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아직도 중국에는 많은 탈북여성들이 숨어 지내며 한국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안전한 곳을 찾아 중국 내륙 지방에 깊숙한 곳에 있는 여성들은 도움 받을 만한 단체나 선교기관, 브로커, 즉 중개인조차 만날 수 없어 하루하루 애태우고 있습니다.
cut: 텔레비전이라도 좀 보고 하면 조선말은 덜 잊혀지겠는데..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지 보는것도 없지....
5년 넘게 중국의 한 내륙지방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가명의 이옥선 씨입니다. 그는 좀 떨어진 곳에라도 조선족이나 탈북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얘기라도 나누어 볼 텐데 모두가 한족들이라 자신만이 외톨이, 이방인으로 너무 힘겹다고 말합니다. 이 씨가 중국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옥선: 그 때 당시는 너무 단속이 심하지 그리고 같이 온 사람 중에 한사람이 북경에서 잡혀서 다시 북한에 나갔다가 다시 강 건너 온 사람도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경비가 덜하다는 거예요.
한족 남편이 있기는 하지만 겨우 생활하면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중국말이 전부라 마음에 있는 얘기는 나눌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다행히 남편이 구박을 한다거나 어려움을 주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 낫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여기 와서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밤에는 잠도 못자고 울부짖기만 했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 시간이 지나니까 좀 나아요. 지금도 혼자 있을 때는 아이생각이 나고 자유아시아 방송 들으며 자식들이나 형제들 소식을 듣는다고 하면 나도 언제 그렇게 될까 너무 부러워요.
지금까지 북에 두고 온 자녀, 부모 형제 소식조차 모른다는 이옥선 씨는 부모님은 물론 아이들과도 연락한번 못하고 지낸다기에 답답한 마음에 왜 연락을 안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기서 어떻게 연락을 해요 중국 내 친척은 있는데 친척을 찾으면 제 아들 소식도 듣고 고향 소식도 잘 들을 수 있는데 전화번호 아는데 신호는 가는데 사람이 없는지 집을 이사했는지 사람이 전화를 안 받아요.
중국의 조선족들이나 탈북자들이 있는 동북쪽의 사정은 북한에 있을 때 몇 번 드나들었기에 잘 안다는 이옥선 씨는 당장 그곳으로 가고 싶지만 지금 있는 곳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이: 여기는 동북쪽하고 딴판 달라요 제가 전에 동북에서 북한을 들락날락해 그쪽 사정을 좀 아는데 그쪽에서는 텔레비전 많이 봐요 한국텔레비전도 보던데... 동북쪽은 우리 동포들도 많고 탈북자들도 많아 같이 어울려 얘기라도 듣고 하겠는데 동북쪽으로 가자면 제가 혼자 움직이지 못해요.
이런 소식을 들은 탈북 여인 가명의 정경화 씨, 자신과 너무도 비슷했던 사정이라고 말합니다. 정 씨도 온 가족을 그대로 남겨놓고 중국으로 탈출해 오랜 세월을 지냈습니다. 탈북 여성들이 겪는 온갖 역경을 참고 견디다 동남아를 거쳐 한국으로 온지 3년이 돼 갑니다. 지금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남한의 탈북자 구출단체에서 일하며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전문 양성 학원에도 다니고 있습니다. 정경화 씨는 이옥선 씨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말고 꼭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정: 제가 얘기를 듣고 보니 남의일 같지 않아요 저도 중국에 있을 때 방송을 듣다보니 지금 남한에 와서 사는 것이 꿈같은데 여자 분도 힘내서 힘껏 도움의 손길을 찾아 볼 테니 여기 남한에 오는 날 까지 힘을 잃지 말고 올 때 까지 무사히 있기만 바란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이옥선 씨 정경화 씨 얘기 잘 들으셨죠. 지금 한국에 옥선 씨의 편이 2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새로운 삶을 꾸리는 탈북자들도 2009년 통계로 약 1천명이 넘는다고 UNHCR, 유엔난민기구에서 발표한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이옥선 씨 같은 길을 거쳐 온 거죠. 아니 형편이 그보다 훨씬 못한 여성들도 많고요.
이옥선 씨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해 중국 공안을 피해 깊숙이 안전한 곳으로 가기까지는 남다른 사정이 있었다고 밝힙니다.
이옥선: 북한에서 그때 당시 핸드폰을 못 쓰게 했는데 살기가 바쁘다 보니 핸드폰으로 중국 내 친척을 찾아주는 거래를 하고 한국 내 친척을 찾아달라는 사람들이 요청하는 것을 해주었다고 해서요.
이 일이 드러나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철저한 조사를 받던 중에 건강하지 못했던 남편은 매를 맞고 어혈이 생겨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옥선 씨도 조사를 받았는데 남편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을 보고 중국으로 탈출할 길을 찾은 겁니다.
이: 저도 당시 이미 경찰서에 들어가 조사받다가 풀렸나왔는데 남편이 사망하다보니 저한테 수사를 미처 못 했어요. 그래 저도 그 후과를 생각해서 중국으로 나갔어요.
당시에는 북한에서 일반인들이 핸드폰, 손 전화를 못 쓰게 하던 시절이라 중국이나 남한의 친척을 찾아주기 위해 핸드폰을 쓰는 일이 드러나면 정도에 따라 교화소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다고 하네요. 이옥선 씨는 북한을 탈출할 당시 너무도 급한 나머지 아이들 그냥 둔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일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이: 탈출할 때는 너무 쉽게 했어요.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너무....(울음) 아이가 제가 올 때는 11살이었는데 지금은 16살, 두고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어요.
이옥선 씨가 당시 두만강을 건너 탈출할 때는 너무 쉽게 탈출을 했기에 언젠가 다시 아들을 데려 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세월이 자꾸 지나다 보니 북한의 아들을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고 호소합니다.
cut: 이런 상황에서 살다보니 제 아들도 하루속히 빼 내와야 하는데 올 때 같이 오지 못한 것이 열 백번 후회가 돼요. 너무나도 헐케 쉽게 왔단 말이에요.
어떻게든 아들을 데려오는 건데 경비가 심하다 보니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게 되면 중국으로의 탈출을 의심받아 경비원들에게 돈을 쥐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 건널 수밖에 없던 거죠.
cut: 그리고 제가 올 때 아이들과 같이 강을 건너는 경우는 돈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아이들과 같이 가면 무조건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이 돌아오지 않으며 자기들도 후에 위태롭기 때문에 이러면 또 군관들이 돈을 받죠.
이 씨는 언제든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아무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지금 형편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데 절망합니다.
cut: 우리 같은 사람들은 쓸려고 안하죠. 여기서 일하려면 문건 절차가 있기 때문에 쓸려고 아예 생각도 안 해요.
그동안 아들에게 소식이라도 전하기 위해 친척이나 형제들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혹시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까 보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제가 중국에 올 때는 아들에게는 한국으로 간다는 말도 없이 왔어요. 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친척이나 형제들이나 무조건 조사를 해요 그러면 어른들한테 박해를 가하고 불리하죠.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아직도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이옥선 씨는 북한을 탈출하기 전에도 몇 번 강을 건너 중국에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동북지역으로 가면 아들을 데려 올 수 있다는데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빼내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는 혼자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라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제가 여기서 나가 동북 길, 전에 북한을 드나들던 곳을 가면 우리 아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있는데 움직이지 못 하기에 그 일을 하지 못해요. 아이의 장래가 아직 나이가 어린데 머저리가 아니고 아주 똑똑한 아이인데...
지난날에 같은 처지였던 탈북여성 가명의 정경화 씨는 우선 이선옥 씨 먼저 중국에서 나와 한국으로 가서 그 다음 길을 찾으라고 간곡하게 권유합니다.
박: 모든 것은 한꺼번에 하려다 막히는 수가 있어요. 하나하나씩 풀어가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줌마가 먼저 남한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 담보하고 말씀드리는데요, 한 사람이 먼저 와서 뒤에 일을 풀면 됩니다.
정경화 씨는 언제까지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오도 가도 못하며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북한당국이 지금도 인민들의 천륜을 끊어 놓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원망했습니다.
RFA 여성시대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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