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지하교회, 전화로도 예배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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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 선교를 하는 목사, 선교사들이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하 교인들의 기도, 예배하는 동영상도 많이 나와 있고요, 이렇게 북한의 지하 교회는 오랜 기간 지속적인 북한 사역을 하는 선교 단체나 또 비밀리에 지하교회에 나갔던 탈북자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데요,

윤: 저는 직접 지하교회를 경험하고 온 사람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새벽에 촛불을 켜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보았고 경험을 했기에 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는 탈북여성 윤선화 씨는 한국의 순교자의 자유소리 방송 기자, 이외도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을 위한 활동에도 늘 앞장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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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하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윤선화 씨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이 바로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윤: 저의 어머니가 쌀이 없어 중국으로 쌀을 가지러 갔습니다. 갔다가 중국의 교회에서 쌀 배낭에 성경책을 넣어 보냈습니다. 그 때가 98년도인데 가로 세로 10센티가 안 되는 엄청 작은 것이 나왔는데 보니까 구약 이었어요. 그런데 표지에 출판사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윤 씨는 당시에 그 성경책이 집에 있었다는 것 을 몰랐다고 하는데요, 집에 혼자 남아 있는데 보위부에서 찾더라는 것입니다.

윤: 어느 하루 보위 지도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 엄마하고 여동생은 중국에 간 상태죠. 저 혼자 있었는데 불러서 갔는데 거기서 5시간 동안 고문을 받으면서 엄청나게 매를 맞았는데요, 끝내 성경의 베드로처럼 3번 부인했습니다. 상당히 안타까웠는데... 그것을 길거리에서 주웠다, 무언지도 몰랐다, 줍자마자 보위부에 가져오려고 했는데 못 가지고 왔다, 이렇게 말을 돌려서 풀려났어요.

윤선화 씨는 다시 탈북 길에 올라 국경 연선의 강을 건너기 위해 잠시 머물 수 있는 집을 발견하고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윤: 제가 강을 건널 때 대기하는 집이 있어요. 강을 건너기 위한 군대를 알선해 주는 그 집에 갔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데 새벽 4시에 촛불 켜고 둘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저는 지하 교회를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하교회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하교회는 꼭 있습니다.

윤선화씨가 경험한 지하교회는 가정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몇 사람이 모일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고 하는군요.

윤: 지하 교인들은 가정에서 모여 인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모일상황이 아니면 모이지 못합니다. 모이면 안 되니까 혼자서 기도 하는 사람도 있고, 요전에도 김 모 선교사님에게 지하교회 자매님이 전화를 해 선교사님이 주기도문 한번 외워보세요 하니까 북한 측에서 감지될까 봐 겁이 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니까 주기도문 마지막 까지 다 한 것이 녹음되어 있어요.

지하교회 목사 나 지도자가 있기도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상황이 아니기에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이제 지하 교회도 전화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윤: 지하교회에 지도자는 있기도 하고 지도자가 안 되는 지역에서는 직접 전화로 인도를 합니다. 북한 안에서 합니다.

윤선화 씨는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자란 신앙이 한국에서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이끌어 가는데 힘을 실어 주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특히 지난 2012년 2월 탈북자 31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자 이들의 강제 북송을 중단하라는 호소가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 곳곳에서 이어졌을 때 윤선화 씨는 당시 100일도 안된 아기를 안고 홀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그 때 산후조리를 못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다는 군요.

윤: 제가 그때 산후조리를 해야 되었어요, 아기 낳은 지 100일도 안되었기 때문에 산후 조리가 엄청 중요했던 시기인데 그때 2월16일 이었죠. 김정일 생일 때 기자회견을 하고 그 다음부터 애기 안고 1인 시위를 했는데 저는 그때 후유증으로 양쪽 엄지 발가락에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수의 탈북자 31명을 북한에 넘겨주었죠. 북송되었다는 소식에 너무 안타까웠다고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윤: 제 몸이 부서져서라도 저분들 모두가 북송되지 않았다면 참 좋았는데 당시 한창 1인 시위하고 있는데 어느 목사님이 달려 오셔서 31명이 다 강제 북송되었습니다. 했을 때, 제가 그 목사님을 잡으면서 저는 하나님을 원망 합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저를 안고 우시면서 하나님도 그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는 최근 미국 방문길에 많은 사람들이 탈북자 북송을 반대한다는 글을 직접 쓴 대형 현수막을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서명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윤: 그 현수막에 미국도, 국내에서도 강제 북송하고 있는 중국 정부와 강제 북송위기에 놓여 있는 탈북자들 그리고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을 처형하고 하나님 믿었다고 처형하고, 한국사람 만났다고 처형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넣고 또 형을 받아서 교화소에 들어 가게 한 북한 정부에게 메시지를 남긴 글 들이 엄청 많습니다.

강제 북송당시 윤선화 씨는 상상도 못할 어려움을 겪어 지금도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운동을 멈출 수가 없다고 강조 합니다.

윤: 제가 3번 강제 북송당하고 1년 감옥 갔다 왔어요. 정말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그런 수치를 당하면 한 될 어려움들을 당했고 그리고 북한의 교화소를 10개의 검은 도장 찍고 형을 받았었어요. 탈북 했다는 이유로, 제가 갔던 감옥이 증산 11호 교화소에요. 그 감옥에 2,000명이 들어갔는데 200명밖에 살아나오지 못했어요.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제 이 두 손으로 죽은 사람들을 묻었고 그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중국에서 북송위기에 놓였 있던 사람들이 북송되면 어떻게 될까? 남의 일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도 여성들이 강제 북송에서 잡혀가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는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자신이 강제 북송당하고 다시 탈출할 때 와 너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윤: 제가 제일 처음에 탈북 할 때는 군인한테 빵10개에 술 한 병에 돼지고기 1키로 주고 넘어왔거든요 그 뇌물이 무엇이냐 하면 돈이 아닌 음식으로 그만큼 북한의 군인들도 식량난 때문에 열악한 상태인거죠. 너무 북송된 사람들이 많아서 보위부 안에 들어가면 복도에 까지 쭉 앉아 있었어요. 제가 북송 되었을 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두만강 한번 건너는데 한국 돈으로 600-700만원으로 그만큼 강화가 된 거죠. 탈북을 못하게끔, 그러니까 북송되면 처벌이 얼마만 하겠어요. 한국에 제2 하나원을 건설 했잖아요 탈북자들이 많을 줄 알고 건설했는데 먼저 지은 하나원도 차지 못합니다. 그만큼 강화 되었고 북송되면 또 엄청난 처벌위험도 많죠.

한국 돈 600만원-700만원, 미화 6천-7천 달러가 넘는데요, 이런 큰돈을 주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렇게 강력하게 탈출을 저지 하는 것도 김정은 정권의 성과로 치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윤: 김정은이 정권을 잡고 나면서 김정은이 젊은 패기를 보여준다고 할까 지도자의 리더를 보여주려고 그러니까 성과죠, 자신의 성과가 없는 거예요 내놓을 것이 없는 겁니다 뭐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자기의 성과를 내기위한 보여주려고 하는 거죠. 북한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많아요, 시장경제가 풀렸다고 해서 괜찮다고 하는데 지금 더한 것은 돈이 없으면 북한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윤선화 씨는 북한의 시장경제가 그나마 활성화 된 것은 북한 정부차원에서 활성화 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힘이라고 반박합니다.

윤: 북한의 북한주민들의 내부에서 시장경제가 활성화 된 것은 3만 여명가까이 되는 한국의 탈북자들이 보낸 돈입니다. 한국의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간호사들 파견하고 광부들 파견했잖아요, 지금 우리 탈북자들이 한국에 온 입장도 똑 같습니다.

북한의 가족들을 위해 탈북자들이 모아 보낸 돈이 장마당으로 들어가면서 시장 경제가 활성화 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탈북자들은 허리를 졸라매며 가족들에게 돈 보내는 일을 힘겨워 하지 않다고 윤선화 씨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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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