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미북 이산가족 특집] ② 나의 살던 고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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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 : 미국에 사는 한인 이산가족은 고국을 떠나 이국에 정착해 살면서 북한에 둔 가족과 상봉하는 꿈을 70년 넘게 감춰야 했습니다. 이제 여든이 넘고 아흔을 넘겨가는 이산가족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가을 나무에 매달린 낙엽 같은 심정으로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배경 음악>

(나레이션) RFA 미북 이산가족 특집, "보고싶다. 누이야"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나의 살던 고향은'입니다. 제작, 진행에 김진국 기자입니다.

< 배경 음악 >

(김진국)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한 한국 식당이 북한이 고향인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붐빕니다.

(김진국/현장 녹음) 한인 이산가족들로부터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고 싶은 사연과 미국 정부에 바라는 점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진국) 10여개의 식탁에 나누어 앉은 참석자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며 반갑게 안부를 나눴습니다. 40명 정도 모이자 '이북5도민회' 정광일 회장이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나서 5살에 남한으로 피란했고 1970년대 미국에 온 후 지난 20년 동안 도민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정광일) 멀리 워싱턴에서 우리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 후 우리대로 모임 하겠습니다. 박수로 환영합시다.

(김진국 ) 어떤 분들이 모이셨는지 알고 싶은데요, 마흔 분 정도 되시는데, 북한에 사시다가 남한으로 이동하신 분? 아 거의 전원이시네요.

(정광일) 이산가족 1세대라고 하면 한국전쟁 발발하고 1950년 12월에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1951년) 1·4후퇴 시점이 이산가족 1세대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1951년과 1952년에는 출산이 거의 없어요. 전쟁통이니까.

(김진국) 지역별로 볼께요. 황해도 출신이신 분들은요?

(정광일 ) 우리 회원 중에 황해도가 280명 정도되고 평안도가 250명 그리고 다른 지역이 150명씩 정도됩니다. 황해도 출신이 가장 많습니다.

(김진국) 오늘 모인 분도 황해도가 가장 많아 보이네요.

< Atlanta Song >

(김진국) 미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애틀랜타에 이산가족 1세대가 많이 거주하는 이유는 은퇴 후 정착하기 좋은 조건들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영일/애틀랜타 중앙일보 논설위원)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고 물가도 쌉니다. 애틀랜타 공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라는 점, 서부 LA 이어서 다음으로 큰 한인 타운이 형성돼 있다는 점도 한인 어르신들이 은퇴 후 정착하는 이유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LG, SK 등 130개 정도 한국 기업들이 있어서 미국에서 한국과의 교류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 배경 음악 >

(정원영)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그 여인을 누구가 모르시나요?

(김진국) 1932년생으로 아흔이 넘은 정원영 할아버지는 고향 생각나는 노래를 청하자 망설임없이 구성지게 부르셨고 고향집 주소를 번지 수까지 기억했습니다.

(정원영)황해도 황주군 벽석리 57번지. 1·4후퇴 때 부모님 못오시고 나만 남으로 내려왔어요, 고향가서 거기서 죽고 싶지요. 내가 불효 막심한 놈이죠. 거기서 안내려오고 엄마하고 아빠하고 같이 살아야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줄 몰랐죠.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됐지요. 이산가족들 지금 다 죽어가고 있잖아요. 1초가 급해요. 다 죽어가잖아요.

(김진국) 86세의 이경백 할아버지는 평양시에 살다가 12살이었던1950년 12월 부모님과 함께 남으로 내려왔지만 평양에 남은 큰 누이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경백)누나가 나보다 10살 위였거든요. 내가 87이니까 누나는 97이겠지. 살아있겠어요? 한국에 있을 때 한국방송(KBS)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는 방송을 했는데 그때 나도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연락이 없었어요. 방송국 앞에 직접 가서 찾아보기도 했었요. 누나가 아주 예뻤어요. 그래서 시집도 일찍 갔죠. 사돈네가 평양 그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였기 때문에 숙청 당했을지도 모르죠. 미국 정부가 보내준다면 고향에 꼭 다시 가고 싶어요.

< 배경 음악 >

(김진국)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피란과 추방, 군입대 등 수 백만 명이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가족 이별의 대부분은 전쟁 직전이나 초반이었다고 스테판 헤거드(Stephan Haggard)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는 설명합니다.

(스테판 헤거드)북한은 미국의 군사 개입과 남한 군대 전력이 약했던 시기인 1948년에서 1950년까지 국지전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이 시기 북에서 남으로의 피란이 시작됩니다. (출처: 제이슨 안, DIVIDED FAMILIES)

(김진국) 중국의 참전으로 1950년 후반기 유엔군이 북한에서 퇴각합니다. 1·4후퇴로 불리는 이 시기, 북에 살던 많은 민간인들이 유엔군의 퇴각로를 따라 남으로 이동했습니다. 일주일이나 길어야 3주면 될 줄 알았던 이별이었지만 어느새 70년이 넘었습니다.

< 배경 음악 >

(김진국) 이날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는 아흔 넷 목사님이었습니다.

(김세희) 제 이름은 김세희입니다.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금당동 500번지입니다. 고향 동네에 은흥관이라고 조선 시대 때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 머물렀다는 곳이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나라가 지은 국립 호텔이죠. 거기를 다시 가고 싶어요.

(김진국) 김세희 목사는 죽기 전 가족 상봉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며 눈물을 삼키며 기도했습니다.

(김세희)미국까지 와서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남북을 하나되게 하여 세계사적인 민족의 과업을 미국의 한인이 앞장서는 역할을 하게 하심으로 믿습니다.

(김진국) 애틀란타 이산가족들은 모임을 끝내며 미국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엽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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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87세) 할아버지가 미국 국무부 쥴리 터너 북한인권특사 지명자에 이산가족상봉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엽서를 쓰고 있다. /RFA Photo

(배경음악/ 고향의 봄)

(나레이터 낭독)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고향 땅을 찾아 보는 것이고 그리운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가는길이 해결될 수 있기를 바라며 언제인가는 그날이 찾아 오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사일)

"사랑하는 대사님, 살아오는 동안 처음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대사님, 대단히 반갑고 마주앉아 대화하는 것 같은 뜨거운 마음으로 대사님게 저희들의 희망을 말씀드립니다. 하루속히 남과 북이 하나되기를 소원합니다. 대사님 화이팅" (김군자)

"대사님, 남편의 염원입니다. 고향 영상이라도 보았으면" (김봉수)

"고향 소식, 지도라도 보고 싶습니다. 미 적십자사를 통해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합니다." (한석)

(김진국) 이산가족들은 이날 작성된 엽서와 미국의 다른 지역 사연을 더해서 국무부에 전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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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란타 이산가족들이 미국 정부에 도움을 호소하며 쓴 엽서. /RFA Photo

(배경음악)

(나레이터) 지금까지 RFA 자유아시아방송 <<미북 이산가족 특집 “보고싶다 누이야”>> 제2편, ‘나의 살던 고향은’을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이시간에는 제3편 ‘나의 살던 고향은’ 편을 전해 드립니다. 제작, 진행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진국 기자입니다.

기사 작성 김진국,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