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북쪽처럼 협동농장 체제가 아니라 개인이 농사를 짓는 남쪽에는 농촌 동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봄과 가을 같은 농번기엔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운 것이 농사일입니다.
남쪽 대학에서는 농활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농촌지원활동 줄여서 농활입니다. 학교 단위 또 동아리 단위로 지원자를 모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농촌에 머물며 농사일을 돕습니다. 주로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많이들 가고 농번기인 봄, 가을에도 갑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농활에서 처음 농사일을 접해보는 건데 처음 해보는 농사일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겠습니까. 그저 받아만 먹던 쌀이나 과일이 어떤 노력으로 만들어지는지 톡톡히 배우고 오게 됩니다.
남북 청년들이 함께 하는 인권 모임 <나우>에서도 지난주 농활을 다녀왔는데요. 오늘 <젊은 그대>은 그 현장으로 가봅니다.
탈북 대학생 지철호 씨가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INS - 고속버스 출발음 + 현장음
지난 금요일, 저는 제가 활동하는 모임의 성원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지난해 한번 다녀왔고 올해가 저의 두 번째 농활입니다. 시골 출신인 저는 북쪽에선 공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대부분의 북한 청년들과 같이 농사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잘 압니다. 그러나 남쪽에 와서는 서울에 살다보니 남쪽 농촌 사정은 거의 모릅니다.
INS- (농활 떠나는 소감 어떠세요? 인터뷰) 농촌에 가서 도움을 주는 그런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기로 했어요... / 서울에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농촌을 가서 여유랄까요? 그런 것도 가져보고 옛날 추억도 좀 한번 되살려볼까 해서 떠나기로 했어요.
저희가 농활을 떠난 곳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1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는 충청북도 충주의 한 시골 마을. 논은 없지만 과수와 채소밭이 많은 곳입니다.
저희는 감자도 캐고 옥수수도 따고 소채밭에 퇴비도 주고 고추 따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고 힘들긴 했는데 오랜만에 해보는 농사일이 왠지 신이 났습니다. 고향에서는 더운 날, 농사일을 하려면 이게 언제 끝나나하는 막막함에 힘만 들었는데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남의 일이라 그랬는지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습니다.
INS- 현장에서 일하는 소리
청취자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북쪽 어린이들은 10 살부터 농촌 동원을 나갑니다. 봄, 가을 전투뿐 아니라 학교 교원들이 농촌 반장이나 분조장들에게 뇌물을 조금씩 받고 우리 학생들을 일하러 나가게 하기도 했습니다.
북쪽 농사는 온통 전투 투성 입니다. 모내기 전투, 퇴비 전투... 그러나 전투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남쪽의 논과 밭은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든 밭을 작은 기계가 들어가 갈아엎는 것을 보고 남쪽 농촌의 기계화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요즘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처럼 농촌지원활동을 떠나는 학생들이 많은데요. 이런 농활의 전통은 192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 강점기 시기, 언론계와 종교계에서 전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들을 대상으로 계몽 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의 주축이 된 것이 대학생, 지식인들, 유학생들입니다. 이들은 방학 기간 농촌으로 직접 찾아 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 중반, 일제로부터 이 운동은 금지당합니다. 이때의 농촌 활동이 계몽 운동 성격이었다면 196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농촌봉사활동은 일종의 사회운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학생 운동의 발전과 함께 농활은 대학생이면 누구나 참여할 정도로 활발해졌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색깔도 짙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농촌에서는 대학생들의 농활을 반기지 않았다는데 요즘은 또 분위기가 다릅니다.
농촌 인구의 감소, 농촌의 기계화로 농촌 분위기도 달라졌고 대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취업 준비며 공부에 바쁩니다. 이런 시류에 따라 농활도 변했습니다.
INS - 초등학교 과학 교실 현장 녹음
포항공대대학생들이 외딴 섬을 찾아 과학교실을 열었습니다. 전교생이라고 해야 7명밖에 없는 작은 학교가 오랜만에 시끌벅적합니다.
INS - 학생 인터뷰: 새로운 걸 알게 돼서 너무 신나요.
컴퓨터를 전공한 학생들은 농촌에 가서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주고 음악을 전공한 학생들은 문화 활동을 접하기 어려운 농촌에 색다른 공연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색다른 농활을 컴활, 문활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INS - 농촌 현장 할머니 인터뷰 : 이렇게 와주니 전부 친손자 같고 너무 고맙지... 학생인터뷰 : 시골에서는 이런 문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이런 문화 공연도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21세기형 농활이죠.
이렇게 농활의 모습도 다양해 졌지만 농활은 온 학생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INS - ( 농활 이제 마무리인데 소감어떠세요? 인터뷰 ) 서울에서 답답한 속에서 공기도 탁하고 했다면 여기는 확 뚫려요. 공기도 좋고 인심도 좋고 물도 좋고 좋네요. 처음에는 어떤 일은 하게 될까... 날씨도 더운데. 고민 많이 했는데 정작 해보니까 마음이 뿌듯하네요. 북쪽에서는 농촌 지원 전투라고 해서 학생들, 대학생들 지어는 직장인들까지도 농촌 지원 활동을 하는데 사실 이건 지원해서 하는 건 아니죠. 근데 이건 내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이니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이날 저와 함께 농활을 떠난 친구들은 모두 탈북 대학생들입니다. 사실, 저희들은 남쪽 대학생에 비해 공부가 힘듭니다. 여기는 교육방식도 다르고 시험유형도 달라 이것을 알아가는 것도 큰 공부입니다. 그렇지만 나만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일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농활을 떠난 본 것인데요. 농활을 끝내면서 생각해보면 남을 돕기보다 제 자신이 뭔가를 더 얻어오지 않았나싶습니다.
충북 청주에서 지철호 였습니다.
신문에 실린 대학생들의 농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끕니다. 두 할머니가 어깨에는 신문지를 덥고 머리에는 비닐 모자를 쓰고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는데 할머니들 뒤에는 더 신이 난 얼굴로 두 여학생이 웃고 있습니다. 사진 설명을 보니 농활 간 학생들이 비가 와서 농사일이 없으니 경로당에 가서 할머니들 염색을 해드린 것이라는데 더없이 정겨워 보이네요.
농활가면 그냥 열심히 일만 하고 오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농활을 보면서 이런 식의 활동이 더 괜찮았겠구나 싶습니다.
북쪽에서 오신 분들은 농촌 동원하면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동원되는 것과 자원하는 것의 차이가 있는 건데요. 직접 찾아가 동네 사람들과 하나 되는 이런 농활, 어떠십니까? 나중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때가 오면 북쪽으로도 찾아가 보겠습니다.
<젊은 그대>, 오늘은 남한 대학 생활 중 농활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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