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기자가 보도합니다.
서 씨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2002년 1차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중국에서 4년 반 정도를 살다 고향 마을로 잡혀 왔는데 그가 목격한 것은 더 한심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서 씨:
놀랐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나는 (김정일 정권이)많이 변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 종국에는 김정일 정권 안 되겠다. 타도하던가 외국으로 나가던가…
서 씨의 고향인 함경북도 백암에는 당시 금방 나무를 베고 개간한 땅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노력만 하면 살 수 있었고 농장의 곡식을 도둑질해 먹기도 참 좋았다고 서 씨는 회상합니다. 사람들이 백암 마을에 가면 먹고 살기가 수월하다, 그곳에 가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정확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서 씨는 말합니다.
서 씨:
배급 안 주는 것은 같고,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다른 데서 흘러들어 온 사람이 백암에 많았습니다. 청진, 김책 쪽에서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함남도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는데 옛날에는 없었는데 우리 사는데 밀 자동 수확기(탈곡기)가 짚 무더기를 만들어 놓으면 그 안에 들어가 살고 또는 산에 움막을 짓고 겨울을 나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미 집에서 키우는 개조차 배부르게 먹고 사는 중국이란 세상을 경험했던 서 씨는 북한서 살 수 없었습니다. 1년 3개월 정도 기회를 보다 재탈북했고 다시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겨우 일 년여 만에 북송을 당해서 혜산 보위부 감옥을 거쳐 고향인 백암으로 갑니다. 그리곤 절망도 충격도 아닌 담담한 마음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환상은 1차 북송 때 전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서 씨의 이런 마음은 백암마을 사람들도 같았습니다.
서 씨:
두 번째 와서 보니까 사람들이 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첫 번째 탈북해서 잡혀갔을 때 정부에 의존하는 사람이 백에 열 명이었다면 두번째 강제북송 돼서 갔을 때는 정부에 의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라에서 배급 주겠거니 하는 생각은 없고 그저 장사로 또 뙈기밭 농사로 살아가자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 밭의 것을 도둑질해야 내가 산다. 북한에서 말하는 얘기가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 승냥이고 여우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다 굶어 죽었다고 얘기했습니다.
변화는 북한 상부에서가 아니라 인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밑으로부터의 변화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북한 당국에선 잘살아 보자고 경제관리 개선 조치도 시행할 때고 부분적으로 텃밭의 이용과 추가 생산된 곡물에 대해선 개인에게 준다고 할 때였지만 그런 당국의 정책은 실생활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림의 떡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주민의 생활은 힘들어졌고 인심은 각박해졌으며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심해졌습니다. 서 씨는 2004년2차 북송을 당해 목격한 보위원들의 행패를 이렇게 말합니다.
서 씨:
그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또 우리 사람이 장사하거나 타지역에서 쌀하고 물물교환 하러 오면 그 사람들을 단속해서 쫄쿱니다(뇌물을 받습니다). 원래는 경찰이 하는 일인데 보위원들까지 나서서 그런 일을 합니다.
백암 장마당에선 청진 쪽에서 가져오는 공업품과 술, 수산물을 감자나 넝마 등과 물물교환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하고 순박하던 농촌마을은 이제 타지에서 온 사람들과 당원들의 횡포로 예전의 모습을 잃고 낯선 마을로 변해버렸었다고 서 씨는 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