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한국에서는 5월을 가정의 달로 보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 자녀 등 소중한 가족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우리는 어떤 가정이었나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특히 탈북자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쪼개진 가정의 아픔으로 힘들게 보내기도 했을 텐데요, 하지만 그중에 가족들이 같이 왔거나 먼저 온 가족의 도움으로 뒤에 온 가족들이 누구보다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었다고 하네요.
한: 지금은 식구가 불어나서 웬만한 축구단만큼 되었습니다. 10명이 넘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해 북한에서 기동선전대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한옥정 씨 인데요, 여성시대 오늘은 지난 2003년에 한국으로 들어와 이제 9년째 들어선 한옥정 씨의 가족 사랑을 전합니다.
한옥정 씨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탈북자 5인조 여성그룹인 달래음악단으로 가수로 활동했었습니다. 지금도 가수로 공연을 하면서 북한을 제대로 알리는 안보 강사로 전국을 오가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 행사도 하고 안보강의도 다니고 방송출연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옥정 씨가 가정의 소중함, 가족사랑을 얘기하려면 지난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식량난이 한창이던 당시 그때 바로 북한을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언니가 먼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중국으로 탈북하자 언니를 찾기 위해 일부 가족의 탈출이 이어졌습니다.
한: 우리는 오빠와 언니, 동생이랑 그리고 저는 딸을 다 데리고 와서 온 가족이 만났어요.
아버지는 뒤늦게 가족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강제 북송당해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한국으로 들어온 친척을 통해 알았지만 지금은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다며 아버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언니를 찾기 위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간 한옥정 씨는 동생과 함께 브로커였던 인신 매매 단에 의해 중국인에게 팔려가 이듬해 딸을 낳았습니다. 한 씨는 중국인 남편을 설득해 숨어 지내던 어머니를 사왔고, 먼저 탈북 해 팔려갔던 언니 그리고 이웃 마을에 살던 동생 모두가 정말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이들 가족은 한국으로 가기 위해 2003년 주중한국 영사관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4살이었던 딸은 데려 올 수가 없었죠
한: 4살 된 애를 데리고 오다 사고라도 나면 얘도 똑같은 탈북자가 되어서 북한에 잡혀 나가잖아요. 애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애를 살리려고 영사관으로 같이 뛰어 들지 못 했어요
당시 상황은 영사관 주변이 경비가 심해 자칫 잘못하다가는 모두가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딸을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며 참담했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한: 목숨을 거는데 애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부모로서 할 수 없잖아요. 내가 성공을 하면 너를 꼭 데리러 온다고 생각하고 먼저 나왔는데, 성공해 한국에 왔는데 그 기간이 한 6개월 정도 걸렸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여권을 신청해도 6개월 있어야 여권이 나오기 때문에 6개월 동안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마자 바로 애를 데리러 갔어요.
당장 딸을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여권도 없어 할 수 없었죠. 당장 맡길만한 사람도 마땅치 않아 할 수 없이 브로커, 탈북자 안내 중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던 거죠.
한: 여권도 없고 중국에는 아무도 없고 하니까 브로커를 통해서 데리고 오는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브로커 한데 돈을 주고 애를 맡긴 거죠. 저희가 낯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애를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대사관을 뛰어 들어가는 것인데 대사관에 애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보니까 경비가 너무 삼엄해 져 나까지 위험해 진겁니다.
이런 위험 앞에서 방법이 아니겠다 싶어서 동남아를 통해 탈북자의 한국행을 안내하는 브로커에게 부탁했다는데요, 어린 딸을 사지에 두고 온 엄마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한: 이 브로커 하는 사람들이 정말 안타까운 것이 이들도 목숨 걸고 하는 거니까 사람들을 움직이고는 전화번호를 다 바꾸어요. 전화 연락이 전혀 안 되는 겁니다. 한국에서 애를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울면서 기도하면서 애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어요.
4살 된 딸을 브로커한테 맡기고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낸 지 한 7개월 만에 전화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 국정원에서 전화가 온 거에요 애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브로커가 버어마로 해서 라오스 국경까지 넘어서 마지막에는 베트남으로 마닐라 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오기까지 7개월 걸렸어요. 그동안 애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딸을 떼어 놓고 영사관으로 뛰어들 때 그 어린 딸에게 왜 엄마가 너를 놓고 먼저가야 하는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까요.
한: 너 엄마 떨어져서 저 사람하고 같이 가야 엄마하고 한국에 가서 살 수 있다고 하니까 애가 뭐 알아요? 애가 화장실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화장실 앞에서 울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애한테 네가 이러면 우리 다 같이 한국에 못 간다, 너 한국가려면 무조건 이 사람 따라 가야한다고 하니까 애가 엄마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7개월 이면 다른 탈북자 가족 상봉에 비해 빠른 기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고 한데요 당시에 딸을 만나보니,
한: 7개월만이 만났는데 너무 애가 훌쩍 커버린 거예요 내 딸인데도....
그러던 딸이 이제는 어엿한 중학생이 되어서 자신을 두고 먼저 왔던 엄마 사정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어 정말 든든하다고 하네요.
한: 딸이 중학교 1학년 되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에요. 자기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탈북자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비젼을 가지고 그 당당함으로 잘 이겨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아 꿈이 커요.
그는 중국에 버려진 이런 아이들의 수가 아직도 많지만 이들을 돌보는 사람조차 없어 그 아이들이 결국은 꽃 제비로 떠돌거나 팔려가는 일이 대부분이라는데요,
한: 그 애들에게 인권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중국, 거기서 살다 죽어도 누가 법적으로 문제를 삼을 수가 없어요. 국적이 없는 애들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엄마들이 낳고 그대로 붙잡혀 나가면 그 아이들은 중국에서 거치처럼 그냥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중국 조선족들은 이런 애들을 모아 애가 없는 집에 팔아먹는다잖아요.
자신도 아이를 두고 왔던 아픔을 겪었기에 주변에 있는 이런 탈북여성들이 평생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고 더구나 대부분의 탈북여성들은 이런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한: 엄마들이 거의 다 중국에 애를 두고 왔어요. 한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중국의 아이를 숨겨요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아요.
북한의 인권문제, 탈북자 강제북송문제 등은 드러내놓고 반대 시위운동이라도 하지만 중국에 버려진 아이들 문제는 당사자들이 적극 나서지 못한다면 해결 방안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한: 이런 것은 정말 예민한 사회적 문제라 조선족의 애 한족의 애도 되고 탈북자의 애도되기 때문에 복잡한데 탈북자 문제도 해결이 안 되는데 어떻게 탈북자의 자녀 문제 까지 해결이 되겠어요.
온 가족이 한국으로 오기 까지 고생은 물론 마음의 깊은 아픔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온 가족이 함께 하면서 그런 상처들이 아물어 가고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고 얘기합니다.
한: 가족들이 주말마다 모여서 옛날 얘기도 하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같이 해 먹어요. 특히 계절마다 맛있는 것이 나오면 오늘도 요즘 꽃게 철이라 게 쪄먹고 새우튀김 해 먹고 지금 집에서 여유부리고 있어요.
특히 가족들이 모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은 북한에서 먹던 고향음식을 이제는 별미로, 특식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라고 하는군요.
한: 강냉이 국수라고 옥수수 국수 있잖아요, 배고플 때 먹었는데 전에는 이제는 그게 특식이에요 그래서 옥수수 국수해서 김치 국에 해 먹어요.
한옥정 씨는 지금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주 즐겁게 살고 있다는데요, 좋아하는 노래도 부르고 방송활동도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한국의 채널 A 라는 텔레비전 방송에 매주일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는데요,
한: 체널 A에서 '이제 만나러갑니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탈북여성들이 열 몇 명이 나와서 한주에 한번 씩 방송되는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살아왔던 이야기, 거기 고정적으로 나가고 있어요.
Cut: 남: 탈북미녀들과 함께하는 이제 만나러갑니다. 북한을 넘어 자유대한에 온 여성들과 이야기는 나누는 시간. 여: 네, 그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소통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 과연 남북이 함께 하는 어린 시절 놀이가 있을까?
한: 쎄쎄세 이런 것 있잖아요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
아울러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할 일을 빠뜨리지 않고 있는데요,
한: 탈북자 강제 북송중단 시위 할 때나 행사가 있을 때 열심히 나가 돕고 있어요 탈북자들이 소리를 내가 우리가 어떻게 겪었는지를 알아야 사람들이 이해하고 북한의 실정을 알 수 있기에 안보 교육에서 힘을 기우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자신이 정말 잘 한일이 한 가지가 있다며 자랑스러워 합니다.
한: 내가 살아오면서 제일 잘 했던 것이 여권 나오자마자 숨도 안 쉬고 중국의 두고 온 아이를 바로 데려 온 겁니다. 한국에 온 것 보다 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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