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남북한 젊은이 독일을 가다]③ 독일에 울려 퍼진 남북한 젊은이들의 통일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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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남북한 젊은이들의 2011년 통일연습 '도이칠란트를 가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통일은 허공에 뜬 단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자신이 또는 아버지가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아는 당사자입니다.

남북한의 젊은이들과 이들을 인솔한 기성세대가 말하는 "남북통일을 염원" 보도에 이진서 기자입니다.

송민희

: 우리도 멀지 않아 이렇게 머지않아 화합하는 시간이 오겠구나 하는 기대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이칠란트는 동서로 갈라졌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통의 아픔보다는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가 있습니다. 도이칠란트의 분단 과정에서는 남북한처럼 형제끼리 총칼을 들이대지도 않았고 분단 이후 가족이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아픔도 덜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서독은 서로를 무조건 인정했고 상대국에 대사관을 설치했으며 제한적이었지만 인적왕래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남한 청년 백석현 씨입니다.

백석현

: 남한이 북한을 지원해서 경제수준을 맞춘 다음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없애자고 어릴 때는 단순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50년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 가치관 등을 모두 바꾸자면 평생 몸에 베어버린 습관이 있는데 어떻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겠어요?

남한의 기성세대는 젊은이들보다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 동독 정권의 비밀경찰 문서보관실인 슈타지 아키브에 갔을 때 그들끼리는 통하는 대화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슈타지 아키브에서의 대화: 여기 보니까 조사한 사람도 자기만 알지 종합적으로 분석을 못하는 겁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합쳐서 보는데 일한 사람은 자기가 한 것 외에는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지기들끼리도 정보를 교류 못하게 한 것 같아요...

1990년 도이칠란트의 통일 소식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랐겠지만 그중에서도 전쟁을 경험하거나 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잠시 충격에 빠집니다. 남한은 발 빠르게 통일 사무관을 서독에 급파했고 이유는 달랐겠지만 북한도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1990년부터 3년간 독일 통일의 과정과 민족통합의 상황을 남한 본국에 보고했던 신덕수 교수입니다.

신덕수

: 재밌는 것은 (고위 관리를)첫 번에 만났을 때 신 선생, 신 선생이 지금 날 찾아왔는데 이미 북한 정부 관계자들과 타이완, 대만 사람이 벌써 다녀갔습니다. 어떻게 독일 민주공화국이, 동독이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했는가? 그 체제가 자기들과 똑같은 처지라고 볼 수 있는데 자기들이 미연에 교훈을 얻어가기 위한 것이었겠죠.

기자: 통일 이후 동독 지도부가 다시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까? 거취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신덕수

: 동독의 경우는 수상, 당서기장으로부터 말단까지 다 퇴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자: 정치 복귀의 여지가 없었습니까?

신덕수

: 여지가 없었죠. 서독에서 모든 행정인력 즉 지도 인력이 파견 됐습니다. 하부조직이랄까? 기관장 주요 간부는 서독에서 간 사람이 했고 나머지는 동독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유한다면 북한이 동서독처럼 통일 된다면 주요직들이 다 퇴진한다고 볼 수 있겠죠.

도이칠란트의 통일이 결코 아무런 희생 없이 차려진 것은 아닙니다.

(리콜라이 교회 앞): (당 창건 기념일 행사 후)고르바초프가 베를린을 떠났을 때 대모를 막는 비밀경찰이 이들을 아주 잔인하게 제압하고 잡아들였습니다.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모 경찰이 특별히 모자를 쓰고 방패를 들고 개를 데리고 데모를 막았습니다.

(베를린 거리의 노래)

남북한 젊은이들은 도이칠란트가 이룬 통일을 현지 사람들로부터 직접 듣고 그 현장을 답사할 때마다 한반도 상황과 도이칠란트를 비교하며 과연 어떤 교훈을 얻어갈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김예영

: 너무나 달라요. 지금 독일의 통일은 우리나라에서 절대 적용되기도 힘들고...

전일구

: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디서 나와서 시위를 했을까? 이 사람들은 깨어있었구나..

송민희

: 북한이란 얘기가 나오고 통일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지 않을까?

(베를린 거리의 노래)

그러나 남북한 젊은이들을 인솔하는 기성세대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이제 망설이고 막연히 생각하던 한반도 통일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목소리를 냅니다.

유관지 목사

: 참가자들의 마음속에 통일의 염원을 새롭게 심어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구윤회 목사

: 남북한 젊은이들이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땐 서로 어색해 했는데 일주일 동안 같이 살고, 먹고 사면서 서로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구나 하나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이관우 목사

: 불과 10분,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분단이란 이름으로 형제, 자매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현재 안고 있는 아픔이고...

이수봉 단장

: 통일은 안 가본 길을 가는 것이고 미래의 길을 가는 것인데 특히 안 가본 길을 걸어갈 땐 다양한 의견과 가치가 혼재할 수 있거든요. 이럴 때 우리가 휘둘리지 않고 건강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자세. 통일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통일을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고...

(교회 종소리/찬송)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린 인구 50여 명의 뫼들라로이트 마을, 동독 사람들이 한민족임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가게 표현의 자유를 키워줬던 리콜라이 교회. 그리고 구 동독의 비밀경찰 문서 보관실과 작센하우젠에 있는 유태인 포로수용소.



유성민

: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느꼈고 정말 얇고, 포클레인 한 대면 다 무너트릴 수 있는 저 장벽이 어떻게 사람과 마음을 갈라놓을 수 있었는지...


탈북여성

: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자기 권리를 얘기하지 못하는 북한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팠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반세기가 넘게 풀지 못한 민족통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남북한의 젊은이들은 도이칠란트 이국땅에서 7박8일 동안 통일이란 단어를 놓고 시간과 세대를 뛰어넘어 또 하나의 작은 역사를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교회 종소리)

MC: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남북한 젊은이들의 2011년 통일연습 ‘도이칠란트를 가다’ 취재 보도에 이진서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