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의 한 의류회사에서 여성들의 옷 샘플 즉 견본품을 만드는 탈북여성 가명의 최한나 씨, 여성시대에서 소개해드렸는데요,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즐겁게 일하시는 분이라 올해는 어떻게 맞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cut: 처음에 왔을 때 보다 두 곱이 올라 옷 견본품 만드는 샘플메이커로는 최고로 받고 있어요. 나날이 갈수록 좋은 일만 생기고 좋습니다. (웃음)
네, 두 곱이 올랐다는 것은 월급이 배로 올랐다는 건데요, 지금 지구촌 모든 곳에서는 불경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일자리를 찾지 못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다 봉급을 받는 사람들 중 올해부터는 봉급이 깎이는 경우도 많은데 이제 미국 생활 5년으로 접어드는 최한나 씨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 여성시대에서 함께 나누어 보죠.
40대 중반의 최한나 씨는 가족들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잠깐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해 오려고 가족들과 헤어진 것이 미국으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북한 난민으로 인정을 받은 탈북자들은 정부로부터 일정기간 동안 받는 교육과 지원이 끝나면 자신이 일자리를 구해 홀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최한나 씨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이기에 자신의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으로 기술이 향상되면서 일할 의욕이 생긴 겁니다.
최: 기술을 인정해 주고 다른 곳으로 갈까봐 인건비도 올려주며 붙잡고 그러는데 참 긍지감이 생기더라고요. 자신감도 있고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잘 챙겨주니까 일하는 보람도 있고 나날이 갈수록 제품을 만드는데 적응되면서 기술을 인정해 주니까 참 감사한 거죠.
북한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던 자신이 열심히 하는 만큼 인정을 받는 다는 일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다는 한나 씨는 아울러 자신감과 함께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다는군요. 미국 의류회사에서 여러 디자이너들이 고안한 옷 견본품을 만들어 해외 공장으로 보내면 견본품대로 만든 옷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최: 다 여성 옷이에요 젊은 사람들의 캐주얼, 평상복입니다. 샘플이 옷 마다 다 틀리는데 이런 형 저런 형 각 형태마다 같은 것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저희는 견본품만 만들어요. 만드는 공장은 멕시코와 중국에 있어요. 멕시코에서 만들어 오는 것이 많은데 거기는 인건비가 싸잖아요.
그런데 이 회사의 디자이너들은 견본품을 제작하는 전문가들 중 한나 씨가 만드는 견본품을 제일 선호하고 있을 만큼 인기를 얻고 있어요.
최: 우리 회사에 샘플 메이커가 6명이 있는데 두 명은 멕시코 사람들이고 4명은 한국사람 입니다. 자기 제품의 견본품을 내가 해주었으면 해서 긍지감이 있어요. 회사에서는 제가 만드는 견본품에 만족해하고 다른 회사에 가지 말고 오래 같이 일 하자고 디자이너들이 자기 제품을 내가 해주었으면 하고....
이 회사의 탈북여성인 한나 씨를 비롯해 3명의 한국 여성들이 훌륭한 솜씨로 한국을 빛내고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어려움이나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는 한나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당당함과 행복감 때문이라고 하네요.
최: 재미있으니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일 끝나면 요즘에는 탁구 치느라 정신 팔려서 오는 4월에 탁구 경기에 나간다고 해서 열심히 일 끝나면 탁구 연습하고 있습니다.
오는 4월 회사에서 열리는 직원들의 탁구시합 준비로 땀을 흘리고 있다는데요, 옷 견본품을 만드는 그 열성이 탁구 연습에도 그대로 옮겨진 것 같아요. 한나 씨 혹시 북한에서도 탁구를 치셨나요?
최: 아뇨, 북한에서 선수들만 전문 치는 거구 없었죠. 여기 미국에 와서 건강이 재산이니까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하려니까 무슨 운동을 할까 하다 탁구를 쳤어요. 회사에서 4월 달에 시합이 있어서 밤 11시 12시 까지 연습해요.
최한나 씨와 처음 인터뷰를 할 때는 성실하고 조용하게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생활 초창기에는 같은 탈북자들도 잘 만나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고작 이였지만 지난 연말 때는 그곳에 가까이 사는 한인들, 탈북자들과도 모임을 갖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얘기 합니다.
최: 우리 회사에서 회식도 있었고 그리고 탈북자들을 위한 송년회도 했었어요. 이 송년회에 7-8명이 참석했고 주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모임을 가졌어요. 한국 사람이나 우리 모두가 아는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 이 노래 불러서 1등해서 상품도 탔었어요.
그 동안에 기술을 인정받아 봉급도 올랐다는 얘기는 이미 전해드렸는데요 최한나 씨는 봉급 중 일부를 아주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군요.
최: 저축을 많이는 못하지만 모자라지는 않아요. 제가 타는 월급에서 나가는 돈 나가고 선교해야 되잖아요, 북한 선교 ....이곳에 까지 내가 오게 된 것은 솔직히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남들은 몇 만 불이 내는 영주권을 1달라도 안내고 제가 받을 수 있었겠어요.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저를 이곳까지 부르신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 부르셨다, 북한 선교를 위해서 저를 오게 하신 것이 아닌가... 우리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무언가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지금 해야 할 것은 지금도 북한이 너무 어렵잖아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한국 사람들은 정말 북한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게 사실인가하고 믿어지지 않아서 믿을 수가 없죠. 여기서는 멀쩡하게 먹을 것을 다 버리고 사는 세상인데 정말 어렵게 산다는 것은 말 할 수가 없어요.
고향 에서는 아직도 먹을 것이 없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는 최 씨는 조금이라도 더 모아 북한 선교를 위해 보탬이 되는 것이 바로 북한 주민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 지금으로서는 북한을 조금이나마 선교하는 것을 임무라고 생각하고 돈 한 푼이라도 절약해서 어떻게 하면 북한에 더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축이 되면 보내고 또 저축이 되면 보내고 ... 북한의 가족이나 친척들에게도 조금씩 보내고 있어요. 해야죠.
지금도 돌아보면 미국 생활이 어려웠던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언어 문제로 특히 영어로 된 각종 서류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고 또 시간 나는 대로 영어 공부를 꾸준하게 하다 보니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최: 영어로 된 서류 같은 것을 봐주는 분이 계세요. 한국 사람인데 여기서 대학공부 하신분이고 영어를 잘하시는데 그 분이 도와주고 계세요. 간단한 영어 회화는 물어 보면서 기록도 하고 살면서 여기는 정보의 시대이기 때문에 영어를 내놓고는 길이 없으니까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최한나 씨는 이제 힘든 고비는 다 넘기고 미국생활 안정기로 들어섰지만 고향의 가족들에 대한 염려는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역시 굶고 있는 가족 고향의 이웃들이 많은데도 북한 당국은 장거리 로켓을 계속 발사 한다고 국제 사회에 떠들고 있어 이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말합니다.
최: 북한에서 있을 때는 이런 것을 하면 강성대국 건설하는 구나하는 생각을 없지 않아 했었는데 지금 여기 와서 이런 소식을 들으니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데다 돈 쓰는 거면 인민들에게 돌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이제 자신의 미국 생활은 염려 없다며 다만 올 한해 북한 당국이 제발 인민들의 생활을 잘 보살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뿐 이라는 최한나 씨는 올 해도 한결같은 결심을 다지고 있는데요,
최: 미국에서야 살아가는 데는 걱정 없잖아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운동도 하고 나름대로 맡겨진 일 열심히 하며 잘 지냅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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