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지난번에 이 시간을 통해 미국에 정착한 50대 중반의 탈북여성 가명, 윤미현 씨가 80년대 북한의 지방 한 선전대에 선발되어 예술단으로서의 활동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이 시간에는 북한의 국가 명절 때 마다 또 농촌, 광산, 기업 장 등지에서 충성스럽게 열심히 공연 했던 이 여성은 왜 북한을 탈출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외부 세계에서의 바라보는 지도자 김정은 시대 북한의 변화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죠.
cut: 합창대가 쫙 섰는데 합창 중 독장은 혼자 합창대 앞에 나와서 하잖아요, 무대에 오르면 인상이 제일 온화하다는 관중들의 평가를 들었어요.
지금은, 당시 한창 예술단원으로 활동할 때 보다 나이도 들었고 탈출, 북송과정에서 고생도 많아 목소리도 많이 망가지고 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고장에서 유명했던 예술단원 이었기에 노래 한곡 부탁 드렸는데요.
윤: 고향의 봄
반주도 없이 역시 저력이 남아 있어요. 청춘 시절 김일성 김정일과 당을 위해서 선전대 예술단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이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는군요.
cut: 지금 한국에 온 탈북자들 봐요. 군관 하던 사람도 중앙당에 있던 사람도, 물론 사상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온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예술단체에 있다가 온 사람도 많아요. 평양예술단 에서 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왜 뛰쳐나왔겠어요. 평양 특별시 안의 사람들만 배급을 주고 하니까 평양 주변 사람들도 배급을 안 주는데 우리 지방에서 아무리 특별하게 했더라도 배급 대상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죠.
배급이 완전히 끊겨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오죽하면 딸 둘만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 했겠느냐고 윤 씨는 말합니다. 중국에서 10여 년 간 숨어 살면서 그 당시 많은 탈북자들이 당한 강제 북송도 여러 번 당했는데요, 그때 마다 구류를 살고 나오면 갈 곳이 없어 친척 아저씨 집에 얹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저씨는 윤 씨의 선전대 활동 공연을 잊지 못해 늘 아쉬워했다고 말합니다.
윤: 제가 4번 북송 당했는데 그때마다 풀려나 아저씨 집에 가면 아저씨가 제가 공연 했을 때 받은 인상을 잊지 못해 저보고 그때 노래하던 것 해보라고 그때 들었던 노래가 너무도 마음에 남아 있다고 그래서 가게 되면 저에게 노래를 시키시고 그랬어요.
식량난으로 인한 고통과 탈북, 중국에서의 도망자 생활, 그 중에서도 지금도 몸서리 쳐지게 잊지 못하는 것은 북송 때 보위부에 넘겨져 그야 말로 짐승 취급을 받았던 일 이라고 말합니다.
cut: 너희들은 이제부터 개다. 그러니 머리를 숙이고 땅만 보고 움직이라고 명령합니다. 앞 뒤 사람과 수세를 연결해 놓고 조금만 말하면 총 박죽으로 때립니다.
윤미현 씨는 식량난과 탈북으로 남편과 막내아들을 잃은 아픔이 지금도 깊이 남았지만 이제 미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중국에서 이들을 구출한 한 선교사가 전해준 신앙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미국에 와서 한동안 북한에서의 가수 생활을 경험으로 성가대 활동도 했습니다.
윤: 제가 알라스카에서 살 때는 성가대를 했었어요. 그런데 북한에서 할 때 하고 여기서 하는 것이 좀 달라요. 그래서 처음에는 따라가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워낙 제가 노래를 했었고 센스가 있어 빨리 적응을 해서 그때도 솔로를 했었어요.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다른 일이 많아져 행사도 있고 또 교회에 다니며 간증하는 일이 많아 지금은 못하고 있어요.
이제는 미국에서 열리는 북한인권 대회, 의회에서의 북한인권, 정치범 수용소 관련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교회에서 간증도 합니다. 이와 함께 탈북자 돕기, 탈북자 수양회 등에도 참여하면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대북인권단체와 탈북자 모임을 통해 북한이 어떻게 변하는지 의견을 서로 나누고 있는데요, 윤 씨는 특히 신전 대 예술단원 출신으로서 김정은 제1비서가 조직했다는 모란봉 악단의 연주 또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갑작스러운 큰 변화로 놀랐다고 하는군요.
노래: 모란봉 악단
윤: 수정주의 날라리 풍 그런 외국물이 들어오는 데는 가차 없이 (수용소에) 집어넣고 사상투쟁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나라의 수령을 모시고 저런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고 그리고 전문 적인 외국 노래를 하더라고요.
Cut :연주
전에는 어느 종목에서든지 다 수령님, 당 이 들어가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낙후하다고 비판 받고 작품을 쓴 사람은 정치적으로 죄를 진 사람으로 잡아 갔어요
이와 함께 남한이나 외국 가수들 못지않은 드레스 차림에 또 다시 놀랐다고 하네요.
윤: 아니, 전부 짧은 드레스 긴 드레스 가슴 앞이 다 휑하게 나오고 이런 드레스를 입고 하는 것 야! 어쩌면 북한도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되나 ....
윤 씨는 중국에서 10여년 그리고 또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어느 국가 든 고유문화를 지키면서 외국의 문물도 받아 들이 것이 당연하고 발전을 위해 필요하지만 북한처럼 일반 백성들이 먹을 것조차 없는 형편에서 북한 지도자들은 무엇이 먼저 변해야 하는지 자각 못하고 오로지 집권층과 평양의 특수 층 만을 위한 잘못된 변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윤: 북한의 주체 사상으로만 오직 서야 된다, 외국의 물을 먹으면 절대로 안 된다며 그렇게 우리 백성들에게 가르쳤는데... 제가 최근에 한국에서 하는 북한 관련 방송을 들어보면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외국의 문화 사상이 들어가면 안 되는 것으로 전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기들은 외국의 요리를 먹고 외국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활하며 좋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나라는 인민들에게는 왜 적용이 안 되어서 인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문화를 얘기하고 외부의 말을 하면 잡아가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느냐 말입니다. 너무나도 앞뒤가 맞지 않는 수작 게임 이지 않아요?
부모 형제를 두고 북한을 탈출한 것은 앉아서 굶어 죽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평양 특권층 에서도 모두 알 것이라며 고향에 있는 인민들이 모두가 자유롭게 외국의 문화를 즐기면서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면 왜 고향을 등지겠는가고 반문합니다.
윤: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을 생각하게 되면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프고 그리워하고 가보고 싶은 간절함이... 우리 고향에 있는 사람들도 모든 외국 문화를 즐기고 부유하게 생활한다면 왜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윤 씨는 미국에서 하루에도 많은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책자나 광고지가 매일 매일 수북하게 배달되는데 하루는 강아지, 개에 관한 광고를 보면서 북한을 생각하니 너무 한심 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윤: 개들도 사람들과 같이 호화롭게 살면서 개가 잘 수 있는 멋있는 자부동, 방석도 깔고 자는 것 개집도 해주고 물도 별스럽게 내려오도록 해 언제든 마시게 해주고 먹이도 그릇에 담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그릇에 담겨져 있고, 짐승도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데 우리 북한 사람들은 왜 집도 없이 먹을 것이 없고 옷도 신발도 없이 같은 인간인데,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근심 걱정 없이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배고파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것을 더 좋은 것을 입에 맞는 것을 먹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북한의 그 조그만 나라 그 좁은 땅 덩어리에서 얼마가 안 되는 인구가 강하나 사이를 두고 또 철조망 사이를 두고 이렇게 차이가 나게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그는 이어 인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경제 개혁, 개방이 되어서 자유롭게 고향을 오 갈 수 있고 가족들을 만나는 것 등 인데 모든 주민들이 원하고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고 평양의 유원지 건설이나 날라리 황색풍조만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윤: 북한 사람들도 이제는 머리가 다 깨었어요. 이것은 아니다 라고 알고 있지만 단지 독재 때문에 말만 잘못해도 죽는다는 것 때문이지, 우리 여기 온 (미국에 정착한 ) 사람들도 지난여름에 북한에서 수해 났을 때 수해 난 그 현장에는 지도자라는 사람은 가보지도 않고 평양 건설하는데 애들 로라 스케이트장, 유희장 같은 곳만 간다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아 김정은 이 작자도 아니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어요.
여성시대, 미국에 정착한 탈북여성이 본 북한이 진정 변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 들어보았습니다.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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