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대학생들이 이제는 외국으로 나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수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로 유학을 오기도 하고 미국 정부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취업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탈북대학생들도 있습니다. 해마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이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일정한 기간 내 미국 현지에서 영어를 배우며 직장의 인턴, 그러니까 실습생으로서의 경험도 하고 있는데요,
cut: 미국직장과 한국직장 환경이 다른 것 같아요 미국은 사람의 능력을 중시하는 것 같고 한국은 체계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 같아 미국이 훨씬 편해요. 또 개인적으로 영어 언어가 제 삶의 주변에 있어 영어는 배우기가 굉장히 쉬운 것 같아요
여성시대 오늘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탈북여대생, 가명의 이은서 씨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이번에 미국 정부에서 실시한 취업연수 프로그램에 120명의 한국 대학생들 중 5명의 탈북대학생들이 참여 했습니다. 이 중의 이은서 양의 얘기였는데요 한눈에 봐도 멋쟁이 한국의 여대생입니다. 북한에서 1차 고난의 행군 때인 어린 시절에 북한을 탈출했는데요,
cut: 저 13살 때 북한에서 중국으로 갔었어요. 엄마하고 동생 세 가족이 중국으로 13살 때 니까 거의 10년 전이네요.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될 때 1998년도 겨울에 두만강이 꽁꽁 얼었을 때 엄마하고 같이 중국으로 갔었죠. 거기에는 좀 사연이 있는데
은서 씨의 당시 사연은 이렇습니다.
cut: 엄마가 중국에 다니시는 분을 아시고 있었어요. 그 분이 방학 때 얘를, 은주를 한 달 정도만 중국에서 구경시키고 북한으로 다시 보내도 된다고 해서 엄마 친구 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갔는데 시골집 이었어요 원: 그때는 엄마 아는 분을 따라갔기 때문에 국경 넘을 때 검열을 했거나 그러지 않았죠?
-- 검열이 있다고 해도 안전하죠. 그분이 잘 알아서 저를 보호해 주시니까
그래서 중국의 어머니 친구 분 댁에 한 달 동안 있으면서 그 집 자녀가 배웠던 학교 교재와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는군요.
cut: 혼자 심심하니까 중국 조선족 학교에서 배웠던 교재니까 교과서 한국말로 되어있어서 제가 책을 좋아해서 책을 다 보았어요. 북한에는 동화책도 많이 없잖아요, 동화책이 없으니까 김일성 김정일 어린 시절 이야기 책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그랬는데 거기서는 동화책도 많고 신선한 얘기책이 많아 거기 빠져서 한 달 정도 보냈어요.
그 책을 보고 이은서 씨는 당시 어린 시절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으로 돌아가서 일을 냈습니다.
cut: 당시 신선한 충격이라고 몰랐는데 지금생각하면 많이 신선했어요.
그리고 북한으로 돌아가서 일을 냈습니다.
cut: 다시 북한으로 갔죠 그런데 제가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엄마보고 중국에 가자고 북한보다는 훨씬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랬어요.
원: 나이는 어렸지만 가서 직접 체험하고 왔잖아요.
---네. 체험한 것이 뭔가 있었나 봐요 어린 저에게, 그래서 엄마에게 중국에서는 우리가 꿈을 가질 수 있는 나라인 것 같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놀라시더라고요 얘가 이렇게 변해서 왔구나하고
은서 씨는 어머니가 친구에게 딸려 중국으로 보낸 것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머니의 은밀한 계획이었다고 하는데요,
cut: 계획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결심을 확실히 하신 거죠. 왜냐하면 아빠가 돌아가시고 3년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엄마가 아버지 3년 제사상까지 차려드리고 장사를 하던 엄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분 이셨거든요 그래서 장사를 하던 무엇을 해보자 이렇게 계획을 하고 계셨는데 북한도 여자 혼자 살기에는 힘드니까 무언지 바꾸어 보아야겠다고 그러다가 결정을 그때 내렸죠. 중국에 가보자
은서 씨는 어머니가 딸이 한 달 동안 중국에서 했던 경험들 또 그에 대한 반응을 보고 중국으로 가야했다고 결정하신 것 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가족 상황은 어땠는지
cut: 당시 동생은 몇 살이었나요? 아빠가 돌아가실 때 동생이 6살이었고 그때는 9살 이었어요
어느 정도 강을 건너 탈출을 해도 따라올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나이였네요
--그렇죠, 작은 손 이끌고 엄마가 중국에 친척이 없어 한여름 동안 같이 다녔던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원: 그런데 엄마와 동생하고 강을 건널 때 검열하고 군인들이 국경을 지키잖아요.
--네, 그때는 지금보다 많이 쉬웠어요. 어떤 사람들은 강을 그냥 막 뛰어서 넘기도 하고 그런데 저희는 안전하게 해야 되니까 엄마가 군인들에게 돈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안전하게 중국으로 건너와서 정착하기 보다는 처음에는 많이 떠돌아 다녔죠.
한 가족이 그것도 언제 공안에 신분이 드러날지도 모르는 중국의 낯선 땅을 떠돌아다닌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세히 몰랐던 은서 씨는 당시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cut: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자유로워서 그런지 정말 즐겁게 여행하는 것처럼 다녔어요. 돈 한 푼 없이 교회 머무르다 기차타고 버스타고 기차타고
원: 그러면 그때 중국에 있는 아는 아주머니 외에 친척은 하나도 없었구요.
---네, 친척이 없어 일단 목표가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거였어요. 안쪽으로 흑룡강성 쪽으로 연변을 벗어나는 것이 목표여서 교회마다 들러서 우리 이렇다는 사정 얘기를 하고
원: 그러면 교회에서 많은 도움도 받고 당시에도 중국공안이 탈북자를 잡아들이고 하는 일이 지금보다 덜했나요?
--- 네 그때는 시작 초였으니까 연변 쪽에서 많이 심했고 변방을 빼고 안쪽으로 흑룡강성 쪽으로 들어가면서 쉬웠죠. 그래도 5:38 우리가 여행객처럼 보였을 거예요. 우리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한 가족이니까 의심을 별로 안 받았어요 정착을 한곳에 흑룡강성 조선족 동리로 되어있는 곳으로 가서 말이 통하는 곳에서...
은서 씨 어머니는 원래 북한에서 농사를 지으셨던 경험이 있고 중국에서 탈북자들이 그나마 또 안전한 곳이 시골이었으니까
cut: 아담한 동네에서 방하나 얻어가지고 농사짓는 것을 도와드리며 겨울을 나고 어차피 중국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시골에서 이렇게 두 자녀가 배곯지 않고 세끼 먹여 살릴 수 있는 그 자체에 안도 하면서 감사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데요,
cut: 엄마가 늘 마음에 가지고 계신 것이 애들은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저희가 중국에서 정착한 곳이 공부를 할 수 있던 곳 이었어요. 그래서 조선족 학교를 거기서 마치고
원: 그러면 그때 조선족 학교에서는 중국어로 공부를 했나요 한국어로 했는지요?
--- 조선족 학교라 일반 수업은 다 조선 한국어로 하고 중국어를 공부하는 수업시간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중국어 수업시간에만 중국어를 하는데 조선족 학생들도 중국어를 잘 못해요. 그래서 제일 초보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배웠었죠.
원: 중국어를 몇 년 동안 배운 거예요?
---중 고등학교까지 해서 거의 5년쯤 배웠어요.
원: 어린 시절에 중국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 많이 쉽죠. 지금배우는 것보다 지금 영어 배우려니까 잘 안되고 지금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예요? 자유롭게 대화가 다되나요?
---네 일상 회화는 무난하고요 언어는 일상 계속 쓰고 배워야 하니까 많이 노력하죠. 계속해서 공부를 하려고요.
중국에서 학교도 다니며 거의 정착 했는데 어떻게 한국에 올 생각을 했나요?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봅니다.
cut: 저희 가족이 1998년도에 왔는데 그 때 조선족분이 우리를 한국에 데려다 주겠다는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친척들이 다 북한에 계시고 하니까 한국에오면 큰일 나는 줄 아셨어요. 그래서 절대로 안 된다고 거부하고 그러다가 저희가 2000년경 엄마와 동생이 잡혀간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중국으로 오고 나서 안 되겠다 싶어 중국에서는 어차피 그 나라 국민이 아니잖아요. 늘 불안정한 상태에서 체류해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나 앞으로 해야 할 공부를 생각했을 때 그냥 먹고 사는 데는 괜찮지만 앞이 너무 안보여서 엄마가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그리고 그때부터 많은 분들이 한국으로 가기 시작 했어요. 그래서 브로커 즉 중개인을 통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어머니와 동생이 함께 북한으로 잡혀갔을 때는 온 가족이 정말했습니다. 엄마와 동생은 북송되었다가 어떻게 중국으로 다시 왔는지 그동안 은서 씨는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 잠시 들어보죠.
cut: 1년 정도 계시다 오셨는데 그 때 많이 힘드셨던 것 같아요.
원: 그러면 은서 씨는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운이 좋았던 것이 제가 다니던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양딸로 삼아서 돌보아주시고 중국 호구도 사주시고 다시 잡혀갈까 보아서그래 거기서 한족학교를 다녔어요. 저는 다행이 잘 있었는데 엄마와 동생이 고생을 많이 해서 그 덕분에 한국에 갈 결정을 내리신거고
당시 중국의 탈북자들이 중국의 남방을 통해서 한국으로 오기 힘들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은주 씨네 가족역시 고통이 많았습니다.
cut: 고통을 정말 많이 겪었던 때가 그때 였다는데요, 저희 3가족 다 브로커를 통해서 북경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을 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중국어를 하고 호구를 가지고 있으니까 브로커가 연변지역에서 다른 탈북자들을 북경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통역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저희는 그때 제가 이일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거의 못하고 왜냐하면 그분들이 계시니까 엄마와 동생은 북경에 있는 어느 집에 있고, 저만 그분들을 따라서 통역으로 나갔어요. 장춘까지 그런데... 장춘에서 브로커들이 공안에 쫓기던 상황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잡히고 그 분들은 간신히 도망치고 그래서 저는 북한에 나가고 엄마와 동생은 제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엄마가 크게 마음을 먹고 아무래도 중국에 남아서 저를 구해내는 것 보다는 한국에 가서 저를 구하는 방법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셔서 동생하고 한국에 먼저 가셨어요. 그 브로커를 통해서 그리고 저는 북한으로 나가고 그래서 엄마가 그 1년 동안 심리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셔서 지금도 그때 일로 많이 정신적으로 시달리세요.
흔히 중국의 탈북자들이 동남아를 거쳐 오는 길을 은서 씨는 동남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다.
cut: 저는 그냥 중국에서 바로 한국인 여권을 사가지고 원: 돈이 많이 들었을텐데요,
---네 경제적으로 엄마가 많이 일을 하셔서 돈을 모아서 저를 데려오셨는데 그때 얼마만큼 힘드셨느냐 하면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겨울에 난방을 전혀 못 틀고 핸드폰, 손전화도 안 쓰셨고 동생도 많이 고생했어요. 다른 또래 애들은 간식도 잘 사먹고 그때는 애들이 막 핸드폰을 쓸 때인데 헨드 폰도 쓰고 싶고 했을 텐데 전혀 못 쓰다가 제가 하나원에서 나오고 나서 핸드폰도 개통했어요.
엄마는 딸을 고생시키지 않고 최대한도로 빠르고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은서 씨의 얘기를 통해 느낄 수 있어요. 은서 씨는 중국에서 강제 북송 당한 뒤 한국으로 먼저 가신 엄마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으로 한국으로 올 수 있었는데요,
cut: 세 식구가 한국에서 만났군요.
--- 네, 5년 전에
감격이 어땠어요?
---너무 서로가 힘들던 시간이어서 만났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동안 엄마는 한국의 옷이 예쁘고 저는 여자애니까 한국의 옷을 잔뜩 사놓으신 거예요. 옷이랑 귀걸이 목걸이 등은 준비해 놓으셔서 한국으로 나오면 다 쓰게 하려고 그리고 하나원에 있을 때는 물품이 반입 안 되거든요 그런데도 엄마가 찾아오셔서 이것 우리 딸 꼭 입히고 신겨달라고 ...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한 은서 씨네 가족 몰론 은서 씨가 중국에서 북한 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한국에 왔더니 중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거죠.
cut: 중국에서도 자유롭기는 했는데 그 자유로운 것과는 다르죠. 먹는데서 일단 자유롭지만 먹고 쓰고 하는데서는 자유롭지만 북한보다는 그런데 꿈을 가질 수가 없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제가 만약 중국에서 그냥 살았다면 대학을 못 갔을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아주 국한 되었을 거고 겨우 다른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찾는 거에 먹고살기 위해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는 거였는데 한국에 오니까 의식주 해결이 지금도 중요하긴 하죠. 그런데 중요한건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뭐를 해야 즐겁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 그리고 나중에 통일이 되어서 내가 무엇을 해서 어떻게 도울 것인지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정말 큰 차이인 것 같아요
탈북 여대생 이은서 씨의 얘기는 다음 여성시대에서 계속합니다.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