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탈북자 이순복 씨 캐나다서 유학 간 딸과 상봉

0:00 / 0:00
퀘벡 에서 모녀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RFA PHOTO
퀘벡 에서 모녀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RFA PHOTO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6년 전에 중국을 거쳐 딸과 함께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자 가명의 이순복 씨가 캐나다로 유학 간 딸 윤미영 씨를 만나러 캐나다로 날라 갔습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외국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하겠다는 딸을 먼 이국땅으로 보낸 이 순복 씨는 딸을 만나는 순간 너무 대견해서 가슴이 벅차 올랐다고 말합니다.

이순복: 1년 7개월 만입니다. 꿈같고...용해요, 어쨌든 캐나다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정말 용케 버텨내고 있어요.

여성시대, 오늘은 어렵고 힘든 가운데도 딸을 유학 보낸 60대 중반의 탈북 어머니 이순복 씨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외국여행이 처음인 이순복 씨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 토론토가 가까워 오자 드넓은 땅에 숲이 가득하고 공항 가까이서 내려다 본 도시가 너무 반듯하고 아름다웠다고 감탄합니다.

이: 처음 느끼는 것이 야! 땅이 대단히 넓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맞추어 있고 규격화 된 것을 보고 참 토지 정리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로도 그렇고 다 정방형으로 그렇게 측량을 해서 도로를 만들었는지...

딸 셋 중 막내딸만 데리고 북한을 탈출한 이순복 씨는 단 둘이 살던 딸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 헤어져 살게 되었지만 딸의 앞날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는데요,

이: 한국에 와서 보니까 영어를 알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 같아요. 회사에 취직을 하려해도 영어를 잘해야 되고 그래서 일단은 영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담하게 결심하고 보낸 거죠.

딸 미영 씨와 함께 이곳저곳 다니고 여행을 해보니 딸의 영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며 일상생활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어 그동안 일 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딸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은 자부심도 크다고 즐거워합니다.

이: 가는 곳 마다 다 영어로 은행에 가도 영어로 다 통하고 퀘벡에 가서 호텔 직원과 말 할 때도 다 영어로 해요. 그쪽 퀘벡은 프랑스 어를 쓴다고 하는데 그래도 호텔 직원은 영어로 하니까 이렇게 영어로 다 대화하는 것을 보니까 장하고 기특해요.

퀘벡은 캐나다 동부에 있는 주 로 프랑스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요, 그래서 프랑스 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넓은 주, 두 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곳입니다. 퀘벡은 캐나다 연방 내에서 독자적인 하나의 프랑스 계 민족을 이룬 주 인데다 풍광도 독특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기도 하죠. 이순복 씨는 딸과의 오붓한 캐나다 퀘백 주 여행은 일생에 잊지 못할 것 이라며 젊은 시절 책에서 보았던 꿈과 환상을 실제로 본 것 이라며 자랑 합니다.

이: 어렸을 때 책을 좋아해서 세계문학 같은 것을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꿈속에서 항상 동화처럼 보던 것 환상으로만 보던 것을 이번에 퀘벡을 갔다 오면서 실제, 실물로 보았어요.

하지만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볼 때 마다 북한 땅이, 또 고향의 모습이 겹쳐진다며 북한에만 갇혀 살 때는 이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여기저기 다녀 보니 북한의 개혁 개방이 절실 하다고 말합니다.

이순복: 퀘벡은 35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인데 이렇게 멋있게 꾸려놓고 오랫동안 보전하고 있는데 북한하고 대조해 보고 너무도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하고 있을 때 북한에서는 무엇을 했나 온전한 고속도로 하나 없지, 건물도 없지 사람들이 아직도 기아에서 헤매고 있으니까 이건 뭐 봉건 시대도 이런 시대가 어디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항상 고속도로를 달릴 때 마다 이렇게 잘해 놓고 사는데 우리는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렇게 붙잡고 개혁 개방도 안하고 저렇게 인민들을 못살게 구는지 ...여기는 모든 게 풍요롭고 사람들도 여유롭고 얼굴 보면 다 활짝 펴있고 근심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외국에 나오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하는데요, 이순복 씨 역시 육류와 야채 과일이 풍성했지만 음식 문화에 익숙하지 못해 힘들었다고 하네요.

이: 고기를 그저 통째를 썰어서 주는데 못 먹겠어요. 그래서 조금 떼어서 먹었는데 고기를 절여서 발표 시킨 것이라는데 고기를 많이 먹어보지 못 해서요 먹지 못하겠더라고요. 북한에서 말하는 산해진미를 다 차린 뷔페 음식인데 우리 입에 맞지 않으니까 그저 과일이나 먹고 빵도 여러 가지 빵이 많아도 한 가지 먹는 정도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요.

딸 미영 씨는 집에서 주로 한식을 먹는다며 이곳에도 한국식 음식 재료를 많이 파는 마트, 시장이 있어서 이것저것 딸이 좋아하는 반찬도 직접 만들어주어 미영 씨도 정말 오랜만에 엄마의 손길이 담긴 음식을 먹고 행복해 한다고 얘기하네요.

이: 마트에 가서 쌀사고 해서 한식으로 먹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을 한식으로 살아야지 아무래도 서양식을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딸은 메밀국수 같은 것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아서 잘 먹어요. 김치도 담가주고 물김치도 해주고 양파도 볶아주고 그런 것을 해먹고 있어요.

든든하고 대견한 딸을 바라 볼 때 마다 딸에 대한 기대와 꿈이 큽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앞으로 미영 씨가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데요,

이: 사람마다 다 자기 취미가 있고 재간도 있는데 우리 딸은 특별히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보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글 쓰는 일이나... 어렸을 때 화술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공연 무대에도 오르고 했는데 우리 딸이 글 쓰는 것을 종종 보거든요 그래서 내가 너는 암만해도 방송원 계통이나 통역 같은 것을 하면 좋겠다고 얘기하죠.

아마 한국에 오지 않고 북한에 그대로 있어 교육을 잘 받았으면 언론이나 방송 쪽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북한에서는 우리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 꿈도 못 꾸어요. 아무리 재간이 있어도 못해요. 여기는 자기가 실력이 있으면 다 할 수 있어도 북한에서는 생각도 못해요. 여기 와 보니까 의회에도 장애가진 분들도 다 일하시는 것을 보고 또 한국에서도 국회의원들 보게 되면 휠체어 타고 있는 장애인들도 다 자기일 하는 것을 보면 능력이 있으면 다 써주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와 딸은 북한 땅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열려있는 곳을 찾았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미영 씨는 캐나다 유학이라는 도전장도 낸 겁니다.

미영: 아직은 그냥 어학연수로 어학원에 다니고요, 다음해에 대학에 갈 계획을 하고 있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여기서 좀 더 공부를 해서 언론, 저널리즘 쪽으로 계속 하는 것이 목표인데 틈틈이 일도 하면서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이제는 세계가 지구촌 같아서 어느 나라든 자신의 능력과 기회가 있으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또 특권층이 아닌 보통 시민들도 어떤 일 이든 다 도전할 수 있고 그 도전을 위해 어머니 이순복 씨도 힘자라는 만큼 딸의 유학 생활을 도울 것 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년 말 까지 언어 학교, 영어를 배우는 학교를 다니니까 제 생각으로는 언제까지 할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만큼 뒷바라지를 해 주려고 합니다.

미영 씨가 틈틈이 아르바이트, 시간제 일을 하니까 생활에 많은 보탬이 되지만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는 상황이죠. 어머니의 경제력으로도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래도 기꺼이 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십니다. 지금 60대 후반이신 어머니는 전화상으로는 아주 건강하시고 음성으로 듣는 연세를 잘 모르겠는데요, 건강이 썩 좋지가 못해 걱정하시네요.

이: 제가 중풍은 만난 지 한 7년 되었어요. 그래서 오른쪽 거동이 좀 불편해요 그래서 장애 5급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언어나 기억은 장애가 안 되어 정말 다행이죠. 지금도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정확하게 대답하고 눈도 아직 밝아서 책이랑 신문을 많이 보고 있어요.

미영 씨도 이런 어머니가 든든하고 말할 수 없이 고맙다며 건강이 완전하시지 못한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곁에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합니다.

미영: 목소리가 쨍쨍 하세요. 저는 엄마가 더 약해지시지 않고 지금상태로 그냥 쭉 계셔 주셨으면 걱정이 없어요. 중풍이 원래 재발하거든요, 그것 때문에 걱정스럽지만 병원 가셔서 매일 건강 검진하시고 또 가정의사가 집에 방문해서 마음이 놓이긴 하죠.

이제 만난 딸과 머지않아 헤어지게 될 섭섭함도 미리 챙겨둡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하시네요.

이: 와서 직접 보니까 딸이 어렵게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속속들이 다 보았으니까 한국에 가서는 막 눈에 삼삼할 것 같아요.

이렇게 딸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자신이 세운 목표를 더 빨리 이룰 수 있다는 미영 씨는 언젠가 다시 어머니와 함께 하는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영: 어머니가 저보다도 긍정적이어서 제가 힘을 많이 얻어요.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