런 욕구가 소설을 안 쓸 때도 가득했었습니다.

박완서 씨는 전쟁 후의 얘기도 그의 소재로 많이 다루고 있는데요, 박완서: 50년대 남루했던 서울 이것도 참 반세기가 지나고 나니까 그립기도 하고 그것도 또 어느 틈에 제 기억력 속에서 역사가 되어 있더라고요.

아울러 그 당시 여성들이 어려움을 딛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력도 담겨 있다고 전합니다.

탈북자 박경애 씨는 6.25세대 의용군이었던 어머니 뒤를 이어 전쟁이 끝나지 않은 2세대라며 남한의 전쟁관련 작품에 관심이 많다고 하네요, 또 자신은 북에서 태어나 남한으로 오기까지 순탄하지 못한 삶이 고스란히 한으로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박경애: 부모에 대한 한, 북한정부에 대한 한이 많고 시집가서 곡절이 있었고 그 곡절을 이겨내 자기의 뜻을 이루어 사람답게 살려고 하니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고난의 행군 속에서 더는 조선에서 살 수 없어 중국으로 나오죠. 그러나 중국에서 역시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다 붙잡혀 다시 조선으로 강제북송 당해 교화소 생활하고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그는 한으로 점철된 운명을 한국 땅에서 새로운 꿈으로 변화시키는 기회라며 영상 작가 전문교육원에서 열심히 공부해 북한사람, 남한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