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미주 이산가족들 “추석이 다가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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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민족 명절인 추석이 가까워 고향을 찾아 그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 함께 즐거움을 나눌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설레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한국의 고향, 또 가족 친지들에게 E 메일, 전자 우편은 물론 전화로 안부를 전합니다. 그런데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어도 반세기가 넘도록 전화한통 하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아직도 날이 갈수록 세월이 기다려 주지 않아 더 애가 탑니다.

cut: 죽기 전에 꼭 만나보던지 살아있다는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야 할 텐데...

미 대륙 남부에 있는 알칸소에 사는 80대의 김경수 할어버지, 이분은 미국생활 40여 년 내내 길 만보이면 북한의 가족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애를 다 쓰셨습니다. 이제 알칸소 대학에서 농업과 교수로 은퇴하시고 나서 다시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여전히찾고 있습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북한에서 헤어진 어머니와 세 여 동생을 찾는 김 경수 교수의 얘기 들어봅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피해 고향인 원산을 떠나 피난을 가던 때 당시 16살 소년인 김경수 할아버지가 가장 노릇을 했습니다.

cut: 우리 형님하고 누님은 삼팔선이 있었지만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형님은 의사고 누님을 서울대학교 약대를 다녀서 우리는 북한에 있었지만 아버님도 그때 의사개업 하셨어요 그래서 학비를 보내서 공부하다 6.25가 난겁니다

당시 아버지는 원산에서 의사로 있다 인민군이 의사를 다 몰아가는 바람에 아버지와도 헤어지게 되자 박천 이라는 두메산골에서 간간이 아버지께 가족들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cut: 그때 북한에서는 꼼짝 못하게 해서 의사들은 전부 도립병원에 집합을 시켜 놓고 당시 아버님이 안계시고 해서 내가 가장이 되어서 우리어머님 하고 리어카 를 얻어가지고 쌀 한가마니 싣고 내 동생이 1949년생에요 그래서 그 젖먹이도 싣고 우리는 정처 없이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폭격이 쏟아지고 하니까 아비규환 원산시민들이 모두 방황하다 사람들에 밀리고 밀려 두메산골 들어가 간신히 방 한 칸을 얻어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립병원에 인민군들에 의해 갇혀서 계시니까 내가 거기서 70리 길 원산시내까지 틈틈이 걸어서 아버지와 연락해 우리 피난 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거기서 몇 년 묵은 강냉이하고 감자를 옷하고 바꾸어 먹으면서 살았는데 하루는 우리아버님이 오셨어요. 아버님 말씀이 인민군대에서 일선에 나가 야전병원을 차려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치료하러 간가며 우리에게 금가락지를 한주먹 주시더라고요 이것으로 먹고 살라고 그러고 아버님은 떠나셨죠.

그때가 1.4후퇴 전인 9-10월경 이렇게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김경수 할아버지 가족들은 박천에서 원산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cut: 우리 집은 다행히 조금 폭격을 당해 거기 있으면서 아버지가 오실지 그리고 남한에 있던 형님과 누님과는 연락이 되겠지 그러면서 이 가족들이 오기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12월이 되가는데 우리는 외부 소식 듣는 수단이 라디오 듣는 것 밖에 없어요 우리국군이 올라가 압록강 까지 갔잖아요 그리고 평양까지 가서 이승만 박사가 평양에 와서 연설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는 우리가 다 통일이 되었는지 알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그랬는데 다시 국군이 후퇴를 하기 시작하잖아요

국군이 후퇴를 하기 시작하자 다기 피난 보따리를 싸고 떠나야 했습니다. 원산시민들도 모두 인민군들이 또 내려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그런 중에 미국 해군 항공모함인 LSD 두 척이 원산항에서 피난 가는 사람을 태워간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cut: 원산 시민들이 전부 원산 부두로 가는 겁니가 배를 타려고 그래서 어머니하고 동생 셋하고 부두가 가보니까 뭐 인산인해예요. 그러니까 헌병들이 총을 쏘면서 우리 국군이 지금 후퇴하지 않고 다시 북진하니까 전부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요 그러니까 기진 맥진 해서 다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죠.

그러나 김경수 교수 어머니께서는 아들하나만 이라도 우선 남으로 보내려고 부둣가로 나가보라는 성화에 상황이 어떤 지 보려고 나갔다는데요,

cut: 우리어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너는 여기 남아있으면 인민군대가 오면 아무리 어리다 그래도 인민군에 징집으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혼자라도 부두에 가보라고 어떤가 그래서 부두에 가니까 사람들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 때 보니 피얼스 배 데는 곳에서 조그만 쾌속정이 와서 사람들을 실어다 항공모함으로 나르고 있어요.

하지만 그 배에 탈 수 있는 사람들은 남한의 가족들과 떨어졌던 군경들로 북한에 거기 그대로 남아있으면 정치적으로 인민군에게 희생당하게 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도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16살의 소년은 혼자서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에게 밀려 항공모함으로 나르는 쾌속정에 타려다 그만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다는 군요

cut: 그 추운데 그래서 버리쩍 버리쩍 하고 있는데 마침 쾌속정에 있던 미군 흑인이 나를 번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배에다 나를 실었어요. 그래서 항공모함 LSD로 간 겁니다. 그래 내가 너무 추워 덜덜 떠니까 큰 잠바로 나를 씌워주면서 부엌에 가서 불을 쬐라고 나는 그렇게 해서 항공모함을 탔습니다. 그 사람이름을 내가 지금도 기억해요 윌리엄스,

하지만 만선이 된 배 안에서도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부산에 도착할 때 까지 그 많은 피난민들이 끼니를 해결해야 하고 어린자녀, 나이 드신 부모님, 형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충격도 컸습니다.

CUT: 사람들이 배에서 밥을 하고 빨래도 하고 젖먹이를 떨어뜨린 엄마가 없나 부모와 헤어진 어린아이들이 없나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명이 탔으니까 그래서 어떤 처녀는 정신을 잃었어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상입니다. 날이 밝아서 원산 부두 가를 보니까 원산은 불바다야 미군들이 후퇴하면서 거기 있는 장비 석유 등을 전부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래 나는 혼자 우리어머니가 저기 계시겠구나,

김경수 교수는 그 당시 참담했던 마음은 일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피난민을 가득 실은 항공모함은 부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북한 원산 고향에는 어머니와 동생 셋, 원산 어디인지도 모를 인민군 어느 야전병원에는 아버지, 그리고 남한에는 형님과 누님 이렇게 흩어진 상황 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한 이틀 후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리니까 그곳에 생각지도 못했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더라는 군요,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나 하는 어린 마음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전합니다.

CUT: 배에서 내리니까 우리 아버님이 거기계신 거예요 기다리고 계세요 인민군복을 입고 야전 병원을 차린다며 가신 것을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부산에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우리아버님은 나오셔서 원산의 우리가족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다가 북한에서 우리아버님은 야전병원을 하다 며칠 되지 않아 후퇴 명령이 내리니까 원산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거기우리 외가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외가로 가셨어요.

야전병원으로 파견되면서 바로 인민군 후퇴 명령이 떨어지니까 외가로 피했습니다.

우리 외가로 들어가서 인민군복을 태우고 사복으로 갈아 입으셨죠 그때 남한으로 나오셔서 라디오 방송을 들으시니까 어디서 후퇴하고 원산에서 항공모함이 두 대 떠났는데 피난민을 싣고 내려가는 중이다 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엘에스디가 부산에 언제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 부두에서 원산에서 왔다니까 혹시 누가 타고 있지 않을까 해서 아는 사람이라도 있겠지 하고 기다리셨는데 거기에 내가 혼자 나타난거죠.

당시 김경수 교수 형님은 국군 군의관 이었고 누님은 대학생으로 부산 피난학교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렇게 해서

cut: 부산에서 다 만났죠. 17:27

남한에 온 가족들은 다 만났지만 북한의 가족은 정말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릴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거죠.

다음 시간에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김경수 할아버지께서 미국에서, 중국에서 북한 가족을 찾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전해드립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