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국군과 함께한 화교 의용군들

서울 국립현충원의 외국인 묘소에 마련된 화교 참전용사 강혜림의 묘비. ‘의백장존’이란 글씨가 적혀있다.
서울 국립현충원의 외국인 묘소에 마련된 화교 참전용사 강혜림의 묘비. ‘의백장존’이란 글씨가 적혀있다. (/ RFA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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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백장존’

‘화교(華僑)’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해 현지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인, 또는 그 자손을 뜻합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약 7만 명이 넘는 화교가 살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200명이 넘는 화교가 자발적으로 한국군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계급이나 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는데, 당시 많은 화교가 적진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하다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참전 의무가 없는 이들이 청춘과 생명을 바친 이유는 자유국가인 남한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참전 화교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더운 날.

푸른색 지붕의 현충문 옆에 높이 매달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입구에 채 들어서기 전, 저 멀리서부터 줄지어 서 있는 비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묘비에는 누군가에게 불려졌을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태극기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습니다.

16만 5천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이중 외국인은 세 사람입니다. 이름도 생소한 위서방, 강혜림 두 화교 참전용사의 유해가 외국인 묘소에 모셔져 있습니다.

[김육안] 매년 우리가 (현충원에 와서) 참배를 하는데 감회가 깊죠. 나라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이 모든 것이 전쟁에 대한 참상입니다 . 보기에는 여기에 깨끗하게 모셔져 있지만, 전쟁 그 당시에는 참혹하고 잔인하지 않습니까. 지금 다른 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참혹한 광경을 보면, 다시는 그런 상황을 만나기 싫습니다.

화교 참전용사 아버지를 둔 왕성민 씨는 사방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줄지어 서 있는 묘비들을 바라보며 잠시 할 말을 잃습니다.

[왕성민] 전쟁은 참담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여기에 계신 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자유국가에서 활동하며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하고, 이분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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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참전용사 위서방, 강혜림의 묘를 참배하는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의 김육안, 왕성민, 류대길, 나국위 씨.(왼쪽부터) / RFA photo

200명이 넘는 화교 참전용사 중 이곳에 안장된 유해는 두 사람뿐입니다.

[김육안] 아쉽죠. 여기에는 ‘외국인 묘소’라고 쓰여 있고요. 이 두 분(위서방, 강혜림)은 가족분들의 노력으로 외국인 신분으로서 외국인 묘소에 모시고 있지만, 2000년대 당시 제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한국에) 귀화했지만, 현충원에 전우와 함께 모실 수 없다고 했어요. 자리가 없다고. 그때 당시에는 ‘왜 안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류국화 용사의 아들 류대길 씨도 묘비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류대길] 친아버님은 전사하셔서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류국화 (양)아버님도 사실 이런 자리에 모셔야 하는데, 우리 후손들이 너무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서 ‘이제라도 다시 해봐야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와서 보니 ‘그래도 아버지 후손으로서 내가 이 일을 나서서 해야 되겠다. 같이 못 온 사람들이 있으니까’는 생각이 들어요.

강혜림의 묘비에는 ‘의백장존(義魄長存)’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의로운 넋은 오랫동안 남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화교 참전용사의 아들들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왕성민] 답답한 마음이 있죠. 지금도 우리 아버지가 헌신해서 자유국가를 지켜 싸웠는데, 한국 역사에서는 우리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죠. 다른 바람은 없고, 후손들에게 사실대로 ‘화교들도 6.25 당시 자유국가를 위해 참전했다’는 그 한 가지를 알렸으면 합니다.

[김육안] 지금 현충원에 참전용사 두 분이 모셔져 있잖아요. 옛날에 두 분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모아서 현충원에 안장해줬고, 또 외국인 묘역이라는 것은 이미 국적을 초월한 겁니다. 그 후에 우리가 가서 접수해도 아직까지도 ‘외국인, 외국인’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면 현충원에 ‘외국인 묘역’을 왜 만드는 겁니까. 그 점에서 좀 아쉽고.

아버지(위서방)를 현충원에 모신 위모황 씨도 같은 마음입니다.

[위모황] 당연히 저의 아버님과 강혜림 부대장이 서울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영광입니다 . 그런데 아버님과 부대장이 현충원에 안장된 모든 공로는 부대원의 희생 덕분입니다 . 그들의 희생이 헛되이 흘러가지 않도록 , 그들의 희생에 대한 기념비를 설립할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동족상잔의 역사

남과 북이 서로 총을 겨눴던 한국전쟁은 중국인에게도 같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지금 대만에서 살고 있는 왕대정 씨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으로 강제 징집돼 한국군과 싸웠습니다.

[왕대정]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아주 고통스러웠지요. 그때는 10대였고, 아이였으니까요. 전쟁터에 있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살아남을 의욕은 없었지만, 다치는 것이 가장 두려웠지요. 다리 한쪽을 잃으면 걷지도 못하고,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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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10대 나이에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왕대정 씨 / RFA photo

군 복무 시절에 찍은 사진 속 청년은 이제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패인 80대 노인이 돼 있습니다.

[왕대정] 전쟁은 힘든 일이에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요. 목숨값은 목숨으로 갚는 일이에요. 내 운명은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에 달린 거예요.

왕대정 씨와 같은 사람들의 반대편에는 자발적으로 한국군에 합류했던 화교 청년들이 있었고, 위서방 ‘한국반공애국청년단’ 단장이 이들을 이끌었습니다.

지금 대만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위모황 씨는 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또 꺼내 봅니다.

[위모황] 제 가 보기엔 아버님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제일 중요한 이유는 , 그 당시 공산당이 행한 모든 참상을 봤고, 자신도 국민당 국부군의 일원으로서 자유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그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지켜왔던 신념이 바로 자유, 민주, 평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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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이끈 화교 참전용사 위서방 단장의 아들 위모황 씨가 아버지가 받은 훈장과 포장증을 꺼내 보고 있다. / RFA photo

훈장을 바라보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가 전쟁에서 느꼈을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를 다시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위모황 ] 전쟁이 아버님의 삶에서 빼앗아 것은 당연히 젊은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그리고 제일 희생은 가족이었겠지요 . 아버님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형제들 , 부모님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 생각에 아버님이 ( 전쟁에 참전하면서 치른 ) 제일 희생은 가족을 잃고 , 자신의 청춘을 잃고 ,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힘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억의 지속] (6) 의로운 넋은 오래 남는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분쟁의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RFA는 망각(忘却) 대신 ‘기억의 지속’을 통해 이들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취재 :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 웹페이지 제작 : 김태이

내레이션 : 양윤정

더빙 : 이진서, 김진국,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 뢰소영

참고 자료 : KBS, SBS, YTN, AP

제작 : RFA

  • 취재에 응해주신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의 김육안, 나국위, 류대길, 왕성민 씨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