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북한, 지옥을 탈출하기 위한 9년’의 저자 김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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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탈북자 북송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3월 초, 프랑스에서 20대 탈북 여대생이 쓴 책이 출판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책 제목이 '북한, 지옥을 탈출하기 위한 9년'... 책쓴이는 서강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탈북 대학생 김은선 씨입니다.

은선 씨는 책에서 르 피가로 신문의 서울 주재 특파원 세바스티앙 펠레티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어머니, 언니와 행방살이를 하며 떠돌다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하기까지 9년의 세월을 정리했습니다.

책의 홍보를 위해 직접 프랑스에 갔다가 서울에 막 돌아온 김은선 씨를 <젊은 그대>에서 만나봤습니다.

기자 : 은선 씨, 반가워요.

김은선 : 안녕하세요.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네요. (웃음)

기자 : 저쪽 건물 앞에요. 학교가 넓으니 만나기 힘드네... (웃음) 프랑스에선 언제 왔어요?

김은선 : 11일 날이요.

기자 : 파리는 어떻던데요?

김은선 : 다들 하고 파리, 파리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렇던데요? (웃음)

20대 젊은 여성이 전하는 북한의 이야기, 탈북자의 일상을 프랑스 언론도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은선 씨는 하루에 5개 이상 프랑스 체류 내내 신문, 방송 기자들을 만났다는데요. 우선 책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기자 : 책 제목이 '북한,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한 9년'입니다. 고향인 북한을 지옥이라고 했네요. 탈북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 같습니다.

김은선 : 사실 좀 자극적인 제목인데요. 저는 사람들에게 북한 얘기를 좀 알리자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이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 제목이 약간 자극적인 쪽으로 갔지만 사실 지옥이라는 말도 그렇게 틀리지도 않습니다. 인권이나 자유가 다 박탈된 곳이기 때문에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기자 : 책 내용이 궁금하네요. 어떤 얘기들이 담겨있습니까?

김은선 : 어떻게 보면 탈북자 중에서 제 삶은 평범하거든요. 물론 일반 사람들, 일반 남한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아니지만요. 평범한 탈북자의 얘기, 북한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던 것들부터 시작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 시시콜콜하고 일상적인 얘기들을 담았습니다. 시작은 지금 얘기하면 창피하지만 제가 유서를 쓰는 것으로 시작해요. 엄마와 언니가 나진, 선봉이라는 곳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는데 가면서 저에게 두부 한 모와 돈 15원을 주셨어요. 제가 혼자 4-5일을 있었는데 물론 두부는 먼저 다 먹고 언니와 엄마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 거예요. 너무 배가 고파서 이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서를 썼는데 그게 이 책의 시작입니다.

기자 : 그때가 몇 살 때에요?

김은선 : 12살 때 일이에요.

기자 : 어릴 때 얘기네요. (웃음) 그래서 어머니랑 언니는 돌아오셨어요?

김은선 : 네 (웃음) 너무 배가 고프면 몸이 잦아들면서 잠만 와요. 다 포기하고 이제 죽는가보다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엄마랑 언니가 오긴 왔는데 식량을 하나도 못 구해 온 거예요. 그래서 셋이 다 같이 죽자고 세 명이 나란히 다시 자리에 누웠어요. 하루 밤 자고 일어나서 엄마가 안 되겠는지 초상화를 내려서 사진은 빼버리고 틀은 내다 팔았어요. 그리고 엄마 친구에게 식량을 조금 꾸어 먹고 셋이서 나진, 선봉으로 갔어요. 그때부터 집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행방살이를 1년 넘게 했었죠.

기자 : 꽃제비 생활했다는 얘긴가요?

김은선 : 그렇죠. 근데 제가 양기(용기)가 별로 없어요. 배가 덜 고파도 구걸은 못 했어요. 그냥 산에 가서 나무해서 팔거나 그랬는데 나중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봄, 가을엔 남새 같은 것을 남의 밭에서 채서 장마당에 팔고 그랬죠.

기자 : 원래 고향은 어디에요?

김은선 : 은덕이요. (웃음) 그 유명한 아오지입니다.

기자 : 나진에서 행방 살이는 어땠어요? 힘들었겠지만...

김은선 : 어느 날은 산에서 나무를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나는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 버텼어요. 엄마랑 언니는 안 내려갈 수 없잖아요? 먹을 걸 구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 혼자 산에서 잤는데 밤이 되니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웃음) 주변에 모든 게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고... 그래서 하늘만 열심히 봤어요. 근데 다행히 그날 하늘이 너무 예뻤어요. 머릿속으로 하늘에 사람도 만들어 봤다가 별별 것들을 다 만들면서 밤을 거의 샜는데요. 정말 힘든 날들이었지만 지금 좋게 생각해보면 언제 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행방살이 와중에도 이런 추억을 갖고 있다는 건 당시 은선 씨가 아직 어린 나이였다는 얘기 같습니다. 사실 12살, 13살이면 부모의 품에서 한창 어리광을 피울 나이인데요.

직접 만나본 은선 씨는 야무지고 차분하고 잘 웃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남한의 대학생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책에 담긴 은선 씨의 인생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습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갔고 어머니가 팔려간 중국의 농촌에서 언니와 함께 3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동생까지 낳았지만 새아버지와 가족으로 살 수 없었고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공안에게 잡혀 북송 당했습니다.

김은선 : 처음 탈북 할 때는 남한으로 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겠다고 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 살겠다고 건너는 거예요. 그렇게 중국에 가보니 자꾸 잡아가고 남한으로 가면 더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하니까 남한으로 오는 거죠. 저희도 그랬어요. 1997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많이 아팠어요. 그렇게 앓다가 거기선 살 길이 없어서 중국으로 가자고 강으로 갔어요. 근데 두만강 물이 너무 많이 불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우리 쪽에는 강이 굉장히 깊어요. 그런데 돌아와서도 먹고 살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갔어요. 얼음은 녹았는데 물을 더 불어있었고 엄마가 저희 두 손을 잡고 건너다가 안 돼서 돌아왔어요. 그 다음해 행방살이 하던 그 해에 두만강이 얼었을 때 강을 건넜고요. 다행히 엄마가 저희 둘을 데리고 인신매매로 팔려가서 셋이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어요.

기자 : 중국 생활은 어땠어요?

김은선 : 나중에는 괜찮았어요. 근데 처음에는 완전히 시골에 살았어요. 버스를 타러 40분씩 나와야했으니까요. 시골이니까 키운 야채에 그냥 농사지은 것만 먹고 살았지 풍족하진 않았어요. 또 엄마가 시집간 사람이 한족이었고 자기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말이 처음에는 안 통했어요. 그런데 저희가 중국어를 배워도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그리고 엄마가 그 집에서 동생을 낳았거든요. 그럼 저희는 한 가족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 안 해주더라고요. 싸우기도 하고 도망도 쳐보고 그랬죠.

기자 : 그 집에서 잡혀서 북송됐었던 거예요?

김은선 : 네, 그렇죠. 저는 어린나이였지만 중국에서 들었던 말 중에서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이 제일 분했어요. 그때는 옆집 아이가 그런 말을 해서 빗자루로 때리고 싸우고 난리를 치고 그랬어요. 사실 중국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며 내 나라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어요. 가끔 엄마랑 언니랑 자면서 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근데 정작 잡혀가니 여태까지 듣지 못했던 그런 욕들을 엄청 들었어요. 나한테 하는 것도 있었지만 자기 엄마뻘 되는 사람한테 막 이 간나, 저 간나 하는 소리를 들으니 수치스러웠어요. 그리고 엄마가 당시에 동생 젖을 아직 안 땐 상태에서 잡혀 와서 젖이 불고 엄청 아팠어요. 노동 단련대에서는 아프다고 해도 꾀병이라고 일을 시켜요. 배고플 때는 정말 무엇을 줘도 다 먹는데 엄마는 먹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결국 일 나갔다 와서 총화 끝나고 쓰러졌어요. 쓰러지면서 엄마가 변을 보셨는데 변에 피와 곱만 나온 거예요...

은선 씨는 인터뷰 내내 나는 평범한 탈북자다, 나 정도의 고생은 탈북자들에게는 평균적이고 그래서 프랑스 기자도 책을 낼 적임자로 본인을 고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더 심한 고초를 겪은 탈북자의 얘기는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믿겨지지 않는 꾸며낸 얘기로 느껴지는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평균적인 얘기가 책으로 나왔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까요?

차분하게 얘기를 이어가던 은선 씨가 딱 한번 눈물을 보인 건 아버지 얘기를 할 때였습니다.

김은선 :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제 생각엔 영양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아팠던 것 같아요. 아버지 직장에서 옥수수 열 킬로를 준다고 해서 식량을 꾸어서 장례식을 하고 제사를 지냈어요. 근데 그건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제사상을 차리는데 튀김이 하나 없어졌어요. 범인이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아버지의 제일 친한 친구... 그 아저씨도 너무 배고팠던 거죠. 그 아저씨를 탓하진 않았어요. 진짜 불쌍하고 비참한 일이죠. 진짜 사람이 사람 노릇 못하고 살게 하는 세상이었어요.

기자 : 아버지 일은 한이 많이 되겠어요.

김은선 : 아버지를 묻을 때 그날 몇 사람이 더 묻혔어요. 묘비를 각목으로 했는데 은덕엔 그런 묘비로 쓸 만한 나무가 귀해요. 다음날 그 묘비가 다 없어졌어요. 누가 장작으로 패서 쓰거나 팔려고 가져간 거죠. 중국에서 살 때는 아버지 묘에 한번 가자고 언니랑 매일 얘기했어요. 농장 옆에 있는 묘지니까 묘비가 없으면 오래된 묘지 같아서 그냥 없애 버리거든요. 근데 중국에 있을 때는 못 갔고 지금은 남한에 있으니 못 가죠. 통일 되서 나중에 찾아가도 우리 아버지 묘는 없을 거예요... 아빠를 또 많이 미워했어요. 식량난이 시작되면서 아빠가 집에 물건을 많이 내다 팔았어요. 어느 날 학교를 가려는 데 책가방이 없는 거예요. 아빠가 내다 판 거죠. 그래서 아빠를 미워했는데 정말... 억울하죠. 왜 제가 아빠를 미워했어야 해요? 죄송하고 그렇죠...

교화소에서 고향 은덕으로 돌아가던 길에 운 좋게 도망칠 수 있었고 중국에 다시 돌아와선 엄마, 언니, 은선 씨 세 식구는 따로 헤어졌습니다. 혹시라도 다시 잡히면 누군가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탈북 브로커를 만났고 그를 통해 어머니와 남한에 왔습니다. 2006년 12월, 북한을 나온 지 9년만의 일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뒷일을 맡는다고 기다렸던 언니도 2년 뒤 한국으로 왔습니다.

기자 : 책이 프랑스의 펠레티 기자와 함께 대화를 나눈 걸 책으로 옮겼는데 얘기하면서 많이 울었겠어요.

김은선 : 네, 많이 울었어요. 처음에는 기억하면서 기분이 너무 우울해지고 했는데요. 나중엔 계속 기억을 되살려야 하니까 그것에 신경 써서 그런지 감정이 정리되더라고요. 사실 책에는 얘기를 다 쓰진 못했어요. 너무 길어져 버리니까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제 얘기를 찬찬히 써보고 싶어요.

기자 : 이제 졸업반이죠?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요?

김은선 : 앞으로 심리학, 아동 심리학 공부해서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 도와주고 싶어요. 우리 북한에서 온 탈북 청소년들은 키도 남한 친구들보다 작고 기초 학력도 떨어지고 그래서 주눅 들고 기를 못 펴는 친구들이 있는데요. 그래도 자신감은 가질 수 있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요...

2주 전 <젊은 그대> 시간에 돌격대 생활을 하다가 남쪽에 나온 김강혁 씨의 얘기를 전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은선 씨에게 청취자들, 또 고향에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말을 해달라고 했더니 강혁 씨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김은선 : 저는 누구 보고 싶냐 그러면 친척들도 있지만 친구가 보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한 가지는 굶어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나 그런 걱정도 있고요. 정말 살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우리가 나중에 만나면 못 알아 볼 수도 있고 어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친구들아 살아서 언제가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살아남아 달라, 은선 씨의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젊은 그대> 오늘은 프랑스에서 자서전을 낸 탈북 여대생, 김은선 씨의 얘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