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스펙... 영어 'Specification'의 줄임말인데요. 원래 뜻은 어떤 물건의 사양이나 기술 설명서, 명세서 등을 뜻하지만 남쪽에선 직장을 구할 때나 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 요구되는 각종 조건을 뜻합니다.
학교 성적은 4.5점 만점에 3.6점, 영어 능력 시험, 토익은 990점 만점에 740점, 3분의 1은 해외 언어 연수를 다녀왔고 자격증은 운전면허를 제외한 1.6개... 한 취업 사이트에 올라온 취직을 원하는 대학생들의 이른바 '스펙' 평균치입니다.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고 세계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일자리가 줄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이런 취업의 좁은 문을 뚫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이른바 스펙이 쌓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경쟁 사회의 그늘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북쪽에서 온 탈북 청년들은 이런 남쪽 학생들의 스펙 쌓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오늘 <젊은 그대>는 스펙 얘기 해봅니다. 이 시간 남북 청년들이 함께 하는 인권 모임 <나우>의 지철호, 이정민 씨 함께 합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지철호, 이정민 : 안녕하세요.
진행자 : 두 분, 객관적으로 본인들의 스펙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이정민 : 전 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좋은 스펙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회계 관련 자격증,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중, 상급이 모두 있습니다. 거의나 탈북자들이 정착 시작해서 1-2년은 학원을 다니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한두 개씩 다 있어요. 특히 자격증을 따면 정부에서 장려금을 주니까 그것 때문에 더 자격증을 열심히 따는데 문제는 자격증을 따고도 사용하지 않는 장롱 자격증이 많다는 거죠. (웃음)
진행자 : 지금 정민 씨가 얘기한 이런 자격증도 중요한 스펙 중 하나죠? 철호 씨는 어떻습니까?
지철호 : 저는 여기 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는 스펙은 없는데요. 대신 북한에서 온 탈북자라는 게 큰 스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권단체 활동도 스펙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잘 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남한 학생들과 경쟁해서 크게 뒤지지 않게 학교생활하고 있는 것도 스펙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스펙은 아니지만 컴퓨터 능력이나 영어 점수보다 자랑할 만한 스펙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진행자 : 우리가 보통 스펙...스펙... 이렇게 얘기하는데 뭐가 스펙인가요?
지철호 : 일단 토익, 토플 같은 영어 시험 점수, 중국어나 일본어 같은 외국어 능력 시험 점수 또 한국어 능력 시험도 있어요. 학생들은 스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외국어 같아요. 또 인턴... 어떤 회사에 들어가서 짧게 수습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는 거죠. 그리고 국내외 여행도 스펙이에요.
이정민 : 여행도 스펙이 되나요?
진행자 : 네, 그렇다고 하네요. 특히 해외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도 스펙입니다. 그래서 스펙 쌓기도 공짜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지철호 : 그리고 우리 학교 같은 경우는 스펙도 스펙이지만 졸업하기 위해서 사회봉사 점수는 쌓아야 졸업할 수 있어요. 단체 활동이나 봉사 활동을 얼마나 했는가 따져보는데요.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스펙도 됩니다.
진행자 : 인권 단체 등 시민 단체에서 활동한 것도 일종의 스펙이 되더라고요.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활동이니까요. 이런 스펙 쌓기 어떻게 보세요?
지철호 : 저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젊은 친구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좀 더 많이 경험이나 지식을 쌓으면 그게 사회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스펙을 못 쌓으면 아예 취직을 할 수 없거나 뒤로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행자 :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사실 스펙이라는 게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는데요...
이정민 : 남쪽 회사에서는 직원을 뽑을 때 서류 심사를 먼저 하잖아요. 이 서류상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게 바로 스펙이죠. 근데 토익, 토플의 점수가 높다고 해서 정작 영어를 잘 하진 않더라고요. 어느 정도까진 중요하지만 스펙을 위해 점수만 높이는 건 좀 시간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행자 : 스펙을 위한 스펙은 안 된다... 이런 얘기네요.
지철호 : 진짜 학교에서 방학이 시작되면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방학이 거의 2개월이 넘는데 다들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을 잡을 수가 없어요. 누구는 공무원 학원, 누구는 지방에 배낭여행, 누구는 운전 면허증 따고 방학 때는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다들 얼굴을 볼 수 없다니까요. (웃음)
진행자 : 학기 중에서는 학점, 방학에는 스펙 쌓기에 바쁘다...
지철호 : 거기다가 시간제 알바도 많이 하잖아요? 개강 총회, 종강 총회 같은 자리에서나 모두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시작할 때 만나고 끝날 때 만나는 거죠. (웃음) 진짜 다양한 이유로 다들 바빠요.
이정민 : 제가 컴퓨터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갔는데요.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주변에 저 빼고는 다 초등학생이었어요. (웃음) 그리고 어찌나 타자 속도가 빠른지 제가 엄청나게 떨었어요. 여기 한국 아이들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자격증을 따면서 스펙 관리를 하는 거죠. 근데 아이 때는 놀아야 하지 않아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하면 나이든 저 같은 사람은 어쩌나요. (웃음)
진행자 : 과열된 면이 없진 않죠. 사실 10년전 만 해도 스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주 사용됩니다. 스펙이 중요해진 이유, 취업난 때문일까요?
이정민 : 근데 제가 회사 사장이라도 직원을 뽑을 때 똑같이 두 명의 지원자가 있으면 둘 중에 자격증 있는 사람을 뽑겠어요. 너무 나쁘게만 볼 건 아니에요. 다만 안타까운 건 서류상에 올라있는 경력, 스펙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풍토입니다. 서류상으로만 보지 마시고 인간성도... 물론 이건 제가 스펙이 없으니까 드리는 말씀이고요. (웃음)
진행자 : 두 분은 스펙을 위해 뭘 하시나요?
지철호 : 토요일마다 토플 공부합니다. 아직 2학년이라 부담은 없지만 겨울 방학부터는 서서히 운전면허 1종 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도 등록해야 하고 서서히 부담감이 밀려옵니다. (웃음)
진행자 : 이제 준비해야 할 때네요.
이정민 : 저는 좀 다르게 하려고요. 누군가는 영어나 컴퓨터 같은 스펙을 위해 시간을 보낼 때 저는 어느 곳에서 꾸준히 봉사를 한다든지 저의 인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스펙보다는 사회를 배우는 경험을 쌓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앞으로 기업도 그런 식으로 가지 않을까요?
진행자 : 북쪽도 스펙이라는 게 있죠? 어떤 게 스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정민 : 그럼요. 있죠! 1위 당원, 2위 군대 다녀와야 하고 대학 졸업해야 하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출신 성분입니다. 내가 어느 줄기에서 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죠.
진행자 : 그럼 남쪽에서는 뭐가 중요한가요?
이정민 : 영어, 학력, 경력... 어떤 회사에서 인턴을 해봤나, 어느 대학 출신인가... 이런 것이요?
진행자 : 스펙에 집안 환경이 들어갈까요?
이정민 :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정말로... 그거 하나는 진짜 남쪽이 좋다고 생각해요. 이력서에 우리 부모가 시골 출신이란 걸 밝히지 않잖아요? 북쪽은 이력서는 없지만 무리 배치하면서 각 개인에 대한 정보가 따라 간다고 해요. 그리고 거기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 '부모'란인데요. 부모가 당원이냐 아니냐, 조부모가 당원이냐... 출신 성분이 중요한 거죠. 여기는 그런 건 없잖아요. 스펙이라는 게 본인의 능력을 보는 거니까요.
진행자 : 그런데 남쪽도 돈이 있으면 스펙 쌓는데 유리한 점도 있잖습니까?
이정민 : 부정할 순 없죠.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경제력도 뒷받침 돼야하고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일하면서 공부하면 아무래도 스펙 쌓을 시간이 없죠. 그러나 무료로 하는 데도 많아요. 저희도 학원에 다니면 무료로 다니는데요? 거기 보면 대학생 반이나 직장인 반도 있어요. 국가에서 반 정도 지원을 해주고 또 야간반, 주간반이 나뉘어져서 잘 활용하면 길이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진행자 : 사실 북쪽에서 온 탈북 청년들도 아무 것도 없는데 혼자서 스펙 쌓고 있는 셈인데요. 어때요, 북쪽에서 왔다는 게 스펙에 도움이 될까요?
이정민 : 제가 가진 제일 큰 스펙입니다. (웃음)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했잖아요. 제 스스로가 뿌듯해요. 다른 자격증 열 개 못지않은 인생 자격증이라고 생각해요. 북한에서 왔다고 주눅들 필요 없고요. 만약에 청취자 여러분들 중에서 이런 부분이 고민이시하면 절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철호 :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두 체제를 다 경험해 봤다는 건 큰 스펙이 맞지 않을까요?
인터넷 검색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기업, 구글은 남쪽뿐 아니라 세계 젊은이들한테는 꿈의 직장입니다. 이 회사의 입사 시험이 특이한데요. 이런 걸 물어본답니다.
엔지니어에게는 '1부터 10,000까지 8은 모두 몇 개 나오나?', 디자이너에게는 '1000층짜리 건물을 짓는데 엘리베이터 즉 승강기의 층수 표시 단추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천편일률적인 스펙만 갖고는 이런 시험을 통과할 순 없겠죠? 남쪽 기업도 스펙보다는 열정과 끼, 경험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추세입니다. 사실 남쪽 학생들의 스펙 쌓기... 너무 과열돼서 부작용도 많은데요. 철호 씨, 정민 씨와 얘기를 나누고 보니 오히려 내가 쌓는 내 스펙이 인정되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부모의 스펙보다는 내 스펙이 더 중요해야겠죠.
강을 넘고 세 나라의 국경을 넘어 남쪽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온 탈북 청년들의 스펙 점수... 제가 회사 사장이면 큰 점수를 주고 싶은데요. 청취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청년들의 스펙 점수는 남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면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그대> 오늘은 스펙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 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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