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북한 강원도 출신으로 한 번의 강제 북송과 재탈북 끝에 제3국행에 성공해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탈북자 김영민(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진서 기자가 캐나다 토론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일요일 교회 찬송가
캐나다 토론토의 한인교회. 이렇게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수천 명의 한인교포들이 교회서 종교모임을 갖고 또 한 주간의 못 나눈 이야기에 정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들 중에는 캐나다에 입국해 난민 인정을 받은 김영민 씨 가족도 있습니다. 교회는 갓난아이들이 있는 가족을 위해 따로 방을 마련해서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대예배당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중계해 주고 있습니다.
3살 된 딸과 이제 갓 돌 지난 아들 그리고 아내. 김 씨는 중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을 들었다며 기자와의 만남을 반가워했습니다.
김영민: 자유아시아방송이 탈북자 문제 특히 중국에선 탈북자의 이동경로에 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정보를 줬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를 많이 줬습니다.
탈북하기 전부터 외부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고 말하는 김 씨에게 어떻게 외부 소식을 라디오로 듣게 됐는지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고등중학교 때인 시절로 기억을 더듬어 갑니다.
김영민: 라디오가 북한에서 공식으로 입수된 것이 아니고 그때 적지 물자라고 남한에서 보낸 것을 받았습니다. 담배도 있고, 음식도 있고, 식료품도 있고,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북한의 실정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충전기도 넣어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모험을 했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을 때라 산에 갖다 놓고 듣곤 했습니다. 나중엔 아버지에게 들켜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김 씨가 북한을 탈출한 때는2005년. 북한의 생활이 어려워 더는 못살겠다 싶어 무작정 탈출했다고 말합니다.
김영민: 결정적인 계기가 그냥 더는 못 참겠다, 밖에 대한 동경심도 있었고 해서 죽더라도 자유를 보자!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보자 해서 탈북을 했습니다. 함경북도 무산에 갔는데 도강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단 중국에 가면 북한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강을 건넜습니다.
2005년 강원도에서 무산까지 통행이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김영민: 통행증, 거기 말로는 여행증명서라고 하죠. 많은 사람이 공민증은 가지고 다니지만, 여행증은 제한적으로 나와서 가진 사람이 많질 않습니다. 특히 국경지역은 뻘건 줄이 간 것을 다시 발급 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이동은 그냥 화물차 타고, 열차도 타고 해서 국경까지 한 일주일 걸렸습니다.
김 씨가 무산을 간 이유는 그곳에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산은 중국과 거래하는 사람도 많고 잘 사는 사람은 아주 잘 산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김 씨는 친척의 도움을 받고자 먼 길을 갔던 겁니다. 하지만 친척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도 살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났던 겁니다. 다시 발길을 돌려 빈손으로 강원도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김 씨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두만강을 넘습니다.
탈북해 중국에서 하는 생활이 쉽지 않을 것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가 맞부닥친 현실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다녀야했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집은 마련할 방도가 없어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남자들은 산에서 토굴생활도 하고 하는데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김영민: 저도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돈이 있었던 것도, 특수한 신분도 아니었으니까요. 일단 처음에는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안전하고 먹을 것이 있고 그런 것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조금 나아지면 돈도 있어야겠다. 어디로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지만 당장 가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거긴 우리 같은 북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안주고 부릴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과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중국 시내에 있었나요?
저도 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인은 같이 있었나요?
네.
2년 동안 도움을 받을 사람을 못찾았던 겁니까?
못 찾았습니다.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너희는 일해라, 그럼 숙식을 제공한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농사도 하고 약초도 캐고 하마장(개구리 양식장)에서도 일했고요.
2년간 중국에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은 계속 들었습니까?
김영민: 아주 중요합니다. 중국에선 북한에 대한 뉴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탈북자 문제는 아예 다루질 않죠. 우리가 가장 필요한 정보는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살 수 있는가인데 그런 정보를 라디오에서 접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선 그런 정보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과 미국의 소리 방송은 지금도 중국에선 인기가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씨는 국경과 그리 멀지 않은 중국 화룡시 인근의 산에서 토굴 생활을 했습니다. 토굴에 대해 좀 설명하자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산에 땅을 파고, 그 안은 잠자리에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한 임시 거처입니다.
김 씨 가족은 이렇듯 살기 위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식량이 떨어지면 마을로 내려가 노동일을 하고는 품삯을 받아 쌀로 바꿔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김 씨는 중국 공안의 불심 검문에 걸려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그때 다시 본 북한을 김 씨는 생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김영민: 자기 조국은 모두에게 중요한데 북송당하는 사람은 다 조국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분명했습니다. 조국이 우릴 버렸으니까. 북한에 가선 우리를 부르는 호칭이 달랐습니다. 구타도 있었고요. 북한 사람이 치사한 것이 돈을 찾자고 완전히 이를 잡듯 사람을 뒤집니다. 남자는 돈을 먹고 들어가고 여자는 뽐뿌 운동(앉았다 일어섰다 반복하는운동 )이라고 시킵니다. 임산부는 특히 박대가 심합니다. 남의 중국 종자를 옮겨 왔다고 혹독하게 다룹니다. 중국에선 찾기도 힘든데 이, 벼룩이 득실대고 식사도 부실합니다. 북송된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다시 탈북합니다. 그 사람들은 탈북자 딱지가 찍혔고 더 살기가 어려우니까 나오는 겁니다. 제가 산 강원도에선 도강이나, 탈북자라는 말도 모릅니다. 간첩 취급을 받죠. 그러니 다시 탈북을 하게 하는 거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듯 김 씨는 청진역에서 농포 집결소로 호송되던 중 극적인 탈출에 성공합니다.
김영민: 열차로 청진까지 왔고, 70명 정도를 호송하는데 북한에 기름 사정이 나빠서 한 줄로 세워 묶어 갔습니다. 수갑도 없어서 신발끈을 풀어서 묶었습니다. 전 수갑을 찼는데 바늘로 풀고 도망쳤습니다. 도로 한 가운데로 갔는데 사람들이 손가락질해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난 사람을 죽인 것도, 도둑질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반역자 취급을 했습니다.
김 씨는 이미 북한 수갑을 푸는 방법을 다른 이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기회만 엿보고 있던 김 씨. 어떻게 바늘 하나를 이용해 수갑을 풀 수 있었을까?
김영민: 북한 수갑이 허술합니다. 안에 보면 톱니가 맞물리게 돼있는데 그 사이에 옷삔을 넣고 잡아당기면 풀립니다.
자유의 몸이 된 김 씨는 다시 죽을 힘을 다해 뜁니다.
김영민: 강철공장 담벼락이 2미터 정도 됐는데 뛰어넘어서 달렸습니다. 입에서 단내가 났습니다. 한 5분 정도 뛰었는데 쫓아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수갑을 함께 찾던 옆 사람은 한손에 수갑을 하고 있었죠. 족쇄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남의 집에 물을 먹자고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등잔불을 켜자면 옷핀이 꼭 있어야 합니다. 심지를 올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바늘을 훔쳐서 족쇄를 풀어주고 그 사람과는 갈라져 도망했습니다. 그것이 2005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김 씨는 보위원의 모습을 뒤로 하고 그 길로 다시 두만강을 넘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유를 찾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영민 씨가 한국이 아닌 캐나다를 선택한 이유와 함께 캐나다에서 하고 있는 생활을 자세히 들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