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댑니다. 탈북자 수가 2000년대만 해도 312명에 불과했던 것이 2006년에 2천 명을 넘더니 2010년 이제는 그 10배에 달하는 2만 명이 넘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 탈북자의 비율이 더 늘어 77%나 되고 초기에 홀로 탈북자들이 압도적이었던 수가 최근 가족동반 탈북자가 40% 정도라고 통일부는 전합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생존에서 이제는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녀의 교육문제 때문에 탈북 한 여성들도 늘고 있습니다, 또 아직 중국에 아직 숨어 사는 탈북 여성들이 북한에 두고 온 자녀 한국에 정착한 여성들은 북한이나 중국에 두고 온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옥선: 북한에서 공부라는 것은 말이 그저 학생이지 아직은 중학교 학생인데 공부를 시키려니까 그렇죠.
여성시대 오늘은 탈북여성들이 두고 온 자녀 문제, 그중에서도 교육문제에 대해 알아봅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 어머니보다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세계의 최고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북한 어머니들도 물론 마찬가집니다. 자녀를 잘 공부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미 한국에 정착해 중국에 두고 왔던 딸을 데려온 탈북여성 이 경선 씨는 지금 상황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경선: 제가 한국에 와서 너무 행복한 게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애를 중국에서 데려와 딸도 자신의 노력 것 공부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선생님도 아이를 많이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죠.
역시 한국에 정착했지만, 북한에 두고 온 두 아들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조여 와 가끔 병원에 가서 치료까지 받는다는 가명의 이미연 씨도 엄마의 마음은 같습니다. 늘 아들을 데려올 기회를 찾는 이 엄마는 최근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미연: 애들이 둘 북한에 있어요. 지금은 김정은 이를 올려놓고 막 단속하고 그래서 꿈쩍도 못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살벌한지 다른 사람 통해서 그 애들이 변경 쪽으로 오면 나하고 통화했는데 지금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소식은 돈을 보내주니까 그럭저럭 사는데 마음대로 못 쓰죠. 전화도 못 하고 속이 답답하죠. 거기가 조금만 완화되면 데려오려고 하는데....
이미연 씨 역시 아들 둘이 한국으로 오면 늦었지만, 아들들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어느 분야든 공부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호소합니다.
한국에 온 탈북여성들은 적어도 자녀를 대학 공부까지 마칠 수 있으면 하는 희망과 바람으로 열심히 자녀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남한 정부와 학교에서도 탈북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여러 가지로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지난해 9월부터 탈북자들이 남한정착을 위해 교육을 받는 하나원 안에 ‘하나둘’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거쳐 사회로 나오면 각 급 학교나 탈북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 에서 정규교육을 받죠. 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기와 장점을 살려 교육 받을 수 있고요, 현장실습과 체험위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실용음악학교나 탈북자 지원학교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는 가명의 이옥선 씨, 지금 중국에서는 그럭저럭 살 만하지만 단지 주변 모두가 한족이라는 점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의 교육이 제일 시급하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이옥선: 오전에만 공부하는 형식으로 하고 오후에는 대체로 농촌지원이요 가을에는 나무도 하고 솔방울도 줍고 어린아이들도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겨울에는 겨울대로 주변 농장에 인분 주고 봄은 봄대로 계절에 관계없어요.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너무 유명한 고사성업니다.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데 있어 그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말인데요, 이옥선 씨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공부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옥선: 아이들이 공부에 대해서 신경도 안 써요. 어떻게든 엄마 일손 덜어주려고 도와줄까 장사를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엄마가 장사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많이 줄까? 아이들도 이제는 다 그렇게 변해버렸어요. 농촌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시내 아이들도 그런데. 엄마 따라서 장마당에 와서는 남새도 팔고
엄마를 도와서 일하는 것은 좋지만 이러다 보니 학교에서도 못하는 공부, 집에서도 시킬만한 환경이 전혀 못 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장사를 하는 일도 어려서부터 정당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은 잃은 지 벌써 오래되었다고 염려합니다.
이옥선: 남새 야채는 자기네 텃밭에서 가져다 파는 것도 있고 어떤 아이들은 농장 밭에서 훔쳐다 팔기도 하고 또 농장 밭에서 엄마가 눅거리를 사오면 아이들이 가져다 팔아요.
이렇게 공부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 자녀를 생각하면 하루속히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조급해 진다는 이옥선 씨, 지금 중학생인 아들이 엄마가 보기에는 다른 아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기에 교육받을 기회를 빨리 찾아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옥선 :아들이 눈치가 역 빠른 아이예요. 우리 아이는 좀 꼼꼼한 편이고 전자나 컴퓨터 같은데 흥미가 있어요. 그런 쪽으로 공부했으면....
전자분야나 컴퓨터 쪽은 지금 남한이 세계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마음은 더욱 초조해진다는데요, 하지만 자신이 북한에 있었을 때 아들이 좋아하는 이런 분야를 공부할 여건은 아주 형편없었다고 전합니다.
옥선: 어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해. 학교에 어떻게 컴퓨터가 다 있어요 제가 있을 때는 컴퓨터 있는 학교가 없어요. 큰 시내, 함흥시내나 평양시내 이런데 큰 학교에나 혹시 컴퓨터 한 대씩이나 있겠는지.
그래도 북한이 지금은 나아졌으면 하는 한 가닥 희망도 품지 않는다고 이옥선 씨는 말합니다. 북한에 있을 때 식량배급을 두고 계속되는 거짓으로 주민을 속인 것을 생각하면 북한의 형편이 전혀 개선되지 못할 것 이라고 이옥선 씨는 말합니다.
옥선: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것은 없을 거예요. 그거는 100퍼센트예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도 늘 그런 소리를 했어요. 더하면 더했지 언제 이런 날이 끝이 나겠나. 젊은 사람들도 계속 그런 소리를 했어요.
하지만, 자신들을 받아보지도 못한 외부의 지원은 모두 평양으로 들어가고 있다며 그래도 평양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사는데 지장 없으니까 평양에서 탈출하는 탈북자가 적은 이유라고 얘기합니다.
옥선 :평양시야 북한의 수도 고 중심지가 아닙니까? 평양 시에는 외국기자 외국사람들이 몽땅 들어가는데 북한으로 들어가는 일체의 모든 지원물자 유엔 지원이 몽땅 평양 시로 다 집결된다는 말이에요. 그런 것을 한국에서는 모른단 말에요. 이런 물자를 언제 받아보았어요. 말은 그렇게 하죠. 주민에게 다음 달에는 배급을 한 달 치 공급한다고 선포는 해요. 그런데 어떤 때는 준 일도 있지만 준다는 것이 고작 1주일 치 좌우예요 그리고도 국가에서 공급하는 배급이라는 것이 한심해요.
머고 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든 북한당국이 평양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사는 학생들을 위해 교육문제를 생각이나 하겠느냐며 이옥선 씨는 또 한숨짓습니다. 중국으로 탈출한 이옥선 씨는 북한의 보위부나 중국의 공안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다보니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는 온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5-6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연락을 하지 못합니다. 부모나 친척에게 연락을 하면 아들 소식도 알 수 있겠지만, 자신으로 인해 북한의 가족들이 단련 받을 생각을 하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옥선: 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부모 형제를 보안서에서 닦달질 할 테니까 나와 내 남편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내가 부모를 어떻게 단련 받을 일을 시키겠어요.
중국의 한족 사회에서 한족인 현재 남편과 살면서 두고 온 자식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지금은 남편도 이옥선 씨가 한국에 가서 북한의 아들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을 다 알지만, 한국에서 생활을 당장 어떻게 할 것이냐며 말리고 있다는데요.
옥선: 한국에 가면 우리한테 나오는 정착금이 있잖아요. 정착금에 대해 대충 얘기해 주니까 막 웃어요. 거기 가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가자마자 어떻게 정착금이라는 것을 주나 믿기지 않다는 거죠.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들과는 영영 만날 수도 없고 이 씨가 그토록 바라는 아들의 공부할 기회도 모두 잃을 것 같아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이옥선 씨는 하루속히 자신이 한국으로 가서 어떤 고생을 감수하더라도 아들을 데려올 계획입니다.
옥선: 저는요 한국에 가면 내가 동북쪽에 두루 아는 사람이 있어 아들 데려오는 문제는 내가 조금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속에서 안달이 나요. 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여기 있으니까 안타깝죠.
이옥선 씨는 지금 사는 곳에서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이 있을만한 곳으로 혼자서는 이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데려다 공부시키면서 자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날이 온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소박한 꿈을 꾸고 있죠.
옥선: 제가 원래 책하고 노래를 좋아하는데 책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죠. 잡지나 신문 보는 거, 노래는 음악을 듣는 거, 노래도 텔레비전을 봐야 노래를 듣고 따라 하기도 하겠는데 마음대로 듣지 못하고...
이 옥선 씨는 인터뷰 내내 외로움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베인 단조로운 음성으로 얘기하다 음악 얘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한국노래가 좋다면서요.
옥선: 한국음악이야 다 듣기 좋죠. 우리도 북한에 있을 때 한국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잘 생각이 안 나요. 한국노래 한 70년대 그때 노래, 많이 오래된 노래죠.
이옥선 씨는 자신의 상황을 잠시 잊은 채 북한에서 좋은 노래를 몰래 듣던 시절을 떠올리며 누구도 모르게 비밀리에 음악을 서로 나누었던 시절로 잠시 되돌아갑니다.
이옥선: 가만가만 듣죠. 누구네 집에 재미있는 한국 노래가 있다 그러면 아무리 동무지만 그런 노래를 선뜻선뜻 내주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자기가 걸릴까 보아 테이프를 마음대로 안 내주죠. 사정사정해서 달래기도 하고 그래서 겨우 듣는데 한번 들어서 뭐해요 계속 들으려면 녹음을 다른 테이프에 옮겨야 하잖아요. 그 노래 녹음을 하려고 가만가만 빌려 오고 빌려주고 이렇게 계속 옮기다 보니 자연히 퍼지는 겁니다, 북한에서. 실제로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죠.
나훈아 노래:
들어보면 옛날 노래가 좋아요. 나훈아 노래가 좋긴 좋아요 북한노래는 다 정치 선전 그런 노래뿐이죠.
CUT: 나훈아 노래
남한 노래에서 특히 나훈아가 부른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옥선 씨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으로 가는 꿈, 컴퓨터로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겁니다. 이옥선 씨, 이미 2만 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갔고 그들의 자녀가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