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탈북자 윤미현 씨가 말하는 지방 예술단체 ‘선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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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미국에서 난민지위를 얻어 정착한 탈북자는 지난 9월 말 현재 146명인데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처럼 여성의 비율이 높습니다. 여성 탈북자들 중에는 북한에서 유명한 평양 예술단이나 만수대 예술단 등에서 활동을 했던 여성들은 얼마 안 되지만 각 지방 예술단체인 선전대에서 활동을 했던 여성들은 꽤 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50대 중반, 가명의 윤미현 씨는 중국 국경지역과 가까운 지역의 한 선전대에서 활동할 당시 고향 주변에서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만큼 인기를 누렸는데요,

cut: 맞아요, 인기가 대단했었어요. 그때 당시 제 이름을 불러서 저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했어요.

여성시대, 오늘은 북한에서는 왜 도시는 물론 각 지방 마을별로 선전대활동을 내세우는지 또 선전대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선발 하는지 알아봅니다.

지난 80년대 북한의 한 광산촌 마을의 선전대에서 활동했던 윤미현 씨는 선전대는 북한의 정치적 명절을 비롯한 민속 명절 때마다 공연을 하고 또 공장이나 농촌에서 인민들이 빠른 시간 내 더 많은 할당량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선전대원들이 작업장의 분위기를 띄워주며 농민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이라고 하는데요,

윤: 명절 때마다 1월1일, 2월16일, 4월15일, 당 창건 기념일 또 김정숙 12월24일 공연 또 돌아오면 새해, 이렇게 1년 내내 특별공연 때문에 훈련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에는 공장이 돌아가는데 차 수리하는데 그 부속을 빨리 추진해서 빨리 살려서 많이 생산해야 된다는 이런 것 때문에 밤낮 상관없이 현장에 나가서 노래 불러주고 노동자들과 같이 부속품을 나르고 그렇게 했어요.

북한의 각 선전대에서 활동하다 탈북 한 20대, 30대의 한국에 정착한 여성들도 남한의 한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에서 선전대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cut: 농촌 지원 때 선전대가 가서 하는 역할은 일하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왜 집을 떠나서 이렇게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는지 우리가 이 농촌에서 열심히 해서 이 식량이 어떻게 우리한데 차례지는지 이런 것에 대해 납득을 시키는 거예요.

북한의 보통 고속도로보다 엄청나게 넓은 개성 고속도로 건설을 예를 들면서,

탈북자 1:전쟁 때는 비행기 활주로로 쓴다고 했어요. 탈북자 2: 모든 것은 인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전쟁에 대비하구요. 항상 나오는 얘기가 속도전이 많이 나와요 산, 들에 온 건물에 보면 속도전, 전격전 섬멸전 구호를 산마다 부쳐 놓거든요.

선전대 출신 한 가수는 모내기 지원활동에서 현장에서의 공연을 그대로 소개했는데요,

Sound: 모내기 농촌 지원 전투에 참가한 학생 여러분들께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예술단체의 성악공연을 시작 하겠습니다. 노래

윤 씨도 북한에서 젊은 시절에는 이렇게 선전대 활동을 한 거죠. 그런데 이 선전대는 누구나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요, 윤미현 씨는 어떻게 선전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린 시절로 돌아 가보죠.

윤: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이 전혀 아니에요. 저는 4살 때부터 탁아소 가니까 탁아소의 선생들이 벌써 탁아소에서도 노래를 하니까 생김새로 노래를 할 것 같고 그래서 한명 한명씩 시키는 것도 있어요. 한명씩 시킬 때 마다 목소리도 그렇고 유창하게 잘하는 어린이 들이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이아이가 잘하겠구나 싶으면 계속 집중해서 시키고 또 명절 때 마다 시키곤 했는데 제가 맨 처음에 한 것은 무용이었어요. 제가 독무를 했는데 그러면서 좀 잘하니까 무용을 계속 했어요. 그러면서 정말 무용을 잘 하는 사람이어야 2인무도 하고 솔로, 독무도 하는데 저는 주로 주인공 역을 했었어요.

그러다 인민학교 때부터는 달리기, 핸드볼 등 체육과 무용을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재능 있는 학생들은 졸업할 때 까지 기량을 키워주고 재능을 발전 시켜 줍니다. 그러다 졸업이 가까워지면 전문 예술단체에서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각 학교를 방문합니다.

윤: 학교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왔던 사람들을 무용이면 무용 체육이면 체육 이렇게 학교에 와서 뽑아가요. 저도 이렇게 당선 되어서 가죠. 특별하게 잘하는 사람들은 중앙에서 와서 중앙에서 뽑아서 데려가요. 아니면 도 예술단 도 선전대에서도 와서 뽑아가고, 우리는 광산촌 선전대에서 일을 배치 받으면서 그곳에서 뽑아가더라고요.

당시 윤미현 씨는 무용에 체육 또 노래까지 잘해 광산 선전대에는 일찌감치 뽑혔지만 도 예술단에서도 뽑아가려고 접촉을 했다는 군요. 그러나 광산 선전대에서는 윤 씨의 활동이 두드러져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손을 쓰기도 했습니다.

cut; 우리 광산 선전대에 다닐 때 제가 없으면 중창을 하게 되면 고음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어요. 혼성 2중창 까지도 제가하고 광산 당위원회 선전부에서 저를 특별히 화술은 시키지 말고 독창까지 할 수 있도록 준비 시키라는 우리 성악지도원 한테 지시를 했다고 할까... 그래서 제가 독창까지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어요. 그랬는데 도 예술단에서 배우들이 여자들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시집을 가니까 배우를 보충해야 하는데 없으면 광산에 와서 우리 선전대 중에서 키도 크고 얼굴도 무대 형에, 잘하는 사람보다는 소리가 특출 나게 좋은 사람으로 뽑아가요. 그런데 제가 당선이 되었어요. 제가 빠지면 우리 선전대 구성에서 부족해지니까 우리 광산 선전대에서는 안 보냈어요.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윤: 중앙당 인민군 협주 단에서 배우를 모집하러 내려왔는데 여자 분은 협주단복을 입고 남자 분은 사복을 하고 왔어요. 그분들이 성악을 시켜보더니 소리가 좋고 잘한다고 그래서 저를 뽑아 사진 찍고 문건까지 다해서 올려 보냈어요. 그랬더니 인민군 협주 단에서 확인이 내려 온 것이 너무 좋다고, 올려 보내라고 그래서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반대를 하셨다는 군요.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과 헤어져 사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반대 이유는 인민군대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윤: 헤어져 사는 것은 괜찮아요. 평양에 가서 잘하면 부모들이 또 평양에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인민군대라고 붙은 것 때문에 반대를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항상 전쟁 전쟁하잖아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예술단체는 항상 부대 앞에서 먼저 나가요. 그 부대에게 준비 선동하고 훈련 선동하고 전쟁준비 할 때선전하면서 노래 부르고 예술단이 먼저 앞서서 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전쟁터에 보내게 되면 죽을 수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걱정이 되셔서 안 된다며 못 보낸 겁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선전대 활동을 시작한 윤미현 씨는 처음에 시작할 때 낮에는 일하고 저녁 다섯 시에 퇴근을 하고 난 이후에 밤 11시 12시 까지 맹연습하고 훈련을 받았다는데요,

윤: 명절이 많잖아요. 새해 설날 공연 준비할 때는 몇 달 전부터 하니까 저녁마다 가서 훈련을 했어요. 그러다가 전문적으로 특별하게 잘 하는 사람 전망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에다 당적으로 통보해서 일을 안 하고 낮이고 밤이고 훈련하고 연습하고,

그 당시에는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북한의 상황도 괜찮아서 아주 즐겁게 선전대 활동을 했습니다.

윤: 김일성이 그때 새로 나온 방송차를 보내주었어요. 그 방송 차타고 다니면서 각 직장 마다 방송차 안에서 노래 부르고 방송차 위로 올라가면 노래 할 수 있게 무대처럼 되어있어요. 거기서 또 선전 선동하고 농장에서 봄철이면 밭갈이 하고 씨 뿌리고 하잖아요? 그때 농장에 나가서 농장마다 다니면서 방송 하고 노래하고 방송원은 해설하고 젊었을 때 한때는 정말 신바람 나게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 노동자 농민들을 격려하고 지구상에 오로지 북한만 존재하는 것 처럼 국가와 당을 위해 충성을 한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기 까지 했습니다.

윤: 그때 당시는 처녀 때니까 한참 웃고 떠들 때잖아요, 우리가 받아온 사상은 오직 당과 수령을 찬양하는 거기에서 우리가 충성 한다 이런 것 때문에 보람을 느꼈어요. 그때는 외부 세상을 전혀 모르죠. 북한 땅 외에 어느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미국 그 정도 밖에 몰랐어요. 미국도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단지 원수라는 것 밖에 몰랐기 때문에 외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가 없었어요.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선전대 활동으로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윤미현 씨도 90년대 말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윤미현 씨의 북한에서의 선전대 활동에 대해 전해 드렸는데요, 다음시간에는 윤 씨의 탈북 그리고 미국생활에 대해 알아봅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