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7.27정전 기획특집: 서울과 평양을 통해 보는 남북한 주택건축 변천사]② 김일성 시대 vs 박정희 시대 / 1960~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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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한국전쟁 전정 기획 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분단 상태에 있는데요. 각각 서로 다른 체제 하에서 살림집도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1960년대부터 1979년까지 남북한 살림집의 변화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도움 말씀에는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네 명의 전문가 나와 있습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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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신규철 건축사,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옥종호 교수, 이가 ACM 건축사 사무소 이종석 사장.

기자: 1960년대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 도시를 만드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는데요. 어떤 특징들을 보이는지 차상욱 대표께서 설명해 주시죠.

차상욱 대표: 간단히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특징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핵심적인 원칙 하나를 들자면 도시의 확대에 엄격한 한계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주거공급 방식에 나타나는 특징은 '주민의 이동범위를 주거단지 안에 가둬둘 수 있는 단지계획'과 '평등을 가시화하는 단위공간의 획일성'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특징들은 '미크로라이온'이라 부르는 소련시절의 주거배치 방법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 시기에 공급된 도시형 저층공동주택은 속도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탈린카' 방식 대신 일명 '후르쇼프카' 방식이 도입된 사실도 주목할 만합니다.

기자: 그러니까 북한은 구 소련과 비슷한 형태의 도시를 건설했다는 말인데요. 이종석 대표께서 부연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이종석 대표: 북한 건축이 이런 영향을 받게 된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선언 이후 도시계획에 대한 이념이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거대한 도시를 반대'하고, '도시재개발에 대한 부정', '도농의 통합'이라든가, '국가가 개입하여 도시를 계획한다'고 되어있는데 러시아의 주요도시와 평양과 같은 곳은 이러한 원칙이 많이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적용한 내용을 보면, 주거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업장과 주거를 철저히 분리한다든가, 사회주의적 공동생활의 기초단위로 소구역을 설정하여 직주근접의 원칙이 적용되고 도심부는 이념 학습의 장소로서 상업 업무시설 대신 공공시설과 기념광장 등으로 구성한다든가 교통은 개인 승용차보다 지하철, 무궤도 전차와 같은 대중교통에 의존하는 방식은 러시아나 이미 공산화되었던 동구권이나 평양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기자: 1960년대 남한에는 아파트가 많이 공급되던 그런 시기 아닙니까? 60년대 초반 살림집 현황은 어떻게 됩니까? 옥종호 교수님.

옥종호 교수: 각종 문화주택, 시범주택 들이 6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공급되고 있었지만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이 가속화되고 또 도시지역의 주택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 주거 사정은 개선되지 못하였습니다. 1961년 서울시의 주택상황을 보면 48만5,000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주택 수는 27만5,000 호였습니다. 주택 부족률은 44.7%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50년대 주택공급은 생존을 위한 구호차원의 조치였었지만 1960년대 들어 정부는 주택부족 문제 해결을 경제정책의 한 부문으로 간주하고 1962년부터 시작되었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주택건설을 포함하였습니다.

기자: 정부가 주도해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때 특징적인 것이 있을까요? 신규철 건축사께서 설명을 해주시죠.

신규철 건축사: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대한민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선보인 마포아파트는 Y자형 건물 6층짜리 6개동에 450 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였는데 서구식 근대건축 개념을 도입한 고급 주거시설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조국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인식되기도 했고 2년 뒤 2차로 일자형 4개동 192세대가 추가 건설되었습니다. 1962년 당시 사회환경으로 봤을 때 수세식 화장실과 연탄 보일러가 있었다고 하면 상류층의 주거건물이었습니다.

기자: 단독주택에 살다가 고층 아파트에 살게 되는 큰 생활의 변화가 있었는데요. 옥종호 교수님 사람들은 당시 아파트에 대해 어떤 반응이었나요?

옥종호 교수: 아무리 정부가 아파트 공급을 통해 주택부족문제를 해결하려 하여도 초기 아파트들은 대단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아파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공동묘지 터를 갈아엎고 동산을 깎아 조성한 대지가 불길하다 하여 꺼리는 정서가 있었는가 하면 또 농경문화에 길들어 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장독을 둘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또 머리 위에 남의 집 아궁이를 얹고 살게 되는 구조에 미신까지 결부시켜 집으로 적당하지 않다며 배척하는 정서가 대두되는 바람에 분양을 하는데 있어 많은 애를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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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건축포럼 제공

기자: 이렇게 남한에서 대단위 건설이 있었을 때 평양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차상욱 대표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차상욱 대표: 북한, 특히 평양은 도시계획을 위한 마스터플랜 위에서 다량의 주택을 공급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됨에 따라 시공방법의 합리성과 경제성을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 대안이 바로 스탈린의 뒤를 이어 권력을 물려받은 '후르시쵸프'가 소련의 주택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데 활용했던 '콘크리트 판넬 조립식 아파트' 였습니다.

일명 '후르쇼프카'로 불리는 이 주택건축 방식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건축 부품들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작은 단위의 주택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대량 공급하기에 유리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표준화'와 '규격화'라는 개념이 북한의 건축공사 전반에 보급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평양은 교통망 확충의 일환으로서 모스크바식 교통체계를 그대로 도입하여 무궤도전차를 개통했고, 지하철을 착공하였으며, 많은 도로를 포장하는가 하면, 모란봉거리, 봉화거리, 붉은거리와 같은 주요거리들을 완공하였습니다.

기자: 북한이 모든 건축물을 빨리 많이 짓는 것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군요. 이종석 대표님.

이종석 대표: 북한은 아직도 건설에 있어서 속도전에 매달리는 것 같은데 이 시기에 한참 속도전이 진행될 무렵 평양시에서는 7천세대 분의 자재와 자금으로 2만여 세대를 건설할 수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고 살림집 한세대를 단 14분 동안에 조립하는 이른바 평양속도가 진행된 적도 있습니다.

기자: 1970년대까지 남북한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경쟁적으로 발전과 안정의 시기를 보이는데요. 70년대 북한주택의 특징은 어떤가요? 차상욱 대표께서 답변을 해주시죠.

차상욱 대표: 70년대는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북한에게 있어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1971년부터 6개년 계획을 세우고 사회주의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중점을 둔 북한은 경공업 분야의 기반을 확충하는 것에서부터 각종 기념비적 건축물의 건설에도 막대한 투자를 쏟아 부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민문화궁전, 조선혁명박물관, 조국해방전쟁기념관, 평양체육관, 만수대예술극장, 4.25문화회관, 만수대기념비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지하철도 일부구간(*천리마선, 혁신선)이 개통되었고, 도로확장과 보수에도 매진하게 되는데, '주택소구역계획'에 입각한 도시주택 건설에는 60년대에 도입한 '조립식 공법'을 확대 적용시켜 나가게 됩니다. 여기에 적용한 공법은 5층 이하에 적용하던 '후르쇼프카' 방식이 아니고 10여층 이상의 고층시공이 가능한 '브레즈네프카'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평양은 도시의 곳곳에 공장이 증가하는 만큼 그에 필요한 노동력의 증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거건축을 통한 수평적 확장과 수직적 확장을 동시에 진행시켜 나가게 됩니다.

기자: 1960년대와 1970년대 북한 살림집 변화에 대해 이종석 대표께서 정리를 해주시죠.

이종석 대표: 북한 살림집에 대한 변화는 양적인 변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요. 현재 북한의 살림집은 모두 합쳐 약 590만호 정도 됩니다. 이중 전쟁 이후 1957년부터 2017년까지 약 530만호를 신규 공급한 것입니다. 이중 대부분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 1993년까지 약 480만호를 공급했으니 90%를 김일성 시대에 건설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기자: 제가 방금 전 안정과 발전을 보인 시기라고 했는데요. 남한 살림집 변화의 의미는 어떤 것으로 정리가 되겠습니까? 옥종호 교수님

옥종호 교수: 1970년도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목표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돌입했을 무렵 입니다. 시골에서는 반만년을 이어온 가난의 굴레를 끊기 위한 노력이 정부가 주도하는 정신운동의 형태인 새마을운동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실효성이 입증되는 국민운동으로 발전되면서 시골에서 한 순간에 초가지붕을 사라지게 만드는가 하면 농촌 마을로의 접근성을 향상시켰고, 주거환경 자체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서울에서는 '시영아파트' 라는 이름으로 서울시가 여러 곳에 걸쳐 2만세대 가량의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주택난 해소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71년에 건설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24개동, 1584세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기자: 외국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다" 할 만큼 극적인 반전을 이룬 시기가 60년에서 70년대입니다. 신규철 건축사가 남한 상황을 정리하면서 이 시간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신규철 건축사: 박정희 시대 주택 상황은 한마디로 발전을 시작한 때입니다. 개별적인 집들도 집의 틀을 갖추어 가고 벽돌과 시멘트 블록으로 집을 지어가면서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그리고 부엌이 입식으로 변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파트가 처음에는 시영 아파트로 시작된 중간 규모의 아파트에서 그 이후 고급 아파트들이 점차 공급되는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반이 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RFA 한국전쟁 7.27 정전 기획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지금까지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였습니다. 진행에는 저 이진서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남북한 살림집의 모습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여러분의 많은 청취 바랍니다.

기사 작성 자유아시아 방송 이진서 에디터,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