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진행에 이현주입니다.
추석,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소란했던 명절의 뒤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성들은 부엌일에 지치고 남성들은 오랜 운전에다 숙취에 고생하고 게다가 피곤함에 신경이 날카로워 부부싸움까지 했다면 명절 뒤끝은 생각보다 오래갑니다. 오히려 명절이 지나갔다고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여러분의 명절은 어떠셨는지 궁금한데요.
북쪽에서 온 탈북 청년들 중에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남쪽으로 왔거나 가족 중 일부만 함께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명절이면 자연스럽게 고향 집과 가족 생각이 나고 슬픔 마음에 평일보다 못한 명절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하루만 슬퍼하고 힘내자,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들 살고 있습니다.
추석 명절 연휴를 앞둔 지난 금요일, 귀성 행렬이 막 시작되는 서울역에 탈북 대학생, 지철호, 이수연 씨와 함께 나가봤습니다.
INS - 서울역 부산행 KTX 열차 탑승 안내 방송
진행자 : 철호 씨, 수연 씨 안녕하세요. 저희가 지금 서울역에 나와 있습니다. 아직 귀성 행렬이 시작되기 전이라 생각보다는 한산한데요?
지철호 : 지금 이 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서울역엔 보통 출퇴근 시간에 KTX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이 시간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오늘은 고향 가는 사람들 때문에 좀 붐비네요. 그래도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 사람들이 다 표정이 밝고 그렇습니다.
진행자 : 아, 오늘부터 <젊은 그대> 방송을 함께 하게 된 새로운 식구가 있습니다. 이수연 씨, 반갑습니다.
이수연 : 안녕하세요. 저는 동국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수연이라고 합니다. 함북 청진시 출신이고 2008년에 고향을 떠났어요.
진행자 : 사실 여기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제주도 빼고 전국을 다 가잖습니까? 여기 와서 떠나는 사람들보면 고향 생각도 나고 할 것 같은데요.
지철호 : 솔직히 그냥 제 생일이나 이런 날보다도 민속 명절이 고향생각이 특히 많이 나죠. 어렸을 때 친구들도 보고 싶고요...
이수연 : 원래 즐거워야 하는 날인데 저한테는 좀 가슴이 무거워지고 그런 날이에요. 참, 우리가 가까운데 못 가잖아요? 여기 사람들은 막 고향에 가기 귀찮고 그렇다고 하는데 저희는 갈 수 없으니까 더 절실해지는 거죠.
진행자 : 그러게요... 사실은 귀성길이 고생길이라고 하거든요. 길 막히고 차표 구하기 힘들고 고생고생하면서 간다고 고생길이라고 하는데요. 못 가시는 분들 생각하면 그 길, 정말 감사하며 가야겠습니다. 보통 추석 때는 어떻게들 지내요?
지철호 :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또 남쪽 오는 길에 함께 온 친구들을 만나서 울적한 마음을 함께 터놓기도 해요. 그래도 아무리 울적하다 해도 명절은 명절이잖아요. 함께 어울려서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수연 : 사실 북쪽에서 명절이면 진짜 설레죠. 명절은 맛있는 것 먹는 날이라고 며칠 전부터 막 잠도 잘 안 왔어요.(웃음) 그런데 여기 추석이 아니라도 그런 맛있는 것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설렘은 없죠. 언제부턴가는 친구들에게서 명절 때 전화가 와요. 술 한 잔 하자... 그런데 이번 추석은 그렇게 안 보내려고요. 도서관에서 책볼 거예요. 공부하면서 그렇게 보내려고요.
진행자 : 평소처럼 보내겠다는 생각인데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수연 씨는 남쪽에 가족들과 다 함께 들어왔어요?
이수연 : 어머니와 함께 왔는데요. 제가 살짝 여쭤봤어요. 추석에 저희끼리 여기서 차례를 지내면 어떻겠냐고... 근데 제사를 두 번 지내는 건 아니라고 하네요? 북쪽에서 제사를 지낼 테니 우리는 생략하자고 하셔서 제사는 안 지내기로 했어요.
진행자 : 사실 철호 씨도 그렇고 수연 씨도 그렇고 가족이 일부라도 함께 나왔는데 탈북 청년들 만나보면 혈혈단신 혼자 온 친구들도 많아요.
이수연 : 많아요. 특히 여자 친구들이 많죠. 혼자 들어와서 혼자 생활하는 친구들도 여느 날에는 참 활발해요. 부모 없이 사는 티 안 내려고 하고 자기 일 더 열심히 하고... 그런 얘들이 많아요. 근데 꼭 추석이나 설이 되면 얘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쳐져요. 많이 힘들어 해요. 같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서로 의지하고 옛날 생각만 하면 앞으로 못 나가잖아요? 그래서 추석에만 잠깐잠깐 옛날 얘기도 하자. 그렇게 그리움을 좀 날려버리자고 하죠. 추석이 지나면 또 살아가야 하니까요. 그런 얘기 많이 해요. 추석날만 슬퍼하자고... 저는 그 동안은 딱히 가정의 소중함 같은 건 실감을 못 했어요. 여기 와서 엄마랑 살아보니까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사실 엄마랑 그렇게 사이좋지는 않아요. (웃음) 그래도 관심을 받을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저 같은 건 아버지가 제가 한국에 온 다음에 돌아가셨지만 부모 아예 없는 친구들, 두고 온 친구들을 생각하면 내색하면 안 되죠. 진행자 :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습니다... 분위기를 바꿔서 추석 얘기를 해보죠. 추석, 북쪽에서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이수연 : 뭐 송편도 하고요... 만들면서 못 만들면 나중에 못생긴 아가 낳는다는 얘기도 듣고요.(웃음)
진행자 : 철호 씨는 주로 먹는 쪽이었죠?
지철호 : 추석 전날에는 점심부터 굶어요. 주로 밤에 음식을 하니까 잠 안 자고 기다려서 옆에서 막 얻어먹고 그랬죠. 참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추억이었던 것 같아요. 10살 때 부모님이 중국에 가 계시면서부터는 제 손으로 안 하면 명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진행자 : 그래서 더 특별한 기억이네요. 그렇게 기억 속에 있는 북쪽 명절 음식 맛은 어때요? 남쪽의 명절 음식, 북쪽의 명절 음식...
지철호 : 일단, 북한에서 먹던 게 맛있었죠. 거기는 모든 게 부족하니까 명절 음식은 정말 맛있죠. 여기야 매일 그렇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이수연 : 분위기가 달라요. 거기서는 명절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즐거워해요. 여기는 그렇게 막 설레는 분위기는 없는 것 같아요. 북쪽은 평일과 명절이 많이 대비되거든요. 사람들의 표정도 그렇고... 그런데 남쪽은 명절이면 쉬고 싶다, 자고 싶다 그러잖아요?
진행자 : 명절 음식이 더 이상 특별하다 느껴지지 않고 또 생활이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가족들 만나는 것도 좋지만 푹 쉬는 것도 중요해지는 거죠.
지철호 : 명절 때는 정말 재밌었어요. 동네 도락질이라고 하는데요. 아침에 술 한 병 갖고 나와서 밤새도록 동네 친구들 집을 다 돌아가며 놀아요. 여기는 근데 명절이라도 대부분 맑은 정신에 보내는 것 같은데 거기는 아저씨들부터 모두 휘청휘청하죠. (웃음)
INS - 안녕히 다녀오세요! 편안한 귀성길 되세요! 서 경주까지 가는 표 있나요? 입석 남아 있네요... (고향가세요?) 네, 부모님 뵈러 가는데 표는 몇 달 전에 예매했고...
진행자 : 모두들 즐거운 추석입니다. 고향에 가진 못해도 우리가 얘기는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석을 앞두고 우리 북쪽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음성편지 한번 씩 전해볼까요?
이수연 : 오빠! 잘 지내고 있죠? 저는 엄마랑 잘 지내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데 사실 실감이 안 나요. 아직도 살아계신 것 같아요. 벌초가면 아빠에게 저희는 여기서 잘 지낸다고 말 한마디 전해주세요. 제가 나중에 통일되면 꼭 가서 인사드린다고요.
지철호 : 아버지 생각이 나는데요.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해도 되죠? 아빠, 올 때도 떠난다는 얘기도 못하고 회령에 있다가 왔는데 나중에 한국에 오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가슴에 납덩어리가 떨어진다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아빠 장례식도 못가고 풀 한번 못 뜯어주고 흙 한 삽 못 올린 불효자식 용서해주세요. 나중엔 제가 몇 십 배로 할게요.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진행자 : 이 두 사람의 얘기지만 여기에 살고 있는 많은 탈북 청년들의 가슴 속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철호 씨와 수연 씨, 그리고 남쪽에 나와 살고 있는 탈북 청년들. 감히 제가 전해드리자면 여기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수연 씨 얘기처럼 슬퍼도 단 하루, 뒤돌아보지 않고 내일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젊은 그대> 인사드려야할 시간입니다. 서울역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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