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남한에서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제작했던 여성 자원봉사자, 심향진 씨가 대한 적십자사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받아주지 않는 미주 지역의 이산가족들을 위해 영상편지를 제작 합니다.
김 경수: 비행기 타고 등록하러 갔잖아요 그런데 적십자사에서 나는 미국사람이라 안된데요
미국 알칸 주 알칸소 주립대학 교수로 은퇴한 김경수 박사의 하소연이었는데요, 극소수인 이산가족 상봉자 대상에 포함 될 길도 없고 북한 가족의 생사확인 조차 할 수 없는 고령의 이산가족들, 이제는 극심한 낙담으로 건강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어 영상 편지를 서둘러야 한다고 심향진 씨는 강조합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자원봉사자 심향진 씨가 제작하는 북한 가족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80-90 이 대부분인 고령의 이산가족 1세대 들, 그들이 그동안 남북한 당국에 애타게 요구했던 것은 단 한 번의 행사 성 상봉이 아니고 소식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아주 기본이 되는 인도주의적인 요구였다고 심 씨는 전합니다.
심: 자유왕래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힘드니까 북한의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라도 알게 해 달라는 그리고 우편엽서라도 서로 정기적으로 소식을 주 받을 수 있게 얼굴을 못 보아도 좋다는 거니까 그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이도 저도 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이산가족들을 위해 심향진 씨는 남한에서 지난 2002년부터 2008년 까지 자원봉사로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제작했습니다. 비디오테이프에 담는 영상편지는 이산가족 1세대가 세상을 떠난 후에 통일이 된다면 그들의 남북한 후손이 가족임을 확인하고 살아계실 때 어떤 얘기를 남겼는지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의 대부분의 시민권자들은 상봉의 기회는 물론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등록조차도 어렵다며 북한의 어머니와 동생 셋을 그리워하는 올 해 80 이 다 된 김경수 교수의 사례를 전했습니다.
심: 당시 원산 부둣가까지 온 가족이 피난을 가려고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총을 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어머니께서 1주일 정도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오라고 해서 1950년 12월에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60년도의 정부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알카소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시고 은퇴한 교수님이 한국의 남북 이산가족 찾기 초창기에 신청하기 위해서 귀국 하셨습니다. 당시는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신청을 할 수 없다고 거절 당한 거예요.
김 교수는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지금도 중국 등지에서 아는 사람들 통해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형님과 누님 그리고 난리 통에 부산에서 겨우 만난 아버지는 이산가족을 면했습니다. 북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돌아가신 형님을 비롯한 남한 가족들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며 지금도 북한의 어머니, 동생 얘기만 나와도 말을 잇지 못합니다.
김 교수: 우리 형님이 병원을 하셔서 돈도 많이 모으시고 그래서 항상 어머니만 모셔오면 미국도 가시고 여기저기 여행하시면서 호강 하실 텐데 .... 그 오빠가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 내가 미국에서 50년 가까이 사는데 나도 너희들을 보기 전엔 눈을 감지 못해... 너희들이 오면 내가 무엇을 해 줄지 다 준비 하겠어 그러니 나를 생각해서라도 힘내고 절대로 마음 약하게 먹지 말고 튼튼한 너의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니까 통일될 때 까지 잘 있으라고 ...
김경수 교수는 남한의 아버님과 북한의 어머님은 연세로 볼 때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이제 후손들을 위해 이 영상편지를 제작하는 일은 꼭 필요하고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강조 합니다.
김 교수: 우리 아버님 돌아가셨지 형님 돌아가셨지,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우리아들이 하나있는데 그 아들이 북한의 할머니를 찾으려고 하겠어요? 내세대가 죽으면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산가족 찾기 영상편지 이것을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우리후세대 가족들이 보고 아 우리오빠가 미국에서 살아 있었구나, 큰오빠는 돌아가실 때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이것을 알릴 수 있는 수단 방법이 이것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제작하던 심 씨가 미국에 온지 3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제작비 마련을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은 자꾸 흘러 이산가족들은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하루가 급하다며 미국 내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지의 제작을 서둘러야 한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심: 이산가족들은 고령이시기 때문에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죠. 그래서 다시 미국에서 영상편지를 제작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부 종합센터에 등록된 이산가족 신청자가 전체 12만 8천여 명 중 생존해 계시는 분이 8만 여명 돌아가신 분이 4만 여명 정도라고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대한적십자사나 통일부에서 이산가족의 영상편지를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꾸준한 작업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데요,
cut: 정부차원에서 2005년도에 4천편을 제작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정부가 한번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1세대의 이산가족들 모든 분들의 영상편지를 하루속히 제작해서 데이터베이스 화 즉 컴퓨터에 전산 자료로 할 수 있도록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향진 씨는 서양화 전공을 하고 대학원에서 영상 작가 논문을 쓰면서 졸업 무렵 대한 적십자사에서 주최한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연수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돼 영상편지 제작을 하게 됐습니다.
심: 수강생 한명 당 두 사람의 이산가족을 소개해 주었어요. 대한적십자사에서 그분들의 주소와 성함 그리고 간단한 정보를 주어서 김경진 할아버지 그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바로 저희 집 옆에 있는 아파트였어요. 그래서 영상편지를 처음으로 제작했습니다.
당시 90이셨던 김경진 할아버지는 귀도 어둡고 누우신 상태에서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사연을 인터뷰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요, 그 전에는 북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 근처 산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체력을 관리했던 할아버지가 이렇게 건강이 나빠진 이유는 바로 금강산 관광을 다년 온 이후입니다.
심: 김경진 할아버지는 자녀가 5명이나 된다고 하세요. 한국전쟁 당시에 한 일주일 정도만 잠시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그 마음하나로 남한으로 내려오셨던 것이 일주일이 아니라 반세기 이상이 되었다며 울먹이셨던 기억이 생생하고요, 김 할아버지는 북의 자녀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오로지 그 하나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막상 금강산 관광을 갔는데 북측하늘을 바라다만 볼 수 있을 뿐이지 그 보고 싶은 자녀들을 볼 수 없으니 그 가슴앓이가 얼마나 심했겠어요? 금강산 관광도 제대로 못하시고 바로 거기서 병이 나서 구급차에 실려서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2005년도에 대한 적십자사로부터 북한의 가족을 상봉하게 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병석에 누워만 계시던 분이 이 소식을 듣고 기적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셨죠. 그리고 금강산 상봉장에서 5명의 자녀들을 만나보시고 돌아오셨는데요,
심: 그 이유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북의 자녀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자꾸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완전히 절망을 하신 거죠. 그러고 나서 몇 달 후에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간직한 이산가족 150여분의 영상편지 제작을 했습니다. 물론 이일은 혼자 시작했지만 그 많은 이산가족의 사연과 편지를 담기에는 역부족 이었다고 심 향진 씨는 말합니다.
심: 처음에 한 1년 정도는 저 혼자 캠코더를, 비디오카메라를 메고 이산가족들을 방문해서제작하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겠다는 분들이 생겼어요. 한국에서 저희가 만나 뵌 분들은 약 150 명가량 됩니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북한에 두고 온 남한의 김정길 씨 가족의 영상 편지가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심향진 씨가 제작한 영상 편지의 일부입니다.
김정길: 아버지 어머님 이 자식 21살에 부모님과 헤어져 73살이 되었으니 부모님의 생존 여부에 대해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직까지 아버님 어머님 소식조차 모르고 있어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버님 어머님 오래오래 사시어야 이 자식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서울에서 아버님 어머님의 며느리와 4남 1녀를 두고 50여년 헤어진 세월에 아버님 어머님 생각을 하루도 안 해본 날이 없으며 그리움과 보고 싶어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하루속히 만남이 이루어져 보지 못하셨던 며느리가 손수 지은 진지 상을 받아 보시는 것이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김정길 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가 북한 할아버지께 드리는 소식입니다.
손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둘째 김홍식입니다. 여기있는 사람이 제 처 조경숙이고요, 처: 안녕하세요? 그리고 얘가 저의 아들 김학균입니다, 아들: 안녕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할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불러보지도 못하고 자랐지만 항상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하루 속히 뵙기를 바랐습니다. 좋은 사회, 빨리 통일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고 온 가족이 할아버지께 갈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음세대 증손자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증조할아버지께 사연 보냅니다
증손자: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몸 건강하시고요 꼭 통일이 되어서 뵙고 싶어요 안녕히 계세요.
가족 합창:
이어지는 3대 가족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이 영상편지의 사연은 언제쯤 북한 가족에게 전해 질 수 있을 까요?
미국의 이산가족 알칸소 대학에서 은퇴하신 김경수 교수는 남북한 당국자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김 교수: 이건 휴먼 라이츠 인권이거든요 자기부모를 보고 싶어 하고 핏줄을 그리워 하는거 이건 인권입니다. 이것을 막는 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아니 모든 이산가족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음악: 고향의 봄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이 영상편지 제작에 함께할 자원봉사자나 후원을 하실 분은 이메일(shimji9763@daum.net)로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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