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사무국에서 차로 약 10분 떨어진 한 호텔 로비.
오전 7시를 막 넘긴 이른 아침 시간, 10명 가량의 사람들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모여 있습니다. 일부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 손에 각각 종이가 들려 있는데, 몇 명은 준비한 연설문을 반복해 읽어보기도 합니다.
그 중 남색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계속 휴대전화를 보며 빽빽한 일정표를 지웠다썼다 반복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 션 정 ] 좋은 아침입니다 .
제대로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하루를 시작한 그는 캐나다의 북한 인권 단체 ‘한보이스’의 션 정 대표입니다.
[ 취재진 ] 오늘 일정인데 , 막바지 변경이 많은가봐요 ?
[ 션 정 ] 조금 그러네요 . 한 그룹이 두 시간 안에 일본 , 호주 , 영국 , 리히텐슈타인과 회의를 마쳐야 해요 . 다른 그룹은 같은 시간에 알바니아 , 네덜란드 , 그리고 한국과 회의를 합니다 . 한국과의 회의에는 특히 대사님이 참석하시기 때문에 저희 대표인사들이 참석했으면 해서 그룹을 섞고 있었어요 .

13명의 북한 인권 연합 대표단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유엔 회원국들과 만나 북한 인권에 대해 논의하는 일정을 꼼꼼히 살펴보는 중인데, 이날 하루에만 7개 이상 국가들과 회의가 연달아 잡혀 있습니다.
[ 션 정 ] 이번 유엔 인권이사회 회기에는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에 대한 논의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북한 인권은 관심 밖일 수밖에 없어요 . 매년 발의되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은 기본적으로 그 전년과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례대로 국가들이 비공식적 회담을 갖는 게 다죠 . 그런데 올해에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 시작했습니다 .
정 대표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발표 10주년을 맞아 올해 북한인권결의안에 지난 10년 간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를 담은 포괄적인 북한 인권 보고서를 추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 2023년 11월부터 회원국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그는 말합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리나 윤 선임연구원과 한국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신희석 법률분석관 등도 이번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 제네바로 날아왔습니다.
그만큼 제네바에서 후회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은 정 대표는 다른 사람들이 아침을 먹는 와중에도 일정표만 들여다보다 곧바로 유엔 회의장으로 향합니다.

[ 션 정 ] 유엔 회의장 시간 맞추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예요 . 유엔에서는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아무도 시간을 지키지 못합니다 . 그래서 앞에 있는 행사가 보통 늦게 끝나고 우리 행사도 늦게 시작될 수도 있는 거예요 . 근데 우리한테는 좀 센 사람들이 많아서 , 리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서 ' 회의장 써야 하니 나가 ' 라고 요구하겠죠 .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 조금 더 부드러운 편이죠 .
코로나 대유행이 끝나고 북∙중간 국경이 다시 열리면서 중국 내 탈북민 북송이 재개된 가운데, 이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포함해 북한 인권 실상을 더 많은 회원국들에게 알리는 것이 정 대표의 바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 회의에서 가장 기대하는 건 지난 해 10월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탈북민 김철옥 씨의 언니 김규리 씨와 지난해 5월 어선을 타고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탈북한 일가족 중 한 명인 김 모씨(신변보호를 위해 익명요청)의 증언입니다.
역대급 관심과 호응에 ' 북 인권 개선 ' 기대감 상승
유엔 제네바 본부의 한 회의실.
[ 션 정 ] 전 세계 약 100 개국 500 여 단체를 대표하는 20 개의 시민사회 단체 연합을 대표해 여러분을 이 행사에 초대하게 돼 영광입니다 . 연합을 대표해 , 15 개 공동 후원 국가들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 이는 지난 10 년간 이사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지지 표현이라고 믿습니다 .
이날 행사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중국 대표의 참석이었습니다. 중국 대표는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발언까지 요청했습니다.
특히 중국 대표가 “탈북민들은 불법 이민자로서 강제송환금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북한에서 대규모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자 정 대표는 침착하되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합니다.
[ 션 정 ]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위성사진 등을 통해 ( 북한의 문제가 ) 무엇인지 알고 있고 , 지금 북한은 암흑의 시대를 보내고 있지만 , 밝은 날이 올 겁니다 .
회의가 끝나자 정 대표는 행사를 공동 후원해 준 15개 국가들의 대사,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며 올해 북한인권결의안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 션 정 ] 이전 북한인권결의안에 비해 이번 결의안은 훨씬 야심찰 것이라는 점에서 정말 기쁩니다 .
회의에 참석한 각 국가 대표들도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부대 행사에 중국 대표 가 참석한 것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입을 모읍니다.
[ 주제네바 캐나다 대표 ] 재밌는 상황이죠 . 잘못이 없다면 이런 발언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 그들이 ( 중국 ) 뭔가 방어를 해야 한다고 느낀 거 같아요 .
[ 주제네바 유럽연합 대표 ] 지난 주에 ( 결의안을 ) 조금 더 강력하게 추진할 기회가 있었어요 .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
알바니아 대사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회의를 하고 싶다며 정 대표를 찾았습니다.
[ 션 정 ] 행사 후 알바니아 대사는 너무 감동을 받고 곧바로 회의를 요청했어요 . 그녀는 탈북민들에게 '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 상황이 어둡고 절망적일 때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 알바니아도 어둡고 절망적이었지만 , 상황은 변할 수 있고 , 변할 것 ' 이라고 말했습니다 .
이후 다른 유엔 회원국 대표들과의 마라톤 회의부터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의 만남까지, 아침부터 한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지막 일정을 마친 정 대표는 얼굴이 많이 핼쑥해졌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듯 웃어보입니다.
여러 회원국들이 “그간 참석한 유엔 인권이사회 부대 행사 중 최고였다”는 말을 전했다며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합니다.

[ 션 정 ] 행사 이후에 12 개 회원국과 만났는데 , 그들의 말투가 변했습니다 . 작년 3 월과 11 월에 가졌던 만남에서는 ' 뭐가 바뀌는 것인지 , 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 물었는데 , 이번에는 이렇게 물었어요 . '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우리가 이 상황을 돕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 라고요 . 그리고 탈북민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를 묻더라고요 .
휴먼라이츠워치의 리나 윤 선임연구원도 하루 일정을 마친 정 대표에게 건넨 첫마디는 ‘기쁘다’였습니다.
[ 리나 윤 ] 정말 기뻐요 . 이번 행사는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 제가 지난 10 년간 유엔 부대 행사를 많이 다녔는데 이렇게까지 회원국들과 인권단체들이 관심을 두고 많이 참석한 행사는 처음이에요 .
회의에 동참한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신희석 법률분석관도 빽빽한 일정에 힘은 들었지만, 이번 활동이 앞으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며 기대감을 내비쳤습니다.
[ 신희석 ] 그동안 북한 인권 단체들이 걱정했던 게 'COI 이후에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줄어든 것 같다 ' 는 건데 , 이번에 부대 행사를 계기로 다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 ' 성통만사 ' 가 주최하는 부대 행사 등과 북한인권결의안을 통해 새로운 북한 인권 운동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오후 내내 구름이 가득했던 제네바의 하늘은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정 대표의 하루 끝에 일곱 빛깔을 띤 무지개를 선물했습니다.
[ 션 정 ] 정말 신기한 거 보여드릴까요 . 살몬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회의 후 다 같이 단체사진을 찍는데 창밖에 호수 위로 무지개가 떴어요 . 우리 부대 행사 제목이 ' 북한 주민들을 위한 새로운 여명 ' 이었는데 , 준비했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무지개를 보다니 . 아주 환상적인 날이네요 .
그들의 활동이 마무리 될 무렵, 올해 북한인권결의안 초안이 공개됐습니다.
결의안에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에게 2014년 COI 보고서 발간 이후 10년이 지난 상황에 대한 후속 보고서를 제 60차 인권이사회에 제출하고, 확대 상호대화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추가됐는데요.
그로부터 약 3 주 후인 4월 4일, 제 55차 인권이사회가 막을 내리기 하루 전, 북한인권결의안이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채택됐습니다.
한국에서 17 시간을 날아온 이유
며칠 뒤, 제네바 중심부의 레만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한 호텔의 복도 끝에서 급한 걸음걸이의 구두 소리가 들려옵니다.
[ 이신화 ] 안녕하세요 .
호텔 입구에서 제네바를 찾은 이신화 한국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해 17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이 걸렸지만, 이 대사는 시차 적응도 하기 전에 곧장 유엔 정기회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유엔 정기회의에서 할 발표문, 제한된 시간에 최소한의 단어로 충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발표문을 읽어보며 수정을 반복합니다.
[ 이신화 ] 제 상호 대화 발언에는 북한 내부 주민들의 인권 문제 , 탈북민의 안전 , 강제송환 방지 , 해외 노동자 문제 , 전시 전후 납북자와 억류자 , 송환되지 않은 국군 포로 문제를 언급했고 또 올해 11 월에 북한이 보편적 정례 검토 (UPR) 를 해야 하니까 , 이를 충실하게 이행했으면 좋겠다고 촉구했고요 .
이 대사는 정기회의에 참석하기 전, 유엔 인권이사회의 북한 인권 관련 부대 행사에 참석해 줄리 터너 미국 북한인권특사,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함께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연설했고, 이 행사에서 김규리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강제 북송을 두 번 경험한 지명희 씨의 증언이 이어지자, 김규리 씨는 북송된 여동생이 떠오른 듯 눈물을 흘렸고, 행사장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 이신화 ] 언제 들어도 막 가슴이 먹먹해요 . 아까 오랫동안 인권 단체에서 일했다는 분도 막 눈물을 글썽이며 나가고 , 김규리 씨는 이번에 강제북송된 600 명 중에 한 명이 ( 이분의 ) 여동생인 걸로 알고 있거든요 . 그분도 고개 숙여서 참고 울다가 나가는 거 보니까 나도 눈물이 나려고 그러더라고요 . 우리가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신화 대사가 2022년 7월 임기를 시작하고, 2023년 10월에는 오랜 기간 공석이던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자리에 줄리 터너 대사가 임명되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북한 인권을 대표하는 두 여성이 제네바 인권이사회에서 만난 첫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 줄리 터너 ] 이 대사와 호흡이 꽤 잘 맞아요 . 저희는 좋은 친구예요 .
[ 이신화 ] 너무 좋아요 . 유일한 문제는 줄리는 이미 굉장히 키가 큰데 하이힐을 신어요 . 하이힐을 신기에 아직 젋죠 . 근데 그러기에 제가 나이를 많이 먹었어요 . 오늘은 저도 좀 하이힐을 신어봤는데 여전히 당해낼 수가 없네요 .

이 대사와 터너 대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의 목표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 이신화 ] 우리는 특히 지난 10 월에 강제 북송된 탈북민들에 대해 매우 공통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공동 성명 발표 등 함께 협력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 줄리 터너 ] 저도 방금 말씀하신 북한 난민 문제에 대한 공동 약속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이동한 후에도 북한 사람들이 직면하는 끔찍한 상황을 계속해서 강조할 겁니다 . 중국에서도 두려움과 억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회원국에게 강제송환금지 원칙을 준수할 것을 촉구합니다 . 이제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할 때입니다 .
김정은 북한 총비서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인권 행사를 마친 이 대사가 곧바로 향한 곳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나다 알-나시프 유엔 인권최고부대표를 만나 유엔 차원에서 북한 인권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북한의 주요 인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신화 ] 인권 문제는 물론 북한 문제도 그렇지만 , 우크라이나 또는 가자 지구 문제가 터지고 나서 해결하려면 힘드니까 ' 예방을 했으면 좋겠다 ' 라는 얘기를 하면서 , 북한 인권과 안보도 동전의 양면처럼 굉장히 중요하다고 전했습니다 . 특히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이 아무리 화강암으로 된 곳이라 해도 , 지하 핵실험을 6 차례나 했잖아요 . 7 번째도 언제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폭의 위험이 있을 수 있잖아요 . 그 얘기를 했더니 굉장히 관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 북한 인권 문제는 여전히 ' 우리들만의 문제 '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 어떻게 좀 더 국제화 할 수 있는가 ' 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
이 대사는 현재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네바 일정을 위해 미리 수업을 녹화해 두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잠을 줄여가며 ‘비상근 무보수 직책’인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로 활동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이신화 ] 벌써 거의 2 년 가까이 하다 보니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 같아요 . ' 내가 왜 이 일을 하나 ' 라는 걸 생각해 볼 때 , ( 북한의 ) 김정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 북한 주민은 당신의 노예가 아니고 , 그 사람들도 기본적인 권리가 있고 당신이 한 이런 일들은 분명히 책임을 져야 되는 일이며 분명히 우리가 책임 규명을 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하는 거 같아요 . 하지만 매우 힘듭니다 .
이 대사는 김정은 북한 총비서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이내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사랑과 용기, 희생을 담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온 ‘민중의 노래’였습니다.
[ 이신화 ] ' 여전히 북한 주민들은 우리의 한 민족이고 소중한 사람이고 , 그래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고 또 우리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기체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
제55차 유엔 인권이사회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 지난 3월 15일부터 시작된 북한 인권에 관한 논의에서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발표 10주년과 함께 탈북민 강제 북송 문제가 핵심 의제였습니다. 또 이 자리는 강제북송 피해자와 가족들, 북한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각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함과 동시에 중국, 북한 대표부와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진 현장이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같은 이유와 목적으로 제네바에 모인 탈북민과 인권 단체들의 7박 8일간 여정을 동행 취재하며 이들의 흘린 눈물과 땀의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