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러시아의 사할린에는 일제 식민지 시절 징용이나 모집 등의 명분으로 조국을 등지고 강제로 끌려갔던 한인들 1세대를 비롯한 그 후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한인 사회의 한인 후손들에게도 한류바람은 찾아들고 있습니다.
cut: 옛날에는 조그만 아이들이 어른들의 노래를 불렀어요. 그래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지금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의 노래를 다 부르고 있어요.
여성시대, 오늘은 사할린 우리말 방송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김춘자 국장으로부터 사할린에 부는 한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러시아의 한류는 한인사회뿐만 아닌 러시아 본토 젊은이들에게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한류의 대표적인 가수 소녀시대나 빅뱅의 노래만이 아닙니다.
빅뱅 노래 cut:
이미 다 알려진 오리온 초코파이나 라면 종류인 팔도 도시락, 오뚜기 마요네즈 등이 러시아 시장점유율 40%-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8년 까지만 해도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이런 한류바람이 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가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사할린 우리말 방송의 김춘자 국장의 말입니다.
cut: 사할린에는 강제로 끌려온 한인 동포들이 많은데 지난 88년 까지 소비에트에서는 한국의 흘러간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고 방송으로 듣지 못하게 했어요. 차별정책으로 압박과 차별대우가 많았어요.
구소련은 1985년 4월,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즉 경제 개혁과 정치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이런 개혁, 개방을 단행하기 전 소련은 공산당 체제의 우월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고 김 국장은 전합니다.
김: 그때는 소비에트 양식 공산주의 체제가 제일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소비에트 국가가 최고로 좋은 나라로 여기서 여겼죠. 옛날의 사회주의 국가와 다름없었습니다.
1956년에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한 사할린 우리말 방송은 사할린 현지에서 우리말과 문화 그리고 한국의 민족혼을 이어 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20여년이 넘는 동안 한인들은 고국의 노래를 듣지도 못했고 부르지도 못하다 개방정책이후 한인들은 고국의 방송도 몰래 듣기 시작하면서 사할린 우리말 방송에서도 한국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다고 김춘자 국장은 전합니다.
김: 88년 페레스트로이카 개편이 시작되어 동포들은 KBS 사회교육방송을 몰래 숨어서 들을 수 있었어요.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많이 들었답니다. 우리 쪽에서도 기구를 설치해서 사할린 동포들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도 흘러간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어 구소련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적으로는 동구라파의 민주화와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고 아울러 동구 공산권에서 공산당 정권과 전후 냉전 체제를 해체 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할린 한인사회에서는 폐쇄 되었던 한글학교가 문을 열어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되찾았다고 하는군요.
김: 25년 동안 조선어 학교가 닫혀있었는데 학교에서 우리말을 처음에는 수업시간이 아니라 서클에서 배우기 시작했지만 곳곳에서 배우기 시작하고 사할린 동포들은 문화도 찾고 광복절 기념식하면서 보내게 되고 그리고 대학에서도 역사과에서 우리말을 조금씩 배우게 한 것은 소련 역사상 처음이에요.
구소련이 한글학교를 모두 폐쇄 하면서 한국어 방송과 신문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소련 당국의 선전기관으로 쓰려는 속셈이었던 겁니다.
김: 러시아 말을 모르는 한인들 속에서 공산주의 체제 소비에트 생활양식을 선전하기 위해서 선전기관으로 남겨 둔거죠. 새 고려 신문과 우리말 방송국 그래서 우리는 문이 닫기 진 않았어요.
김 국장은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대로 한국말을 어려움 없이 하지만 조선학교가 문을 닫은 기간 동안 한인들은 소학교 4학년 까지 조선말을 배우고 그 이후에는 러시아어로만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공부할 때 편지를 기다리는 부모님에게 조선어로 편지를 쓰며 그나마 한국말을 이어갔다는 군요. 구소련의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김 국장은 러시아 텔레비전 방송에 직접 나가 한글학교의 문을 열어 줄 것과 대학에서도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자는 방송을 했다는데요, 그 이전 까지는 사할린의 한인들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얼굴도 비쳐 주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김: 88년도에 우리가 자존심을 찾기 위해서 러시아 텔레비전 방송에 제가 나갔습니다. 폐쇄된 학교 문을 여는 것 조선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고 대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입학하는 것 그리고 북조선 사리원에서 예술단이 와서 인터뷰가 러시아 텔레비전에 나갔으니까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와 함께 89년 도에는 남 북 관련 취재도 방영을 할 수 있었다는데요, 이런 것들이 발판에 되어서 2004년도 텔레비전 우리말 방송 문을 열게 되었다는 김춘자 국장의 말입니다.
김: 89년도에는 북한 사리원, 평양에서 취재한 것 3.8선에서 남북 첫 번째 예비회담 하는 것 다 찍어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내고 그리고 그해 89년도에 또 이전 국장님이 한국에 사장님과 같이 갔다 와서 한민족의 문제점 13:44 영주귀국 보상 문제 문화 발전, 문화 유지, 우리말 재생 해 달라고 그전까지는 사할린의 한인들의 얼굴에 텔레비전에 비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제 개혁 개편이 되었으니 이를 해제해 달라고 그래서 끝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텔레비전 방송을 2004년도에 개국했습니다.
텔레비전 우리말 방송을 개국하면서 방송된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을 이끌었던 가을동화 였습니다. 이 드라마로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된 한인 1세대와 그 후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물론 러시아어로 자막을 넣어 러시아 사람들에게까지 인기방송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김 국장은 전합니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방송을 함께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몇 번 위기를 맞기도 했는데요, 한국의 방송, 기업 이나 단체 또 일반인들의 도움으로 중단위기를 넘기고 있습니다.
김: 너무 고마운 것은 KBS 방송에서 사할린에서 우리말을 지킬 수 있도록 문화를 지킬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었죠. 작년에는 처음으로 세계 한민족 여성회 재단의 후원으로 사할린청소년 노래자랑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들이 한국의 노래를 많이 즐기며 6회까지는 사할린 동포들의 노래자랑을 해 오다 지난해 10월 7회 때는 한류 열풍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노래자랑 대회를 열었습니다.
김: 우리가 7살부터 17살 까지 그리고 18살부터 35살 두 파로 나누었어요. 학생들과 대학생들로 26명이 참석했는데 노래 실력이 너무 좋아 우리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동안 한국의 방송국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한국의 인기 가수들을 초청해 위문공연을 한 것이 사할린 한인들에게는 고향의 품에 안기듯 큰 위로가 되었고 한류의 열풍으로 번지기 시작한 거죠.
김: KBS나 MBC가 90년도에 관현악단 까지 다 와서 위문공연을 했고 당시 이름난 가수 최성수, 주현미, 현철, 송대관 문희옥, 최진희 등 가수들이 다녀갔고
최진희 노래:
남한의 방송국, 기업, 일반인들이 이렇게 한류의 열풍이 불도록 사할린 우리말 방송을 지원하는 동안 지난 1864년에 당시 북한의 대 기근으로 연해주로 이주했던 북한 출신의 고려인 3-4세대 후손들을 위해서 북한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김 국장은 전합니다.
CUT: 북조선에서는 여기 와서 노래자랑 같은 것 한 번도 안했어요. 단지 92년도에 사할린에서 남북한 예술축제가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오고 한국에서도 오고 그런 축제가 한번 있었어요. 그전에는 북한에서 한 번도 없었어요.
주현미 노래 : 여기는 사할린
여성시대 RFA 이원휩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