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 피해로 실종된 가족들 장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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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보기 드문 대 홍수로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피해는 수백 명에 달한다고 보도 했는데요, 홍수 지역이나 인근지역이 고향인 탈북자들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는지 혹시 가족이 실종 된 것은 아닌지...여기서는 지구촌 어디든 전화 한통화로 다 알수 있는데... 하면서 답답해합니다. 그런데 홍수 지역에 실종자들의 가족들은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일 텐데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런지요?

김: 그 상황에서 모두 재산 다 잃고 집 다 잃고 이런 사람들이야 시신을 찾았다고 해도 온전하게 장례를 치룰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런 주민들의 심정은 북한 당국이 몰라라 하는데 어디다 도움을 청할 지 안타깝기만 하다는 탈북 민들의 얘기입니다. 북한 보안서에 일하다 탈 북해 한국에 정착한 김시연 씨와 함께합니다.

음악:

남북한은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묘지를 쓰는 같은 장례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있죠. 한국은 인구 밀도가 높다보니 묘지를 쓰기도 하지만 납골당 혹은 수목장등 다른 장례 문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 고난의 행군뒤 부터는 당 간부 이상이나 돈을 많이 번 사람들만 묘지를 쓰지 일반 서민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장례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김시연 씨는 말합니다.

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격식을 차려서 하겠지만 이제는 묻을 땅도 없어서 엄청 멀리 가야 한다고 그래요.

김시연 씨는 남한에서도 고향 친구 나 지인들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 서로 위로하고 슬픔도 함께 나눈다고 하는데요 얼마 전에 친구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 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친구는 가족이 함께 탈 북해 그동안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다 장례를 치룰 수 있어 정말 다행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합니다.

김: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동생 집에서 아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이 친구는 서울에서 일하는데 그 바쁜 가운데도 주말마다 꼭 내려가서 아주 열심히 다녔어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아버지 계신 병원 방문 하게 되면 내가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맛있는 것 사드리라면 돈을 좀 보냈는데 그 때 친구 남편이 효녀도 이런 효녀가 없다고 아버지에게 너무 잘한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친구는 매주 시간을 쪼개어 부산 까지 가서 병원에 계신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고 하네요.

김: 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너무 가슴아프다고 하면서 매 주마다 짬만 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더라고요 그 먼데도 열심히 다니고 해서 저도 감동 받았어요

그 친구는 자녀들을 두고 중국으로 넘어가 돈을 벌어서 먼저 자녀들 데려왔고요,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김; 북한에서 탈출할 때 아이들, 오누이가 있었는데 데려오지 못하고 혼자만 급하게 탈출 했다가 1년 동안 중국에서 돈을 벌어서 다시 북한으로 나갔어요 중국에서 북한 고향 까지 걸어서 나갔데요, 거기서 아이들 데리고 다시 두만강건너 중국에 산속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한국으로 넘어 왔어요.

이어서 아버지 어머니 모셔오고 동생들도 데려오고 해서 가족들이 다 한국에서 살 수 있었다며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느냐고 말합니다.

김: 그 친구는 돈을 엄청 벌어서 돈을 가족 데려오는데 다 투자 하고 남한에 와서도 어머니가 연세가 있으시니까 생활비도 많이 보태주고....

그래서 남한에서 온 가족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모셨다는 거죠

김: 아버지의 장례식이 부산이라 멀어서 가지 못하고 부조금만 보냈어요 부산 까지 갔다 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못갔어요.

김시연 씨는 한국에 와서 보니 남북한이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단절되어 장례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김: 여기서 저희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해서 장례식에 여러 번 가 보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완전히 달라요. 북한은 돌아가시면 예전에는 그나마 나무관이라도 짜서 땅에 묻었지만 지금은 묻을 땅도 시원치 않고 더구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을 거적에 말아서 땅 에 대충 파서 묻었는데, 묻는 것도 땅이 없는데다 또 도시에서 가까운 산에는 묻지 말라고 해서 힘들게 손수레에 끌고 가서 먼 곳 다른데에 묻어놓았어요

고난의 행군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장례도 치루지 못해 세상을 떠나서도 편안하게 쉴 수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는데요 그런데 지금도 북한의 김정은이 핵 개발, 미사일 발사 실험 에만 몰두 하고 있어 이번 물난리로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슬픔이 더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 사람들이 불쌍하게 죽어서도 편하게 누울 곳이 없어 장례도 못 치루고....

그런데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음을 맞더라도 당장은 슬프고 안타깝지만 마음에 한 으로 까지 남아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김: 여기 오니까 다 장례 절차를 따르고 특히 탈북자들은 국가에서 지원 나오는 것도 있어요 돌아가시면 장례를 다 치르도록 해주는 후원 단체도 있고 장례를 여기서는 다 제대로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거보면 남북이 서로 상반되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국에서는 아직도 3일장이 보통이고 각 가정 사정에 따라 5일장, 7일장 까지 치르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남한도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묻거나 화장을 해서 강이나 호수에 뿌리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장한 뒤 납골당에 모시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납골당은 로마시대의 묘형식의 하나로, 비둘기 집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벽면을 오목하게 공간을 여러 개 설치해서 그곳에 화장을 한 뒤 뼈를 추려 담는 그릇을 넣고 꽃이나 가족사진으로 장식을합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전에는 남한과 거의 비슷했다는데요,

김: 70년대 80년대는 3일 장이ᄋᅠᆻ어요 그런데 남한 같이 장례식장이 없어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하면 집으로 모셔오는 거예요 그리고 문상 오는 손님들은 다른 집에서 식사를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하고 아무래도 인사 하러 오는 분들이 부조금을 내니까 식사를 대접합니다. 거나하게 하지는 않아도....

그리고 나서 3일 뒤 장지로 떠나는데 북한의 경제가 점점 나빠 가면서 시신을 실어 가는 장례차도 변변한 것이 없다고 하죠.

김: 화물차로 실어가는 사람도 있고 좀 힘이 있는 집안은 중형차로 모시고 장지로 가요 그러면 미리 사람들이 묏자리를 봐서 땅을 파는데 여기는 굴착기로 쉽게 파지만 북한은 15여 명씩 가서 땅을 깊이 한 2 미터 정도로 파는 겁니다. 그리고 장지에 시신이 오면 관을 내리고 거기에 천을 덮고 흙뿌리고 묻죠.

김시연 씨도 북한에서 남편을 여의고 와 장례치르는 일을 일찍 겪었기 때문에 인생의 중대사 중의 하나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김: 저도 남편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나 미리 다 겪었어요. 그렇게 하는 방식이 있고... 그래도 나무 관을 짜서 했는데 있는 사람들은 좋은 나무로 목수들이 잘 가공해서 만드는데 힘없는 사람들은 널빤지 잘라서 대충 했어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니까 엉망이 되어 버렸죠.

김시연 씨가 북한에서 살 때만 해도 모두가 묘지를 쓰다 보니 문제가 생기자 당국이 이런 문제를 주민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개선을 해야 되는데 우선 명령부터 내리고 강제로 시행을 했다고 전합니다.

김: 저희가 있었을 때는 화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 땅에다 묻었는데 봉분이 생기고 비석을 세워놓으니까 저희가 살던 도시에는 야산이 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 산이 모두 봉분으로 뒤덮이니까 그것이 도시미화에 장애를 준다, 보기 싫다고 해서 비석을 다 눕히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북한에서 남편 비석을 탈북하기 전에 겨우 이름만 보이게 묻어놓고 왔는데 앞으로 20년 지나 갈 수 있을지 30넌 지날지 모르겠지만 북한에 가게 된다면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비석 도 계층별로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서민들의 나무 비석은 땔감으로 뽑혀 갑니다.

김: 비석은 대체로 돌로 해요. 돈 있는 사람들은 대리석으로 하기도 하지만 나무로 세워 놓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나무로 세워놓으면 땔감이 없어 그것을 다 뽑아다 땔 감으로 쓰니까 나무 비석 세우면 어차피 없어져요.

이번 처럼 홍수로 인해 산사태가 나면 통일이 되어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죠 화장은 탈북한 이후부터 하기 시작을 했고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화장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는 거죠.

김: 땔감이 없는 나라에서 시신을 화장 하려면 얼마나 많은 불을 때야 화장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기름가지고 화장을 한데요. 그런데 기름값이 비싸다 보니까 다 타지 않아 뼈도 그대로 있고 하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못한 그런 상태에서 묻는다고 해요

살아서도 차별이 심한 북한에서 죽음마저도 차별을 받게 되니, 특히 죽은 사람을 지금까지 산 것 처럼 꾸며 놓은 것을 보면 주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고 한다는데요,

김: 김일성 김정일을 금수산 기념 궁전에다 진공 상태에서 시신을 넣어서 부패하지 않게 약 처리를 다해서 넣어 놓으니까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처럼 누워 있는 것 같이 해 놓고... 그것이 원래 금수산 의사당 이었어요. 김일성이 집무를 보던 청사 였는데 개조 했어요 개조 하는데 수백만 달러가 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렇게 큰 돈을 들여서 정말 완전히 궁전이에요.

그 안에 들어가 보아도 그렇게 화려하고 눈이 부실 정도 라니 그저 입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김: 안에 들어가면 대리석 다 깔고 번쩍 번쩍하게 해 놓고 몇칸을 들어가야 시신이 있는데 김정일도 똑 같이 해 놓고요 이러면서 주민들은 제대로 묻힐 곳이 없고 비석 마저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정말 주민들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치가 떨리는 거죠.

간부들도 대부분 혁명열사라고 해서 그들 만이 묻히는 무덤이 따로 있죠.

김: 간부들도 죽으면 혁명열사 능에다 안장을 하거든요 거기는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신을 그대로 묻고 대리석으로 비석세우고 본인들의 얼굴을 돌에다 형상화 해서 정말 고급스럽게 해서 능에다 안치했어요, 국가에서 특혜로 다 해주는거죠.

한평생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일군 국가에 주민들이 국가의 주인인데도 누울 곳 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궁전에 누워 있는 대를 이은 지도자들, 또 넓은 능에 누워있는 간부들을 생각하면 주민들의 마음은 과연 어떨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헤아려 볼 수나 있을까요?

음악: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