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식량배급 중단 후 예술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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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90년 대 말 북한에서 배급 공급이 중단되자 특수층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어려워져 아사자도 쏟아져 나왔죠. 이런 상황에서 재빠른 사람들은 장사를 시작했지만 북한의 예술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생활이었다는데요,

김경란: 예술인들이 제일 힘들어 했어요. 이 사람들이 예술인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장사도 할 수 없었고..

. 평양 민속무용 예술단에서 무용수였던 가명의 김경란 씨의 말이었는데요, 지난 시간에는 예술단원들의 인권침해와 성적유린에 대해서 증언했는데요, 오늘 여성시대에서 배급인 끊긴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봅니다.

음악: 무대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던 예술단원들은 90년대 배급이 끊어지자 암담했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김: 김일성이 죽고 나서 북한에 갑자기 경제가 마미 되고 식량이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니까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연고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들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 도움도 지속적으로 안 되니까 불법으로 밀수도 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비 사회주의적 그룹빠다, 자기 직장에서 탈퇴해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시범으로 노동 교화소에 붙잡아서 넣고 그렇게 되어서 결국 저의 남편이 교화소에 가서 잘못되는 일을 겪게 되었어요. 그로 인해 저는 배우 생활을 할 수 없었죠.

김경란 씨의 남편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같은 예술단에서 활동을 하다 선을 보고 호감을 가져 결혼을 했다는 군요.

김: 저의 남편은 부모님들을 따라 들어온 재일교포 인데 제가 남편과 선을 보게 된 거에요. 그때 남편이 피바다에서 성악가수로 있었어요. 그 사람은 대학을 나와서 실력이 되어 피바다 가극단에 눌러 앉았어요. 재일교포라고 해서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할아버지가 평양에 인쇄 공장을 기증하시고... 저는 기본적인 것은 마음에 들었고 호감을 가졌어요.

남편은 할아버지 대부터 재력가로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지원을 해 남편이 고난의 시기에 밀수를 해도 북한당국이 눈감아 주다 일본에서 지원이 끊기자 밀수를 했다는 죄로 교화소에 가게 된 것입니다. 김경란 씨는 북한의 지상낙원이라는 속임수에 귀국선을 타고 들어온 재일 교포들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이런 사람들은 국가 기관에서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군대도 못나갔습니다 나가고 싶어도, 실제로 재일동포들이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북한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자본주의 물이 빠지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북한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김: 그 사람들이 당의 신임도 받지 못하고 입당도 못하고 군대도 못가고 이러다 재일본 조선인 총 연합회 의장 이었던 한덕수의장이 김일성한테 의견을 올렸습니다. 중앙당 고위 간부 아들과 조총련의 간부 집 딸하고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 딸이 김일성 대학을 다녔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조총련 계 여자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까 그의 아버지는 우리가 자본주의 나라 일본에 사돈을 둘 수 없다고 해서 반대를 하자 조총련 간부의 딸이 자살을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조총련의 간부가 한덕수 의장에게 그런 내용의 얘기를 하자 한덕수 의장이 김일성에게 보고를 한 거예요.

조총련을 통해 재일 교포 사업가들로부터 지원은 다 받아 챙기면서 재일동포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자 총련 한덕수 전 의장이 재일 교포들도 북한 주민들과 같이 기회를 주어 본인들의 능력이 닿는 곳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하게 됩니다.

김: 김일성이 그 얘기를 듣고 1호 명령이라고 해서 친필로 중앙에서 각, 도에서 시, 군에 까지 명령을 하달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한 재일교토들, 또 그 자녀들에 대한 조사를 해서 풀어줄 것이 있으면 풀어주고 정부기관에서 받아들이고 안전원으로도 받아들여라, 국가기관도 능력이 되면 받아들이고 입당도 시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다 재일교포들은 결혼하기가 힘들었다고 하네요.

김: 북한 땅에서 원주민, 북한 사람들이 이들과 결혼을 하면 나쁘게 보았어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요.

그런데요, 당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탈북여성 가명의 윤설화 씨는 그때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재일 교포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얘기하네요.

윤: 재일교포는 생긴 모습 자체가 틀리고 북한사람들이 입는 옷을 잘 안 입어요. 그리고 외모 상으로 키도 크고 생긴 모습도 다르고 입고 다니는 옷 스타일도 많이 다르죠.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반 북한주민들 보다 잘 입고 다녀요.

윤설화 씨는 당시 재일교포 자녀와 친구로 지내다 보니 그 친구 집에도 놀러가게 되면서 같은 또래 친구도 무언가 다른 것을 많이 느꼈다고 얘기합니다.

윤: 일 세대 같은 경우는 더 많이 눈에 띄고 2세대라고 해도 그 친구들이 하는 행동이나 표현 같은 것 북한에서 자유로운 표현을 쓰지 않더라고 이 친구들은 언어 자체가 북한에서 태어나서 자라도 아빠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좀 달라요. 그리고 집에서 따로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다른 교육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친구들은 재일 교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울러 당시 자기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재일교포들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차별을 받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합니다.

윤: 60,70,80 년 까지만 해도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그래서 무조건 북한을 위해 헌신을 다 하는 거죠. 당에도 가입하고 그래야만 출세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으면 돈 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김경란 씨는 80년대 후반 재일교포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 상황에서 남편은 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나자 그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어 남겨진 딸과 살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는군요.

cut: 일단 먹고 살려고 생활은 해야 하니까 장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업고 지방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갔어요. 부모님께 아이를 맡겨놓고 집을 처리해서 그 돈으로 장사를 하다가 안 좋은 사람들의 꼬드김으로 그 돈을 다 사기를 당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중국에 가면 친척들도 있고 하니까 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강을 건넜거든요. 군인들한테 뇌물 고이고 ...

경란 씨는 당시 중국의 생활을 뒤돌아봅니다. 신분적으로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완전히 별천지 세상 이였고 또 그곳에서 접한 남한은 더 놀라운 세상이었던 겁니다.

김: 중국에 들어가니.. 너무 다른 세계입니다. 말은 들었지만 ...다시 이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야 하나 여기 그냥 있어야 하는 생각을 많이 하다가 한국 TV 를 보게 된 거에요.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그러면서 한국에서 탈북자를 받아준다 그리고 제3국으로도 나간다, 한국에 와서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 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전에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에 대한 소식, 특히 북한 공군 조종사였던 이웅평 대위라든지 모든 가족을 데리고 배를 타고 왔던 김만철 씨 얘기 등 북한에서 들은 것과 너무나 달라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까지 했습니다.

김: 미그 19기 비행기 가지고 온 사람 그리고 배를 타고 가족 12명을 데리고 왔던 김만철씨 그때는 제가 평양에 있을 때인데 그 얘기를 들을 때 김만철도 목을 따가지고 오고 비행기를 가지고 간 사람 가족도 특공대 들이 가서 모두 목을 따가지고 왔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TV 를 보니 그 사람들이 다 살아 있는 거예요.

김경란 씨는 살아있는 탈북자들을 보면서 마음을 굳혔습니다. 결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제3국으로 들어가 정착했고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편 탈북 여대생 윤설화 씨는 김경란 씨가 살았던 북한과 자신이 탈북을 했던 시기만 해도 북한이 참 많은 달라진 상황이라며 식량난 이후 재일 교포들도 일본 친척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윤: 일본에서 지원받은 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죠. 북한은 이미 배급제가 끊긴 다음부터는 공산주의 사회라고 볼 수 없거든요. 특히 재일교포 1세대 같으면 일본에서 북한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기술도 가진 분들이에요. 그래서 꼭 당에 입당을 못하더라도 경제적인 능력이 있고 자기가 가진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막 노동하시는 분들은 보지 못 했어요. 정말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더구나 지금은 북한 사람들도 시장원리, 자본주의 원리에 다 적응한 상황에서 재일교포들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윤설화 씨는 강조 합니다.

김: 북한 사회같이 특히 환율이 오르고 내리는 상황에서는 어지간한 자금이 없으면 뭔가 하기 힘들거든요. 금방 바닥이 나기 때문에 그런데 재일 교포들은 이런 자금이 든든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모든 것인 끊긴 상태에서 돈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돈이 곧 권력이고 권력이 곧 돈이고, 북한 사회는 완전히 그래요.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