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당국은 지도자의 위상을 훼손하거나 반대하는 자, 기독교를 믿는 자 등 체제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포함 그 가족 3대를 사회와 완전격리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외부세계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라고 부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세계 어디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6번에 걸쳐 방송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지옥의 수용소’ 편입니다. 진행에는 이진서 기잡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의 증언)
김영순: 그 가마니 거적 데기에 널도 차려지지 않는 운명, 연좌제로 끌려가서 무슨 ...뽕나무에서 떨어져서 팔도 못 쓰는데 강냉이 밟으러 나오래 밤에 그러면 한손으로 ..그게 굴욕이라 그거야. (김영순, 15호 관리소 구읍리, 용평리(완전통제구역), 1970-1979년 수감)
강철환: 어릴 때는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그때는 굉장히 미웠죠. 그런데 제가 철이 들면서 할아버지는 죄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됐어요.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웁리, 1977-1987년 수감)
김혜숙: 아직 우리 동생은 올해까지 44년째인데 죄목이 뭔지 몰라요. 거기 들어가면 첫째 조항이 너희는 죄를 묻지 말라 하니까요.(김혜숙, 18호 관리소 봉창지구 1975-2001 수감)
탈북자 3명의 연속 증언을 들었습니다. 첫 번째 여성은 올해 78살의 김영순 씨입니다. 김 씨가 정치범 수용소에 간 이유는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과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한 비밀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김영순 씨를 포함한 일가족 8명을 요덕에 보내 9년 동안 감금했습니다.
두 번째 증언자는 강철환 씨입니다. 강 씨는 북송된 재일교포 3세로 평양에서 태어나 9살 때 할아버지가 숙청당하면서 연좌제에 걸려 10년간 가족과 함께 요덕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마지막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평양에서 살다가 13살 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북창 18호 관리소에 끌려가 28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김혜숙 씨입니다.
이들 세 명이 말하는 공통점은 억울하게 긴 세월을 강제노동을 하며 죄인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재판도 없이 끌려갔고 언제 석방이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고통과 공포심은 더 컸습니다.
고인이 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1956년 발생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에서 시작됩니다. 북한 정권은 북한 전역에 ‘관리소’를 갖추고 혹독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주민들이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 평안남도 북창군 소재 득장광산에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공포의 정치범 수용소는 탄생합니다.
1970년부터 79년까지 요덕 수용소를 체험한 김영순 씨입니다.
김영순: 말할 새도 없고 다른 사람 볼 새도 없고 그것이 지옥이야. 노동 강도가 세고 밤에까지 일하고, 밤에 서리가 내리면 경비대가 종을 쳐요. 그러면 전체가 이불을 들고 나가서 영양단지에 덮어야 해요. 벤츠 타고 다니면서 당에 배려 속에 멋지게 살던 사람들이 다 거기 왔거든 그러니까 그야말로 생지옥이란 말이지. 기약할 수 없는 날 그리고 아침 3시 반에 일어나 나가야 하고 벌목공은 나무 자르다가 잘못 넘어지면 사지가 꺾어지고 치어서 죽고. 독풀, 독미나라, 독버섯을 배가 고파서 먹고는 죽고 펠라그라 걸려 죽고요. 펠라그라 걸리면 통옥수수 먹었던 것이 항문이 열려 그냥 싸요. 그래서 죽었던 시체로 길을 메워도 과언이 아닌 것이 요덕 수용소의 참상이에요.
북한의 관리소 즉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들어보면 얼핏 연상 되는 것이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 그리고 구소련의 집단 수용소인 굴락(Gulag)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이들 수용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종연구소 오경섭 연구위원입니다.
오경섭: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정치범과 그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해서 가족 3대를 일정한 산간지역에 격리 시키는 겁니다. 이곳에는 정치범들이 주거하는 주택이 있고 개인은 공동으로 생활하는 주택에 수용하며 집단적으로 수용소 규칙에 따라 생활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노동 하러 가는 출근 시간이 있고 퇴근 시간이 있고요. 이런 일정한 규칙과 규율에 의해서 수용소 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대부분 산간지역에 있지만 청진의 수성 수용소처럼 도시에 건물을 지어 운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금시설이 있는 위치가 어디가 됐건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기 어렵습니다.
오경섭: 왜냐하면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 관련 정보는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고 철저히 비밀리에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정치범 수용소의 명칭을 군부대로 위장해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치범 수용소 출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고 확인이 됐는데 대부분 정치범 출신은 요덕 수용소입니다. 그래서 다른 수용소의 출신의 증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증언했던 것이 안명철 씨입니다. 안명철 씨가 북한에 이런 수용소가 몇 개 정도 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을 보내는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편의상 정치범 수용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곳의 명칭을 내부의 논리에 따라 표기하며 실체를 감추고 있습니다. 관리소 경비병 출신 안명철 씨입니다.
안명철: 정확한 명칭은 ‘조선인민 경비대 00군부대’ 이렇게 돼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경비대 지시를 안 받고 국가보위부 직속이에요. 특수부대라고 보면 되요. 인민군 전체 병력에도 우리가 포함이 안돼요. 밖에선 인민경비대라고 하는데 안에서는 그냥 경비대라고 해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7국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는 북한 주민들은 ‘특별독재대상구역’ 또는 ‘이주구역’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울타리로 둘려 쌓인 수용소의 경비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안명철: 한 개 수용소를 지키는 무력이 한 2천명 가까이 됩니다. 보위부 경비대를 다 포함해서요. 22호 관리소는 5만 명을 수용했는데 본부에 두 개 중대가 항상 예비대로 폭동이나 진압용으로 있고 외곽에는 각 중대별로 초소가 있는데 6개 중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공중대가 또 따로 있고요.
기자: 한 개 중대 인원은 얼마나 되나요?
안명철: 중대 인원은 140-150명되죠. 그래서 경비대 무력만 1천 200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1995년부터 4년 6개월을 요덕에서 생활한 이영국 씨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는 매일 정해진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보위원들이 강하게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있다고 말합니다. (이영국, 15호 관리소 대숙리. 1995-1999년 수감)
이영국: 먹는 것은 옥수수를 아주 조금 줘요. 그리고 못먹는 배추 떡잎을 주워서 소금에 절인 것을 끓여 국으로 만들어 주고 그것을 먹고 살아야 해요. 먹는 것을 그렇게 주니까 먹고 한 시간 지나면 배가 고파요. 영양이 부족하니까 배는 나오고 살은 빠지고 한 시간 지나면 더 배고프고 그러면서 도급을 주는 거예요. 김을 매라고 하면 풀 하나 없이 다 하고 또 그것을 못하면 저녁에 들어와서 밥을 절반으로 자르는 거예요.
또 다른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 강철환 씨는 1977년부터 10년간 할아버지가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가족 3대가 모두 사회와 완전 격리된 혁명화 구역에서 생활을 했던 경우입니다. 강 씨는 수용소 내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읍리, 1977-1987년 수감)
강철환: 많은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누군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 이렇게 선전을 하고 얘기를 하니까 그것을 믿지만 아이들이 커서 자기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알게 되거든요. 많은 집안에서 가장들이 그런 식으로 몰려 죽은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른들의 밥을 빼앗아 굶어 죽기도 하고요. 가족 폐륜행위가 일어나는 거죠. 어떤 경우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가족과 수용소에 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집안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몰아붙여서 아버지가 거의 죽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보니까 그게 아닌 거죠. 수용소란 것이 그런 죄를 지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수용소에 수감해서 아이들이 죄를 지은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 북한만 가진 굉장한 반인륜적 범죄 중 하나라고 봐요.
연좌제로 수용소에 수감된 아이들은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 하며 만약 수용소에서 태어난 생명이 있다면 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정말 기적적으로 정치범 수용소를 나왔다고 해도 다시 예전의 평범한 삶을 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요덕 수용소 체험자 이영국 씨입니다.
이영국: 나왔을 때는 세상이 허무하죠. 옆에 사람이 다 싫어지고 사람 만나기도 싫어지고 잠이 들면 자꾸 악몽을 꾸면서 사람이 과격해 지고. 그걸 고치자고 약을 먹는데 약을 먹으면 늦잠을 자서 일을 못해요. 내가 나온 지 17년 정도 됐는데 완치가 안돼요. 나는 이성을 잃지 말자 해도 잠을 못자니까 약을 먹게 되고 약을 먹으면 힘이 없어 생활에 지장이 있으니 술을 먹고 자는 일이 많아요. 악몽을 안 꾸려고요. 사람은 싫은데 강아지는 좋아요.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나요. 조금만 있으면 불안하고 그러면 화장실 가서 울고요. 그런 악몽이 영원히 지워질 것 같지는 않아요.
MC: RFA 특집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오늘은 '지옥 같은 수용소' 편이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편을 방송합니다. 진행에는 이진서 기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