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돌격대 소년, 경찰을 꿈꾸다

평양에서 추진되는 10만세대 아파트 건설현장.
평양에서 추진되는 10만세대 아파트 건설현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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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INS - 바람 소리 + 통화음 ( 안녕하세요. 저 이현주입니다. 1300동 앞인데 몇 호에요? )

김강혁, 27살. 청진 출신으로 돌격대 생활을 하다 남쪽에 먼저 정착한 가족의 도움으로 남한에 왔습니다. 정착 교육 시설인 하나원에서 나와 진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1년 1개월...

이 친구와 제가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이었습니다. 돌격대 생활을 했다는 이력이 특이해서 인터뷰 좀 하자고 청했다가 딱 잘라 거절당했습니다.

돈 한 푼 못 받으면서 몇 년을 일한 돌격대를 나온 이후 대가가 없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답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얘기하는데 차마 더는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고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잠시 신세지고 있다는 친구 집에서 강혁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INS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저야 그렇죠...

스물 입곱해 살았을 뿐인데 남한으로 나오기까지 인생의 굴곡이 너무 많아 어떻게 어디서부터 전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이 청년의 얘기를 오늘 <젊은 그대>에 담아봅니다.

진행자 : 친구집에 잠시 있는 것 같은데 요즘 뭐해요?

김강혁 : 자유터와 컴퓨터 학원 다니면서 공부했는데 한 달은 좀 쉬자고 하고 있어요.

진행자 : 자유터가 대안학교죠? 공부 쉽지 않지요?

김강혁 : 네, 그래요. 제 머리를 막 저주하고 있어요. 내 머리를 왜 이렇게 나쁘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가 막 쥐어 받고 그렇습니다. (웃음)

진행자 : 북쪽에서 학교 공부를 어디까지 했어요?

김강혁: 저 중학교(고등중학교) 6년을 다 졸업했는데요. 저 인민학교 때, 여기로 말하면 초등학교죠? 그때는 부모님이 계셨고 공부를 정말 잘 했어요. 그때는 머리가 좋았나 봐요. 시키지 않아도 공부에 대한 열의도 높고 했는데요.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오직 먹어야한다는데 집착하면서 abc를 공부하면 빵, 과자, 사탕이 들리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다 잃었어요.

진행자 : 중학교 시절에 공부를 하나도 못 했군요.

김강혁 : 그렇죠. 제가 청년 비서를 했는데 낙제를 했어요. 선생님들이 청년 비서까지 한 애를 낙제를 어떻게 시키느냐 해서 졸업은 했는데 사실 저는 그 수준이 아니죠. (웃음)

진행자 : 공부를 잘 하건 못하건 청년 비서를 했는데 졸업하고 돌격대를 갔어요?

김강혁 : 네, 다른 학교에서는 거의 군대를 가는데 우리 학원은 사실 고아원이었어요. 졸업하니까 당은 청년들을 부른다며 우리 학급 졸업생들을 거의 모두 돌격대로 배치했어요. 돌격대는 군대와는 또 달라요.

진행자 : 사실 남쪽에서는 돌격대를 잘 몰라요. 북쪽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조직이고 남쪽에서는 이해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근데 강혁 씨가 있었던 학교는 좀 특수한 학교였나봐요? 고아들을 모아놓은 학교인가요?

김강혁 : 네, 중등학원이라고 불러요. 어린 학생들을 위한 초등학원이 있고 중고등 학생을 위한 중등학원이 있는데 저는 계속 중등학원에서 인민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6학년까지 자랐어요.

진행자 : 거기서 먹고 자고?

김강혁 : 거기 환경이라는 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에요. 이도 많고요. 간단하게 말하면 구제역 때 돼지들한테 소독하는 거 나오잖아요? 돼지 몸에 대고 막 소독약을 뿌리고 그러는데 거기가 딱 그 모습입니다. 그래도 여기 돼지 굴은 규모도 있고 사료도 포장한 것만 주고 그러더라고요. 거기는 정말... 저는 남보다 더 북한 사회에 대한 원한이 있어요. 여기 와서도 텔레비전에서 고아원 소리가 나오면 남보다 더 귀를 기울이게 돼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나... 여긴 장애인 학교도 있더라고요. 북한엔 장애인 학교는 상상도 못하죠. 정말 사회주의랑 자본주의랑 뭐가 옳고 그른지 뭣 하러 얘기를 해요. 그냥 이거 딱 하나 놓고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 정말 열악하군요.

김강혁 : 여기서 보면 그 학원 선생님들은 거의 교도소 교관 수준이에요. 어린 아이들을 한손으로 딱 들어서 던지면 한 5미터 날라 가죠. 난로의 불삽과 쇠갈고리로 때려요. 그냥 어린 애들이잖아요? 밖에 나가보고 싶고 뛰어놀고 싶은 애들은 그냥 막 울타리에 가둬 놓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그 애들은 그날로 죽어야 해요. 애들은 그걸 들키지 않자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도적을 만들어 놓고 도적질했다고 때려요.

진행자 : 그렇게 학교를 졸업했는데 더 고생한다는 돌격대로 보냈으니 서러웠겠어요.

김강혁 : 진짜 여기서 생각해보면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당이 저희들을 거둬 주지 않았으면 너희는 죽었다. 당에서 키워줬으니 나라에 충성해라. 나라의 재가 되라... 청년 분조로 농장에 보내고 나머지는 돌격대 가고 그랬죠. 우리 학급이 당시에 30명 됐는데요. 지금 한국에 온 것은 저 한 명뿐이 없어요. 여기 와서 새터민 쉼터라는 인터넷 사이트에도 올리고 하면서 알아봤는데 그렇더라고요. 그 주변에서 온 사람에게 전해들은 소식은 어떤 아이는 돌격대에서 맞아 죽고 누구는 공장에서 뜨락또르 때문에 다리가 잘려 죽고... 저는 막 그게 눈앞에 선해요. 탈망이 들어서 머리 수건을 이렇게 쓰고 힘없이 걷는 모습이 막 눈앞에 보여요.

진행자 : 가족같이 살았던 친구들이라 더 그렇군요.

김강혁 : 학원에서 공부를 못하는 이유도 있어요. 우리가 학교를 일농 학원이라고 했어요. 일만하는 농장이라는 뜻이에요. 손이 정말 요만했겠죠. 호미도 안 줘요. 고사리 같은 손을 맨손으로 돌을 두져서 김을 매요. 100명이면 100명, 줄을 일렬로 세워서 '시작'하죠. 제일 먼저 김매는 사람에게 강냉이 한 이삭 준다(옥수수 한 개 준다) 하면 애들이 그거 하나 먹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 힘을 다해 땅을 깁니다.

진행자 : 돌격대 생활은 어땠어요?

김강혁 : 2005년도 5월에 나갔나요? 촌에서 평양에서 한 번도 못 가보고 죽을 줄 알았는데 돌격대를 평양에 배치 받은 거예요. 학교에서는 그래도 제가 청년비서 했다고 애들이 다 나와서 막 영웅이 돼서 돌아오라 환송해주고 그랬어요. 사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못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막 울어요. 애들하고 이별하고 막 울면서... 자기 목 달개(교복 옷깃)를 뜯어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주고 자기가 시장에 나가서 도둑질 했던 수첩을 주는 얘들도 있고 논밭에서 이삭주이해서 모은 걸 시장에 팔아서 사탕 한 봉지를 주머니에 넣어 주기도 하고... 정말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말도 못해요.

(프로모 : 푸른 바다에는 고래가 있어야지,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우리 모두 고래처럼 큰 꿈 키워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RFA 자유 아시아 방송에서 전해드리는 <젊은 그대> 듣고 계십니다.)

진행자 : 평양 돌격대 생활은 어땠어요?

김강혁 : 평양 도착하니까 눈이 막 돌아가요.(웃음) 그때는 왜 그렇게 거기가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몰라요. (웃음) 105층 류경 호텔 아시죠? 그 공사장에서 일했어요. 그때 블록매고 올리느냐고 척추 여기, 가죽이 벗겨져서 아직 흉터가 있어요. 류경호텔 건물은 위층까지 못 올라가고 5층 아래서만 작업했는데요. 호텔 공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블록 떨어진데 복구하거나 바닥 정리 작업을 주로 했어요.

진행자 : 류경 호텔 직접 들어가 보면 어때요? 오랫동안 비어있어서 좀 을씨년스러울 것 같은데요.

김강혁 : 저 한번 짬탕 친다고 몰래 10층에 올라가 1시간 자고 내려오다가 길을 잃어서 4시간을 헤맸는데요. 어휴... 정말 귀신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처음 들어간 것이 828 돌격대에서는 보통 하루에 15시간 일했는데요. 일 끝나면 또 다시 모여서 춤을 추고 오락회를 해요. 정말 기가 차죠. 온 몸은 멍이고 어깨, 손에는 물집이고 눈이 막 감기는데요... 그때 신병이 130명이 들어갔는데 4개월 후에 제가 탈영할 때 남은 인원이 23명이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다 도망쳐 집으로 돌아간 거죠. 난 도망쳐서 갈 집이 없었어요... 진짜 마지막에 도망칠 때 즈음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어요. 잘 때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절로 나는데 그러면 막 엄마 생각나요.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힘들게 하나... 그때는 왜 죽을 생각도 못 했는지 모르겠어요. 죽을 생각할 짬도 없더라고요. 돌격대 나와서 평양에서 거지 생활하다가 아는 삼촌의 도움으로 105돌격대를 나갔어요. 아, 근데 105는 좋더라고요. 아주 밥을 많아 줬어요. 좀 쑥스럽지만 사랑도 해보고요... (웃음)

김강혁 : 거기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하고 싶은데 빨리 끊고 다른 말도 해야 하니까 말이 막 혼동돼요. (웃음)

진행자 : 105에서 지낼만했다면 남쪽에서 가족이 연락 왔을 때 나올까 말까 고민이 많았겠네요.

김강혁 : 북한 사람들도 다 비슷할 걸요. 나오면 좋죠. 잘 사는 나라에 나오면 좋잖아요. 아마 지금도 보위부들 다 입 막고 눈치 안보고 대답하라면 99.9%는 한국 온다고 할 겁니다.

진행자 : 근데 와보니 어때요?

김강혁 : 처음에 한 달은 정말 너무 좋았어요. 자다 깨서 밖을 눈을 비비고 나와 보기도 하고요. 여기가 기회의 땅이라고는 생각해요. 저는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 북한에서 한국에 오는 길에 잡혀서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수용소에 잡혀있을 수 있는데 나는 여기서 이밥을 먹어, 수용소에 잡혀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여기서 공부를해, 일을 하고 돈도 받아... 두 번을 잡혔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하죠....

진행자 : 앞으로 계획은 있어요? 뭘 하고 싶어요?

김강혁 : 경찰이 되고 싶어요. 저희 부모가 경찰이었고 북한에서 꿈이 보안원이었는데요. 저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 저는 토대가 나빴거든요. 여기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죠.

강혁 씨는 북한에서 매일매일 일기를 썼는데 남쪽에 나올 때 그걸 가지고 나오지 못해서 아쉽다고 합니다. 바람에 날라 가고 얼음바닥에 떨어져 찢겨졌을 강혁 씨의 일기장... 여기서 다시 한 장 한 장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기가 북쪽에서보다 희망차고 행복한 내용으로 채워지길 기원해봅니다. 힘든 인생길을 넘어 왔어도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김강혁 씨에게 응원의 말을 전해봅니다. 파이팅!

김강혁 : 제 말을 듣고 계실지 모르겠지만요. 북한에서 혹시 제 말을 듣는 학원 출신들, 말로만 희망, 희망 했었는데 그 의미를 이제 알겠어요. 희망을 놓치 마세요. 좋은 날에 다 같이 만나요.

지금까지 <젊은 그대> 이현주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