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미주 이산가족 김경수 씨, 주중 북한대사관까지 들어가

0:00 / 0:00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또 추석 명절이라 고향이, 헤어진 가족이 더욱 보고 싶고 생각이 많이 나죠. 북한 원산이 고향인 김경수 씨는 미주 이산가족으로 미국에서 50여 년이 넘게 사는 동안 지난 1992년에는 헤어진 북한 가족의 생사라도 알고 싶어 중국에 있는 북한 대사관까지 들어가 북한 영사를 만났습니다.

cut: 내가 영사님을 만나러 왔다니까 안의 영사와 연락을 해서 영사가 나왔는데 김춘일이라는 영사였습니다.

또 중국 학회에 참석하면서 조선족 위문 공연차 온 북한의 예술단 단장도 찾아가 가족의 소식을 알아 달라는 부탁도 했습니다. 여성시대, 미국의 알칸소 대학의 교수로 은퇴한 김 경수 씨의 북한 가족 찾기 지난 주일에 이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일사 후퇴 전 유엔군과 남한군의 후퇴 조짐을 알고 북한군이 또다시 내려오면 아들이 징집될 것을 염려한 김경수 교수의 어머니는 한 달 정도만 있으라며 남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16살 중학생이 혼자서 집을 떠난 거죠. 이미 가족이 모두 함께 떠났다 되돌아온 상황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막냇동생과 그 위로 두 동생 이렇게 모두 함께 피난길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김경수 교수는 당시 운 좋게 원산항에 정박한 LSD, 미 해군 항공모함을 만나 피난민들에 떠밀려 그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형님과 누님은 전쟁이 나기 전부터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느라 헤어져 살았고 의사였던 아버지는 인민군 야전 병원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도 후퇴의 소용돌이 속에서 야전병원을 나와 외가로 피했다가 남쪽 부산으로 내려간 겁니다.

cut: 그래서 우리 아버님을 거기서 만날 수 있었고 그때 우리 형님은 국군 군의관으로 계셨어요. 누님은 서울대학교 약대 학생이었어요. 부산에서 다 만났죠.

아버지는 대구에서 병원 개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활 형편이 좋아지면서 김경수 씨는 피난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자원입대 했습니다. 제대 후 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1960년에 미국으로 온 김 교수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어머니와 동생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는 김경수 할아버지 80이 다된 지금도 가족을 찾고 있는데요,

cut: 그때 원산에서 떠난 12월 7일인데 그때가 마지막 본 거예요. 미국 대학에서 40여 년 동안 교편을 잡고 은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에 우리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만을 계속 기다리다 결국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어머니도 연세로 보아서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 생존하실 때 동생 셋을 찾으려는 노력은 미국 내부터 시작되었죠.

cut: 미국의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가 보스턴에서도 있고 뉴욕에도 있고 캐나다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전화도 하고 편지를 해서 거기서 찬조금으로 500달러 천 달러 이렇게 내면 내가 준 가족 인적 정보를 가지고 북한에 가서 너희가 찾는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으니까 가보겠느냐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세 곳에 모두 연락을 해서 찾으려고 했는데 소식이 전혀 없어서 연락을 해보면 우리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이산가족, 친구 중에는 북한에 가서 가족을 찾아 북한에 가서 가족을 만나기도 했지만 김 교수에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하는데요.

cut: 여기 미국 맴피스 대학의 교수 한 친구는 나하고 똑같이 이산가족상봉추진 위원회에 신청해서 찾았어요. 그래서 자기 누이도 만나고 누이동생도 만나고 그래서 내가 몸이 달아서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 안 되어요.

캐나다는 북한과 외교관계가 있기 때문에 북한의 가족을 찾을 길이 쉬울 것 같아 캐나다의 이산가족 찾기에도 신청했지만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cut: 캐나다에서도 못 찾았으니 미안하다고 아직 찾는 중이라고 못 찾았다고 그래서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마침 여기 대학원학생이 내 밑에서 박사 하는 학생이 중국에 몇이 있었어요.

이렇게 제자를 통해 중국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장소는 베이징의 천안문 근처라 그곳에서 강의하면서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중국에 있는 북한 대사관을 찾아 가족을 찾을 길을 알아보기로 하고 북경에 있던 친구와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cut: 1992년도에 중국에서 안 되겠다 내가 중국의 북한 대사관을 가야겠다, 그래서 집사람하고 둘이서 대사관을 가는데 겁도 좀 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중국 시민이니까 그 사람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대사관을 가야겠다니까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고...

그런데 김 교수는 미국 여권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 북한 대사관에 갔다 혹시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몰라 가기 전에 한국 측 누구에게든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92년 당시 중국과 한국의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바로 전이었죠. 그런데 베이징 대한항공 지점에 한국의 외무부 주재원이 중국을 오가는 한국 사람들의 신분을 보호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cut: 이산가족을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기 위해 북한 대사관에 가는데 거기서 만일 비자를 주면 북한에 갔다 오겠다, 그것을 당신한테 알리기 위해서 왔다, 그 주재원이 나를 보고 '가시는 것은 좋지만 신분 보장이 되고 북한 대사관에서 보내 줄는지는 모르지만 알겠다' 라며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적어 놓더라고요.

그 다음 날 김 교수는 북한대사관에 들어가 안내원을 만나 6.25 전쟁 때 헤어진 어머니와 동생을 찾는다는 얘기와 함께 가족들의 자세한 인적사항을 전달했습니다.

cut: 대사관에 들어가서 영사님을 만나러 왔다니까 안의 영사와 연락을 해서 영사가 나왔는데 김춘일이라는 영사였습니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위원에 보내려고 내 동생들과 어머니 생년월일, 어디서 살았고 어디서 헤어졌고 외할아버지는 누구시고 가족관계를 다 적어서 가지고 갔거든요. 지금도 내가 그걸 가지고 있어요.

당시 김춘일 영사가 가족의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보자 김 교수는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가족들을 찾았지만,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했다는 군요.

cut: 내가 가족을 찾아야 하는데 당신들이 찾는다면 더 쉽게 찾을 것 같아 내가 찾아왔다고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가기 전에 북한으로 가서 우리 가족을 만나겠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면 내가 김일성 대학에 가서 강의할 용의도 있다, 그러더니 이 사람이 내가 준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하고 둘이 나와 나를 찬찬히 보면서 '이렇게 자세히 써 못 찾을 리가 없는데' 어쨌든 자기가 찾겠다고 ....

그런데 김 교수는 중국학회에 참석하고 하얼빈 대학에서 2주일 동안 강의를 해야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춘일 영사에게는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하고 하얼빈에 가서 계속 연락을 하겠다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cut: 김 그동안 전화해서 우리 가족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당신에게 전화해도 괜찮겠냐고 그러니까 그 김춘일 영사가 명함을 주면서 전화하라고, 그래서 이틀 후에 하얼빈을 간 거죠

그런데 하얼빈에서 강의를 하던 중 한국문화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는데요, 그런데 문화관 관장이 평양에서 마침 대동강 악극단이 하얼빈의 조선족 위문 공연을 온다는 소식을 전하면 이 공연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김 교수는 다시 한 번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cut: 대동강 악극단의 그 단장을 만나서 내 사정 얘기를 하고 개인적으로 그 사람한테 내가 우리 가족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나 그래서 내가 문화원 관장한테 내가 이산가족이라 가족을 찾고 있다는 사정 얘기를 하고 그 악극단 단장을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잘 이해하겠다며 노력을 하겠다고 해요

공연은 북한노래는 물론 중국 노래 등으로 조선족들의 흥을 돋우었습니다.

cut: 김일성 장군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중국노래도 부르고 북한노래도 부르고 하니까 조선족들이 손벽 치고 그래 공연이 끝났어요. 그래서 밖에서 기다리니까 악극단 단장하고 문화원 관장이 나를 부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악극단 단장한테 내 얘기를 했어요. 그 이름이 김철수, 이름도 아직 외우고 있어요. 그 사람 명함도 가지고 있어요.

김 교수는 김철수 단장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원산이 고향이고 가족을 찾고 있다고 그런데 마침 공연하던 배우들이 줄을 서서 김 교수 일행에게 인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중 여성 한 명이 고향이 원산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얘기하는 장면을 북한이 텔레비전 카메라로 촬영해 당황했다는 당시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cut: TV 카메라를 가지고 내가 북한 단원들과 만나는 사진을 찍고 .... 북한에 우리 어머니한테 동생들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교수를 한다고 그런데 이왕 내 신분은 다 밝혀진 거고 북한까지도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알려지면 어떤가 하고 공연한 사람들과 악수도 했어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의 대학, 집 주소, 전화번호 등 모든 것을 단장에게 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족을 찾으면 인사는 잊지 않을 테니 꼭 연락해 달라, 그리고 헤어졌어요.

하얼빈의 강의 일정을 다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cut: 하얼빈에서 김 영사에게 전화를 자주했어요. 그런데 못 찾았다 못 찾았다 북경에 와서 물어보니 못 찾았다고 미안하다고....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노력을 했기에 분명히 연락을 할 것으로 믿고 미국으로 돌아온 김 교수는 혹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cut: 내가 미국으로 가면 무슨 연락이라도 왔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돌아왔어요. 돌아왔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고 우리 형님도 어머니 때문에 눈 못 감고 돌아가셨어요.... 가슴이 뭉클해지네.

김경수 할아버지는 그 많은 이산가족이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며 그래도 아직 남은 이산가족들이 포기하지 못하고 북한 가족의 소식, 아니 생사확인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합니다.

cut: 나도 그렇지만 미국에 와 있는 교포들도 이산가족이 많아요. 내가 아는 사람, 제자들도 보면 시간이 가면 한 분 한 분 자꾸 없어지지 않아요.

김경수 할아버지는 이런 상태로 이산가족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며 이제 한국 정부나 이산가족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어 국제사회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cut: 내가 김일성 밑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내 어린 나이에도 억압하고 억압했는데 김정일 정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무슨 햇볕 정책해서 평화적으로 하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유엔을 통하던지 국제사회의 단체를 통해서 해야지 이건 휴먼 라이츠, 인권이거든요.

김경수 할아버지는 오늘도 어머니와 동생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들여다보며 나이를 세고 있습니다.

cut: 어머니는 1907년생이시고 내 동생이름은 김의수 일흔다섯, 그 밑의 동생이 은수, 일흔둘인가 일흔하나고 막냇동생이 희수라고 예순 서넛 됐죠. 죽기 전에 꼭 살아 있다는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야 할 텐데...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