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봄은 여성의 계절이라고도 하죠. 모든 자연이 아름다운 빛깔로 갈아입기 때문에 여성들도 올 봄에는 어떤 색깔이 어떤 모양의 옷이 유행하는지 관심이 큽니다. 저도 여기 워싱턴 디시를 다니면서 여성들의 옷차림을 살펴보니까 밝고 화사한 오렌지색, 노란색상 그리고 흰색 옷차림이 많이 눈에 띕니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의상이 나오기 까지 옷을 만드는 일에 드러나지 않게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중에는 미국에 정착해 의류업체에서 일하다 최근 더 큰 회사로 뽑혀간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최: 샘플메이커로서 이번에 큰 회사로 옮겼는데 집도 룸메이트에서 벗어나 혼자 살 수 있는 집 마련했고 차도 뽑았고 사는 데는 걱정 없이 정착 한 것은 이제 1년 된 것 같아요
북한에서 계속 살았다면 4.15, 김일성 100번째 생일 명절 보내느라 이리저리 동원되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분주 하고 힘들었겠지만 미국에 와서 의류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기술도 늘어가고 봉급도 올라 이제 살맛난다는 탈북자 가명의 최한나 씨의 소식 전합니다.
최한나 씨는 중국으로 탈출해 한국계 미국 목사님을 만나 3년 전에 미국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서부 시애틀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다 로스엔젤스로 이주해 한 의류회사에서 샘플 메이커, 즉 옷 견본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최한나 씨를 지난해 여성시대에서 소개해 드렸는데요, 최근에 최한나 씨가 더 큰 의류회사로 옮기고 더 좋은 직책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최: 같은 샘플메이커에서 제에게 더 맞는 부서로 옮겼어요. 여기는 한국 사람도 많아요. 외국사람도 많고 회사가 큰 회사니까
또 회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실력을 인정받아 봉급도 올랐다고 하는데요,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실력 있고 열심히 하면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것을 실감했다고 하는군요.
최: 회사 옮기고 일주일 만에 저의 기술을 인정해 주고 봉급도 더 올려주더라고요. 회사에서 당부하는 것은 봉급 올려주면서 다른데 가지 말라는 부탁이에요. 여기서야 일하고 봉급만 제대로 받고 하면 사는 대는 불편이 없어요. 오직 가족들의 그리움뿐이죠.
일부 탈북자들은 북한 고향의 가족의 소식을 더러 듣기도 하고 생활비도 보내는데 최한나 씨는 아직도 가족들의 소식을 듣지 못해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꼭 만날 날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도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패턴사가 되기 위해학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연관이 있어 재미있다고 하는데요,
최: 저녁에 일 끝나고 공부하러 가니까 패턴사 되려고 패턴사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소잉, 제봉 일 샘플메이커를 하니까 이와 연결되어 있어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배우는 것이
최한나 씨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샘플 메이커, 즉 견본 옷 제품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패턴사가 되려고 도전장을 낸 겁니다. 패턴사란 새로운 제품의 디자인을 보고 그 디자인의 특징을 잘 살려서 패턴, 그러니까 옷본을 제작하는 사람입니다. 옷을 만드는데 있어 디자인을 가지고 설계를 하는 옷 설계사인 셈입니다. 그리고 지금 최한나 씨가 하는 견본품을 만드는 일보다 전문적이고 봉급도 많이 높다고 하네요.
최: 훨씬 좋죠, 우리 샘플메이커가 최고로 받는 것 보다 미니멈이 엄청 더 많아요. 패턴사인 경우 오래된 분들은 최고 봉급이 주에 2,000달러 받아요. 한 주에 초보가 한 800달러 나 1000달러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샘플 메이커는 최고 높아야 800달러 받아요. 이제 시작이니까 해봐야죠.
한 달에 받는 액수가 아니라 한 주일에 받는 액수입니다. 패턴사 교육을 하는 한 학원의 원장은 패턴 사는 단순히 옷본을 뜨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디자이너가 그린 그림을 보고 옷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원단의 성질이나 바느질 등 생산 과정을 미리 파악해야 디자이너가 원하는 옷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제 교육을 받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최한나 씨의 말 직접 들어보죠.
최: 저는 지금 시작한지 한 달 반 됐어요. 디자이너가 주는 것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죠. 사이즈 같은 것은 다 패턴사가 해야 합니다. 이 패턴사 공부는 자기가 얼마 만큼 열심히 하는가에 달렸죠. 3년 해도 못하는 사람이 있고 1년 만에 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 직업의 전망도 좋다는데요, 이일을 하는 전문 패턴 사들은 이만한 직업이 없다며 전문 기술직으로서 다른 직종에 비해 안정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최한나 씨도 진작부터 패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여건으로 학원에 가지 못하다 큰 회사로 옮기고 경제 사정이 좋아졌고, 또 북한에서 배웠던 바느질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군요.
최: 다행스럽게도 제가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패턴사 공부하려고 해도 또 비용이 들잖아요. 봉급이 올라 좀 견뎌 보는 거죠 이전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경제적 능력이 안 되어서 못 배웠어요. 이제 도전해 보는 거예요.
최한나 씨는 이제 완전히 정착해서 일에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간간히 듣는 북한 고향 소식에 한숨을 짓습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를 했다 실패한 소식을 듣고 굶는 가족들과 백성들이 먼저 생각났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최: 첫째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겠는데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왜 하는지 국민들은 굶어 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북한에서 치룬 김일성 100주년 생일 행사를 보고 미국에서 일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보내며 즐기는 일 같이 북한 사람들도 하나의 명절로 보낸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전 국민을 강제로 동원하는 일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 합니다.
최: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중시하잖아요? 마음에 우러나서 기쁨을 느끼고 즐기고, 북한 사람들은 북한에서 교육을 받아 명절로 지내라, 그렇게 하라면 해요
또 북한이 삼대에 걸쳐 대대로 세습 하는 정치에 대해서는 북한이 아직도 유언을 따라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냐며 구습을 벗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 합니다.
최: 옛날의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남긴 유언이 있어요. 대를 이어서 내가 못하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해서라도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유언이 있어요. 여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손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유언장을 남기잖아요, 그 효력이 법적으로도 큰데 이런 것처럼 북한도 그런 체제가 된 것 같아요. 유언, 유훈 통치로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북한은 아직 이런 체제를 고집하고 있다며 이제는 유언에 따른 세습이 아니라 누구든 북한을 잘 이끌어 갈 사람이 통치자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최: 누가 하든 잘하는 사람이 해야죠.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북한체제로서 쉽게 바뀌어 지지 않을 것 같아요 대대로 대를 이어가면서 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기에 북한도 백성들을 굶기지 않고 잘하는 사람이 우리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죠.
지금까지도 북한에 있었다면 아마 3대 세습이 당연하고 세계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았겠지만 북한에 있는 인민들이 외부의 소식을 듣게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한나 씨도 미국에 와서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요, 미국에 첫발을 디딘 후 한 석 달 동안은 일을 찾지 못해 미국에 괜히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했다고 하네요.
최: 석 달 동안 시애틀에서 살다가 여기 왔잖아요. 석 달 동안 직업 못 잡고 있으니까 영어가 안 되어 더구나 하루 이틀에 영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미국에 괜히 왔다는 생각도 하고 그런데 여기 와서 일을 하니까 괜찮아요.
미국생활에서 이제 자신은 조금씩 저축하며 살게 되었다며 빚이 없는 것 만해도 또 패턴사가 된다는 꿈이 있기에 이만하면 부자가 아니냐며 흐뭇해합니다.
최: 저는 패턴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고 지금 회사에 와서 단돈 100달러라도 저금하고 있어 빚 안지면 된 거죠. 웃음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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