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홀로 남한으로 내려 왔던 여성이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와 북한 고향의 가족들 생각에 북한에 구호 활동을 펼치며 한반도 통일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저는 코리언 아메리칸, 이산가족으로서 가족을 찾고 보니까 what can I do?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나 소규모로 북한에 의료품을 보내게 되었어요.
이복신 씨는 북한을 위해 여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비영리 단체 힐링재단을 설립해 의약품을 보내며 이제 80을 바라보는 지금도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고 하는데요, 오늘 여성시대에서 얘기 들어봅니다.
음악:
독립운동 가이며 종교인, 또 민권 운동가였던 함석헌 사상연구회, 미국의 모임인데요, 이 모임 7월 월례회에서 이복신 씨를 초청해 어느 이산가족이 본 '통일과 평화'라는 주제의 강연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복신 씨는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의사를 꿈꾸던 학창 시절에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족들과 헤어져 남한 길에 올랐습니다.
이: 저는 평양 사범전문학교 예과 2학년 때 6.25 동란이 일어났는데 의사가 되려고 했어요. 사범학교에 가면 선생이 되고 의사는 될 수 없다 그리고 평양 안에서는 전학을 할 수 없었어요 그때, 그래서 사리원에 사촌 언니가 있는 데 그곳으로 도망갔어요. 거기서 중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평양에 와서 의과대학에 가려고 사리원에서 졸업식을 하고 있을 때 사리원 정거장이 폭격 되었어요. 정거장이 끊어지면서 저는 3일 동안 걸어서 평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10월19일 유엔군이 들어왔고 12월 3일에 서울에서 딸을 찾으러 오셨던 분이 딸을 찾지 못하고 저를 데리고 간 거예요.
이렇게 서울로 피신한 이복신 씨는 1956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과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와 공부를 하고 그 후 북한의 가족들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고 하는데요.
이: 제가 경험한 것을 얘기 하겠는데 직접 조선민주 인민 공화국 해외 동포 해 가지고 사진 넣고 양력을 써서 편지하면 편지 갑니다. 가족을 찾는다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찾는다면 잘 안됩니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하는데 해도 문제가 많았어요. 이산가족 이용해서 돈 받아먹은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직통으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복신씨는 헤어졌던 형제들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요, 미국생활을 오래한 터이라 30여년 후 북한 방문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미국에서 하던 차림 그대로 북한을 갔다는 겁니다.
이: 1988년 헤어졌던 형제들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제가 1차 방문 때는 거의 쫓겨 나가다 시피 했습니다. 그때 처음 갔을 때 샤넬 향수에다 머리는 한광주리 같이 부풀리고 패션 옷을 입고 발가락 나오는 하이힐을 신고 찾아 갔어요 화장 짙게 하고, 제가 미국사람 다 되었죠. 그러고 가니까 우리 형제들이 우두커니 서서 알아보지 못 한 거예요. 저쪽에서 볼 때 미국 도깨비가 왔어요, 빨간 옷 입고 그리고 산소에 간다는데 뻔쩍 거리는 화려한 옷을 입고 가려니까 언니가 저의 옷 가방을 보더니 입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그래요. 부모님 산소에 가는데, 그러더니 옷을 보내왔어요. 아주 연한 옥색 옷과 고무신 그래서 치마 저고리 입고 고무신을 신고 갔는데 그 때도 그렇게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이렇게 35년 여년 만에 고향에 가서 형제들을 만난 이복신 씨는 내가 형제들을 위해, 북한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하는데요, 당시 자신은 나이도 많은데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하네요.
이: 나는 능력이 없어요. 한국여성이고 나이도 많이 들었어요, 돈도 없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북한에 가보니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래서 제가 한 것이 힐링 재단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한인 마켓 롯데에 가서 북한을 도와주자고 의료품을 보내자고 사진과 내용을 쓴 종이를 부쳐놓았어요. 그랬더니 몽땅 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없애 버렸어요.
그는 북한을 다녀오고 나서 힐링 재단을 설립하고 조그맣게 구호활동을 시작하면서 다른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Project Hope 와도 함께 의약품과 구호품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과 사업을 시작 하게 되자 중국은 물론 북한을 다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통일 한반도를 꿈꾸며 북한을 갈 때는 꼭 남한을 거쳐 서울도 함께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 그 후 12번 북한을 방문 했고 또 당시 중국과 제가 조그마한 범위의 수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26번 가면서 초청도 받았고 중국정부에서 90년 초기에 사업을 하자고 제의를 해서 그것 때문에 갔었고 그래서 북한에 가면 꼭 남한을 거쳐 서울에 들렸습니다.
그는 이어 자신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 북한과 남한을 오가며 원래 하나였던 한반도의 분단이 60년 동안 지속된다는 것은 비정상 이라며 허물어진 집을 기와 장하나 벽돌하나 흙 한줌으로 복구해서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지금의 한반도는 중환자 상태라고 비유 하는데요,
이: 허리 꺾어 져서 누워서 앓고 있는 중환자에요. 피를 흘리며 출혈하는 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환자를 어떻게 살릴 수 있나 우선 출혈을 멈추어야 하겠죠. 그다음에 수혈을 하고 끊어진 혈맥을 우리가 꿰매야 하고 잔 신경을 이어야 하고 일어나 걸어서 결국은 운동장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지구상에서 함께 뛸 수 있게 분단된 한국을 어떻게 살리는가, 이렇게 비유하면 좀 쉽지 않을까요
이런 중환자를 살리는 길은 한반도의 통일 이라며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 그동안 경험에서 얻어진 것은 통일이 되기 위해서 우선 북한과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군요.
이: 통일은 평화적으로 민주적으로 단계적으로 이것을 구상하는데 구상은 교류를 해야 합니다. 경제교류 문화 교류 이런 건데 교류는 통일입니다. 한 솥에서 밥을 함께 먹고 함께 잘 살자는 거예요. 그 예로 개성공단은 통일이 가능하다는 한 증거이며 과정이며 연구실이에요. 남북 고등학교 대학생 실업가들을 보내 견학 시켜야 합니다. 북과 남의 자원과 기술로 실험해 성공하고 그 경험에 의해서 제2 제3 제4 제5의 개성공단을 북쪽에만 아니라 전국에 만드는 겁니다.
60년 이상 멀어진 남북이 이외에도 문화, 체육, 음악교류 등을 통해 서로를 좁힐 수 있는 일 이라고 꼽았습니다.
이: 남북 공동 스포츠, 문화 활동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올림픽에 나갈 때도 남북이 한 팀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거고 또 옛날에 할 수 있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외국에, 국제사회에 한국은 영구적으로 분단된 나라가 아니다 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도 이러한 문화 활동으로 남북한에 같이 체육 음악 이런 것은 쉽게 할 수 있잖아요?
이를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통일교육, 시민교육을 통해 사고, 인식이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통일 교육을 시켜야 돼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까지, 김일성 대학 학생들과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교환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그리고 와서 견학 시켜요. 북한에서는 Capitalistic Management, 자본주의 관리를 모르거든요.
이복신 씨는 이런 한반도 통일을 위해 코리언 아메리칸이 미국, 여기에서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에 멈추지 말고 조그만 것이라도 행동으로 옮길 것을 주문합니다.
이: 왜냐하면 우리는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요. 북은 물론 남에서도 이런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해외에 있는 우리 1천만 코리안 들이 객관적인 정보를 가지고 한반도를 평가하고 보고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 했습니다.
이: 우리가 통일이라는 이 거대한 도로를 향해서 갈 때 흙 한 줌도 필요하지 않아요?
음악: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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