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주고, 받고, 고맙고, 돌려주고 - 장학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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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주 입니다.

<젊은 그대>에 참여하는 이정민 씨에게 축하할 일이 생겼습니다. 2013년도 대학 입시 특별전형에 합격해서 내년에 어엿한 대학생이 된다는데요. 사실 정민 씨는 <젊은 그대>에 참여하는 학생 중 가장 연장자입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직장을 다니며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로써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정민 씨 같이 남들은 다 공부를 끝내는 나이에 뜻한 바가 있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남쪽엔 적지 않은데요. 이런 사람들은 만학도라고 합니다.

만학도 또 집안 사정은 어렵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고학생, 친인척이 없이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와서 공부하는 탈북 청년들이 무사히 학업을 할 수 있는 돕는 제도가 있습니다.

<젊은 그대> 오늘은 남한의 장학금 얘깁니다. 이 시간 남북 청년들이 함께 하는 <나우>의 지철호, 이정민 씨 함께 합니다.

진행자 : 장학금 받아 보신 적 있으세요?

지철호 : 네!

진행자 : 어떤 장학금이였어요?

지철호 : 지난해 하반기에 북한이탈주민 후회원에서 탈북 청년들을 대상으로 주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것뿐 아니고요. 대학교에서도 우리 학비의 절반을 지원해줍니다. 법으로 정해서 탈북 청년들은 국립대에 진학하면 학비를 전액 다 지원해주고 사립 대학교에 진학하면 국가가 절반, 절반은 학교에서 지원받습니다. 사실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거죠. 그렇지만 장학금도 일종의 규정 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쪽에서 일정 금액 이상 장학금으로 지원을 받았으면 다른 쪽에서는 다시 받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중복으로 받지 못 하더라고요.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기 위해 그런 것 같습니다. 돈을 벌지 않은 학생들에게 사실 십만 원, 백 달러도 큰돈인데 학비를 이천달러 이렇게 지원받으면 진짜 크죠. 장학금 대상자를 선발할 때는 성적, 가정환경도 보고요.

진행자 : 철호 씨는 어떤 조건이 만족이 됐을까요? 공부를 잘해서? (웃음)

지철호 :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웃음) 꼭 학교 성적만 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재단에서 하는 활동에도 잘 참여하고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하는 부분도 보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 : 기본은 공부지만 다른 부분도 고려한다는 얘기네요. 사실 탈북 학생들은 장학금 없이 학교 다니는 건 힘들죠? 정민 씨는 이제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는데 이런 정보를 잘 찾아보셨어요?

이정민 : 열심히 찾아봐야죠. 그런데 1학기 성적이 나와야 장학금 신청이 가능한 게 많아요. 그리고 우리 탈북자들은 학교 진학을 하면 1인당 40만원, 400달러 정도의 생계비가 지원이 됩니다. 이건 대학교에 다니는 전 기간 동안 나오고요. 학교를 휴학하면 이 돈은 짤립니다. 그런데 휴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생계비 지원을 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의견들이 많아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안 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죠. (웃음)

진행자 : 정민 씨는 직장 다니고 강연하면서 생활해 왔는데 학교를 가게 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니까 부담이 크겠어요.

이정민 : 그렇죠. 제가 돈을 못 벌면 가계 수입이 반의 반 토막이 나는 거니까요. 진짜 크죠. 그래서 그 문제가 제일 걸렸어요. 경제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공부를 할 것이냐... 하지만 기회비용이란 걸 생각했었어요. 4년 동안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고 회사에 취직해서 일한다 해도 학력 제한에 걸려서 고소득은 힘들거든요.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지금은 생각도 못하는 고소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졸업 후에 취직을 못해 좋은 직장에 못 가더라도 학창 시절 4년 만큼은 제 인생에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게 진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진행자 : 사실 정민 씨처럼 직장을 다니다가 늦게 학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꽤 있어요. 이런 때야 말로 장학금이 절실하죠. 북쪽은 어때요? 장학금이라는 말은 사용하시나요?

이정민 : 제가 북한에서는 대학을 못 다녀봐서 잘 모르겠어요. 현금보다는 국가에서 휴양소 견학, 평양 방문 이런 걸 배려로 주지 않을까요?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일등 한 아이를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 소나무 텔레비전을 받았거든요.

진행자 : 북쪽에서 대학 다녔던 분들에게 여쭤봤더니 연대장 그러니까 남쪽 식으로 하면 총학생 회장 정도 되죠? 이 연대장에게는 일정 정도의 현금을 매달 장학금으로 준다고 하네요. 얘기 해주신 분이 학교 다녔을 때는 350원 줬다고 하던데요.

이정민 : 북쪽 사람들도 공부 잘해서 타는 돈이 장학금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근데 북한은 우상화하는데 투자를 많이 하니까요.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혁명 활동 시간 같은 데서 잘 못하면 꽝이죠. 친애하는... 경애하는... 이 걸 잘 해야 합니다. (웃음)

진행자 : 북쪽에서도 남쪽에서 학교 다니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비난을 하는데요. 남쪽 대학 학비가 싸진 않습니다. 요즘 대학 한 학기 학비가 얼마나 들어요?

지철호 : 한 학기에 4백만 원이 넘습니다.

진행자 : 일 년이면 만 달러 가까이 든다는 얘기네요.

지철호 : 그래서 가정에서 자식 한 명을 대학교에 보내려면 부모가 모두 나가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죠.

진행자 : 지난해 반값 등록금 문제가 크게 주목받았죠. 학생들이 나서서 등록금을 좀 싸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이 장학금을 늘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등록금이 이렇게 비싼데 그 값은 한다고 생각해요?

지철호 :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학교에 낸 금액이 있으니까 그 만큼은 꼭 배워가야겠다는 생각이 있고요. 저 말고 다른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공부할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마지못해서... 학교에 안 가면 친구들이 데리러 오니까 학교에 가서 앉아있고 그랬는데 이제는 경쟁의 묘미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이정민 :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다 안 읽고 갖다 줘도 내 돈 주고 사 본 책은 끝까지 읽게 되잖아요? 사람 심리가 그런 것 같아요. 대학들이 등록금 받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단 대학들이 기업처럼 이익을 남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진행자 : 맞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그런 부분에서는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남쪽의 대학들은 국가에서 지은 국공립 대학도 있지만 사립대학도 많잖아요. 대학 중엔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지은 학교도 있습니다.

지철호 : 어찌 보면 한국이 참 살기 힘든 곳처럼 보이는데요. 훈훈한 때도 많아요. 저 북한에서 살 때는 장애인이 대학 다닌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남한에는 대학에 장애인들도 많아요. 청각 장애인도 있고 몸을 운신하지 못하는 정도의 중증 장애인도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정민 : 그런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이익이지만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나는 뭔가... 자극을 받을 수도 있고요. 제가 이번에 대학을 지원하면서 알아보니 저소득층 ,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 전형이 굉장히 많아요. 남한 정부에서도 이런 전형들을 더 확대하는 것 같고요.

진행자 : 자본주의의 약점 중 하나가 소득불균형인데요. 이런 정책이나 장학금 제도들이 이걸 보완하고 있는 셈입니다. 찾아보면 탈북자들에 대한 장학금도 참 많죠?

지철호 : 네, 제가 알기로도 한 10군데 정도 됩니다. 천일 장학재단, 이북오도청에서 하는 함북 장학금도 있고 북한이탈주민 후원회도 있고요. 시민 단체에서도 주고요. 국가 장학금도 있긴 한데 저희는 이미 받는 게 있으니까 안 되고요.

진행자 : 정민 씨에게는 좋은 정보네요.

이정민 : 그러게요. 근데 이렇게 듣다보니까요. 장학금은 꿈을 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공부를 잘 해야 장학금을 받을 텐데 제가 자신이 없네요.

진행자 : 그렇지만 모든 장학금이 꼭 공부를 잘 해야 받느냐... 그건 아니고요. 본인의 열의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곳도 많습니다.

지철호 : 정민 씨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대학 들어가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 여기 학생들과 함께 경쟁할 수 있을까. 근데 한 학기를 다녀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누가 더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하구나... 정민 씨도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공부 하다보면 진짜 재밌어요. (웃음)

이정민 : 진짜 열심히 할게요. 내년 삼월을 생각하면 막 가슴이 뜁니다. (웃음)

지난 14일, 모시 저고리 차림의 김순전 할머니가 서울의 한 대학교 총장실을 찾았습니다. 낯선 할머니의 방문에 의아해하는 교직원들에게 김 할머니는 기부를 하고 싶다, 내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는데요. 김 할머니가 내놓은 재산은 천만 달러.

1923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6.25 전쟁 통에 부모와 형제와 헤어져 이불 한 채만 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데요. 서울에 정착해 장사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평생 속옷까지 기워 입을 만큼 검소하게 살아왔던 김 할머니는 "어려운 아이들을 뽑아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학교는 할머니의 이름을 딴 '김순전 장학금'을 만들 예정입니다.

남쪽에는 이런 장학금이 꽤 많습니다. 평생을 새우젓 장사, 삯바느질, 떡 팔고 콩나물 팔아 모은 재산을 선뜻 공부하라 내주는 고마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데요. 이런 장학금은 어려운 형편에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젊은 그대> 오늘은 남한의 장학 제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