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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사망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장이 남긴 유산에 대해 한반도 전문가들과 서방언론은 하나같이 학정과 빈곤을 꼽습니다. 37년 간의 무자비한 독재통치로 정치범수용소의 울타리에 갇혀 짐승처럼 연명하고 있는 주민들은 수십 만 명이 넘고 선군정치로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은 백성은 수백 만 명을 헤아립니다. 학정과 기아를 피해 북한을 탈출한 주민도 매년 늘어나 수십 만 명에 이릅니다. 이 시간에는 김정일의 실정이 초래한 탈북사태에 대해 전수일 기자와 살펴 봅니다.
엠씨: 김정일의 실패한 국가운영과 탈북사태의 증가의 연관은 단순한 통계로도 알 수 있다고 하셨죠?
전수일: 그렇습니다. 한국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93년 입국 탈북자는 불과 8명이었지만 1994년 52명으로 여섯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바로 그 해가 김일성주석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국정을 도맡아 하게 된 때입니다. 그 뒤로 매년 탈북자의 한국 입국 수는 늘어나 1999년에는 처음으로 백 명을 넘어선150명정도가 입국했고 2000년에 312명, 2002년에 1139명, 2009년에는 2927명, 급기야 2010년 10월에는 한국에 들어간 탈북자의 누적 수가 2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올 11월 말 현재 한국 내 탈북자는 2만3천명 선입니다.
엠씨: 탈북자가 지난 17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주된 이유는 역시 북한의 장기화된 식량난 때문 이겠죠.
전: 그렇습니다. 탈북자 10명중 8명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압록강 두만강을 도강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식량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김정일이의 잘못된 정치로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매년 10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해 이를 외부세계의 원조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그 해 11월 김정일은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하겠다고 선언하자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은 에너지와 식량을 공급하기로 합의 했는데 1998년에는 대포동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고 2002년에는 그 동안 몰래 우라늄농축 핵 개발을 추진한 것이 드러나 외부의 대북지원이 중단됐죠. 외부 식량지원이 미미하거나 끊긴 상태에서 2005년에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에 대포동 2호 시험발사, 1차 핵실험을 실시했고 2009년에 2차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더욱 조여지고 지원식량이 바닥나면서 주민들의 굶주림은 점점 악화 일로를 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주민들의 기아는 이른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의 소산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엠씨: 백성을 굶기는 정권에 주민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겠죠. 하지만 단순히 굶주림 이유 말고도 김정일 체제의 폭정 때문에 고향을 등진 탈북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전: 맞습니다.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치범수용소에서 짐승같이 살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용소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수령독재체제의 미래에 희망이 없음을 알고 탈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북조선에서 김일성종합대학교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을 역임했고 주체사상의 대부로 알려진 황장엽 씨, 그리고 김정일의 전 처 성혜림의 조카 ‘리일남’ 씨, 또 김일성 종합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였다가 한국에 망명해 올해 6월 탈북자로서는 최 고위직인 ‘통일교육원장’에 오른 조명철 씨가 있겠고, 정치범수용소에서 탄압을 받았던 인물로는 회령 요덕 15호 관리소 출신의 강철환 김영순 씨, 또 평안남도 개천 14호 관리소 출신의 신동혁 씨를 들 수 있습니다.
엠씨: 방금 언급하신 분들은 한국 내 탈북자 사회에서는 제일 많이 알려진 분들인데요,
황장엽 전 비서는 1997년 2월 중국을 방문하던 중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들어가 전격적으로 한국에 망명한 북한 최 고위 탈북자로 유명하죠?
전: 그렇습니다.
엠씨: 저희 방송국을 방문한 적도 있잖습니까?
전: 그렇습니다. 2003년 10월 말, 한국 망명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미국 의회 지도자들과 만나고 며칠 뒤인 11월 초에 저희 방송국을 찾아와 저희가 단독 회견을 했었습니다.
엠씨: 인상에 남는 그 분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전: 탈북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탈북자는 김정일 정권의 붕괴와 남북통일에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이라고 강조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청취자들을 위해 당시 황 전 비서 회견이 일부를 들어 보기로 하죠.
//황장엽// “우선 탈북자라고 한다면, 독재체제의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은 희생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제제에 대한 반인민성을 절실히 체험했으며, 나와서 바깥생활을 보고 민주주의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탈북자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입니다. (독재, 민주주의) 북한에도 많은 인맥이 있고, 탈북해서 한국 내에서,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도 새로운 인맥을 맺었고요. 따라서 이들을 김정일 체제 붕괴나 남북통일에 있어서 아주 귀중한, 유능한 존재로 봅니다.”
엠씨: 황장엽 씨의 망명 얘기를 듣다 보니 성혜림의 조카 ‘리일남’씨의 암살사건이 생각납니다. 리일남 씨는 신변안전을 위해 한국에서는 가명을 사용했죠? ‘이한영’이라고.
전: 맞습니다. 우연하게도 리일남 씨가 서울 근교 아파트에서 북한 공작조에 암살 당한 날은 1997년 2월 15일 입니다. 황장엽 씨가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걸어 들어간 지 사흘 뒤에 피살됐죠. 그래서 황 씨는 나중에 이런 회고를 했다고 합니다. ‘리일남을 암살한 건 당시 한국총영사관에 망명해 있던 내게 경고를 주려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리일남에 대해 잠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정일의 전 처 성혜림은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의 어머니이고 리일남은 성혜림의 친언니 성혜랑의 아들입니다. 스물두 살에 프랑스에 유학하러 가는 도중 스위스 제네바에 들러 거기의 한국 공관에 들어가 망명했습니다.
엠씨: 성혜림 얘기를 들으니 그의 친구였다는 김영순 씨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네요. 성혜림과 김정일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로 북한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9년 수감됐다 풀려났다죠?
전: 그렇습니다. 원래 성혜림은 북한의 유명한 여배우였고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유부녀였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성 씨가 마음에 들어 남편과 이혼하게 하고 3년 간 동거를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김정남이죠.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친구 김영순 씨가 이유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잡혀간 것이죠. 김영순 씨가 저희 방송 회견에서 밝힌 얘기 들어 보죠.
//김영순// “1989년도에 평양에서 내려온 고위 간부가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가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것을 다시 말할 때에는 용서치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성혜림 때문에 요덕에 갔구나 확인했습니다.”
엠씨: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한국 내 탈북자 사회는 들떠있는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전: 그렇습니다. 한국 내 탈북자 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접촉해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절대 독재자 김정일의 사망으로 통일이 앞당겨 질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통일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 니다. 한국에 들어간 탈북자 중에서 박사학위를 처음 땄고 세계북한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안찬일 소장의 말입니다.
//안찬일// “북한 급변사태와 통일에 탈북자들은 결정적 역할을 하기 위해 준비해 왔습니다. 북한의 재건, 북한에 대한민국체제를 이식하고 혼란을 수습하는 건 북한 실정을 잘 아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북한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오늘입니다.”
이들은 통일 후 북쪽사회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심어 주고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 단순히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탈북자 모두가 실력 있고 잘 살고 성공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결의를 보였습니다. 물론 탈북자사회의 그런 노력을 뒷받침하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탈북자 지원정책도 따라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엠씨: 네. 지금까지 김정일 통치가 초래한 탈북사태와 김정일 사망 이후 탈북자사회의 역할에 대해 전수일 기자와 알아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