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국주의 침략자 동무
지난 3월 말 저녁.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 앞의 한 맥줏집이 수업을 끝낸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탈북민 대학원생 이현승 씨도 학과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현승 씨와 같은 과에서 재학 중인 미 해병대 장교 제임스 브라운 씨는 한국 포항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근무했습니다.
[제임스 브라운]미군으로 북한의 위협에 대해 많은 시간을 걱정하며 보냈기 때문에 처음 현승을 만났을 때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웠습니다.
북한 인민군으로 복무했던 현승 씨에게 브라운 씨는 ‘미 제국주의 침략자’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날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에선 전혀 적대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임스 브라운] 한때 저는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있었고 현승이는 DMZ 북쪽에 있었습니다. 같은 기간 서로에 대항해 훈련을 하기도 했구요. 그렇지만 지금은 현승이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현승 씨는 북한식 특목고인 평양외국어학원 출신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자원입대해 3년 3개월간(2002년~2005년) 인민군에서 복무했습니다.
[이현승] 17살 때 북한 인민군에서 3년 4개월 동안 군복무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4군단에서 시작했고, 그 다음에 인민군 총참모부 직속 작전국 15격술연구소에서 제대를 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특수부대로 지칭되고. 임무는 조선인민군의 주체 격술, 주체 타격법 등 사격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부대였습니다.

군복무를 결심한 배경에는 북한 당국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이현승] 보통 북한에서도 '남자는 군대를 꼭 경험해야 된다' 이런 사회적 통념이 있어요. 그리고 또 저도 이제 사실 군을 한번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요. 그렇게 많은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군에서 이제 봉사하는 것이 국가와 인민에 대한 봉사라 그런 것을 계속 배우잖아요.
다음 날 오전컬럼비아 대학교 문구가 새겨진 남색 후드 티를 입은 현승씨는 미군 출신 친구 어거스트 골드 씨와 유창한 영어로 토론 중입니다.
[이현승]우리는 북한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중에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등 반미 선전을 엄청나게 교육받았는데, 미군에서도 그런 교육이 있었는지 궁금해.
[어거스트 골드]내가 기억하기로는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교육은 없었어. 북한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고, 오래된 장비를 사용한다는 등의 교육만을 들었을 뿐이야.
친구와 헤어진 이후에도 현승 씨는 북한에선 강력한 반미선동을 경험했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이현승] (북한에선) 우리 조선전쟁이라고 하죠. 미군이 6.25 전쟁 때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식으로 배우죠. 그런 근데 이제 미국은 특히 미국 사회에서는 전혀 북한에 대한 사상교육이 없어요. 북한 혼자서 혼자만의 세상에서 사는 거에요. 미국이 우리(북한)을 어떻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말 불쌍합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미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불렀던 그때가 꽤나 억울했나 봅니다.

엘리트 간부 자녀의 인민군 생존기
이날 저녁 현승 씨는 취재진을 기숙사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컬럼비아 대학 근처에 위치한 한인마트 ‘H 마트’ (H-mart)로 향합니다.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현승 씨의 기숙사. 프랑스 유학생, 미국인 등 2명의 대학원생과 함께 주방 거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낡고 오래됐지만, 건물은 유럽식 스타일로 고풍스러워 보입니다. 승강기에 나무로 미닫이 문도 달려있습니다.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자 식료품을 내려놓고, 주방용품들을 꺼냅니다. 야채를 손질하는 현승 씨의 모습이 보입니다.
현승 씨가 근무했던 부대에는 지정된 취사병이 없어, 병사들이 돌아가며 음식을 했습니다. 당번이 되면 보통 30명, 많게는 70~80명 분의 요리를 해 본 적이 있어 이 정도 요리는 자신이 있어 보입니다.
[기자]주로 어떤 메뉴를 했나요?
[이현승]보통 재료가 없으니까 고정된 메뉴(를 했었죠) 무 볶음, 배추 볶음, 된장하고 버무린 거, 염장, 절인 무 그리고 국, 밥이었죠.

돼지고기, 두부, 고수 등 재료들을 집는 현승 씨의 손놀림이 능숙합니다.
부글부글 찌개 끓는 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가 부엌 너머로 들려옵니다.
40분 가량이 지나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얼큰한 찌개 냄새가 기숙사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내온 음식은 북한식 두부 김치찌개와 한국식 돼지갈비.
요리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한층 편안한 모습으로 취재진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북한 최고위층인 노동당 39호실 간부의 맏아들로, 어려움 없이 컸던 현승 씨는 난생처음 겪는 열악한 군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이현승] 군대에 처음 들어갔는데 이제 고기가 없으니까 먹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한 번은 지휘관한테 말을 해서 반나절 외출 받았습니다. 제가 있었던 곳에 아는 분이 있었어요. 아버님 산하에 계신 분이요. 그래서 거기 가서 고기를 구하러 갔었죠. 겨우 돼지고기 3kg인가를 이제 얻어 왔었습니다. 반년 만에 처음 고기를 그렇게 먹었었어요. 그때 그러지 않으면 북한에서 군에서 고기 먹는다는 거는 거의 상상도 못 할 일이죠.
그러나 군 생활을 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현승] 4군단에서 이제 군 복무를 했었는데 그러니까 전기가 그때 당시에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저희도 보통 어떤 때는 하루에 한 번도 전기를 1시간도 전기를 못 본 적이 많아요.

미국이 북한에 ‘자유의여신상’을 선물하는 날까지
하루는 현승 씨가 뉴욕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취재진을 맨해튼 남쪽에 있는 베터리 공원 선착장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곳에서는 1886년 미국 독립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으로 프랑스가 선물한 자유의여신상을 볼 수 있는 유람선을 탈 수 있는데요.
갑판에 오르자 브루클린 다리는 물론 자유의 여신상, 뉴욕 맨해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현승 씨, 시원스레 강바람을 맞습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자유의 여신상은 여객 운송 항구에 위치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이민자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아메리칸드림’을 품었다고 합니다.
곧 대학원 졸업을 앞둔 현승 씨는 생각에 잠겨있습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란 그가 최대 적국이라고 배워온 미국에서 정착할 거란 예상을 했을까?
[기자] 미국에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현승]꿈에도 생각을 못 했죠.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 있었는데 어떻게 갈지 모르니까 막막했었죠.

자유를 위해 북한을 떠난 현승 씨에겐 ‘자유의 여신상’이 주는 의미는 남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 미국에 오니 어떤 점이 좋으세요?
[이현승]미국은 마음 졸이거나 조심해야 되거나 이런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항상 어떤 말을 해도 조심해야겠다. 행동을 해도 보위부나 이런데 걸리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하잖아요. 특히 영화 같은 것을 볼 때 너무 편안해요. 너무 통제가 없으니까 오히려 안 보는 것 같고. 북한에서는 통제가 있으니까 너무 보고 싶고. 소소하지만 자유가 있는 것하고 없는 게 많은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시청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노동교화형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이같은 통제가 더 자유를 갈망하게 하고 이로 인해 탈북까지 한 이들도 꽤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을 강요받는 인민군이었던 그가 이제 미국에서 북한의 자유를 외치는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이현승]북한에서 자유를 몰랐을 때는 소중하다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있어 보니까 없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포기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다른 북한 주민들도 자유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승 씨는 프랑스가 미국에 ‘자유의여신상’을 선물했던 것처럼 언젠가 북한에도 자유가 찾아오는 날 미국이 북한에 ‘자유의여신상’을 선물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
자유와 기회의 도시 미국 뉴욕 맨해튼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중인 탈북민 남매가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 취재진은 4박 5일 동안 뉴욕을 방문해 이들의 생활을 밀착취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