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췰란드 통일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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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는 과거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후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경험했는지 남북한 청년들과 함께 통일연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행 취재 오늘은 첫 순서로 도이췰란드 통일이 주는 교훈 편입니다. 진행에는 이진서 기자입니다.

인원확인 : 방준석, 윤체리, 송미향, 김기덕...

도이췰란드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인원점검 중인 남북한 청년들 북한이 고향인 9명의 탈북대학생과 남한 젊은이 15명은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기독교북한선교회와 서울신학대학이 공동 주최하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현장 체험학습에 참가 중입니다.

이들의 첫 방문 국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이념이 달라 40년 동안 갈라져 있다 통일된 도이췰란드.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젊은이들은 정치나 이념 또는 분단과 통일 이라는 주제 보다는 우선 눈에 익숙하지 않는 외국의 풍경에 마음이 자못 들떠 있습니다.

(버스 안 )

청년들을 인솔하는 서울신학대학 박영환 교수입니다.

박영환 교수

: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겸손한 마음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서소. 민족을 기억하게 하시고 통일을 생각하는 귀한 염원이 일어날 수 있도록....

(라이프치히 교회의 종소리)

도이췰란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쪽에는 소련이 점령해 공산정권이 세워지고 서쪽에는 미국과 연합군에 의해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자본주의 정부가 수립돼 동과 서로 갈라집니다.

(신나는 거리의 음악)

이렇게 1949년 서독과 동독이 각각 건국됐지만 스탈린 사망으로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이 느슨해지고 1980년대 들어서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집권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변화의 물결에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힘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독일 주민은 10월 3일 투표를 해서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합 하는 방식으로 도이췰란드는 하나가 됩니다.

(리콜라이 교회 파이프 오르간 연주)

독일의 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평화시위가 시발점이 됐습니다. 특히 리콜라이 교회의 촛불 시위는 전국으로 전파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됩니다. 리콜라이 교회 관리자로 당시 촛불시위에 참가한 뮐러 씨입니다.

현재 리콜라이 교회 관리인으로 구동독이었을 당시 교회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토마스 뮐러 씨. 리콜라이 교회 안에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 리콜라이 교회 관리인으로 구동독이었을 당시 교회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토마스 뮐러 씨. 리콜라이 교회 안에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RFA PHOTO/이진서)


토마스 뮐러: 제 이름은 토마스 뮐러입니다.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났고 평화집회가 열릴 때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었죠.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고 7시가 되면 밖으로 나갔는데 모두는 한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비폭력 시위가 된 겁니다. 1989년 9월 4일 '평화기도회'때는 교회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요. 비밀경찰이 시민들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거리로 행진을 하기 시작했어요. 한 천명은 될 거예요. 사람들은 "슈타지는 물러가라(Stasi raus)!" "여행의 자유를 달라 (Reisesfeiheit)"고 구호를 외쳤죠. 집회는 매주 월요일 있었는데 점점 모이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구호도 '자유'와 '자유선거', '정치범 석방'이었습니다.

당시 동독 교회는 슈타지 즉 비밀경찰의 엄격한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비교적 통제를 덜 받는 곳이었기에 모든 것의 시작은 교회에서부터란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젊은이들이 모여 환경오염이나 인권침해 등 그들의 생각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는 겁니다.

남북한 청년들은 이제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가서 통일 전 동독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서독으로 추방당한 베라 여사를 만납니다. 윤성종 목사입니다.

윤성종: 저희는 한국에서 왔고요. 저희가 온 이유는 통일된 독일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한반도에서도 통일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죠.

베라 여사: 내 이름은 베라 렝스펠트입니다. 통일되기 동독에 살았죠. 인권문제나 통일에 대해 얘기할 때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사람이 와서 함께 토론했습니다. 그 일로 해서 저는 감옥에 갔고 서독으로 추방됐었죠. 탈북자 분들은 이해하실 테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독에서 언어가 같다곤 해도 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당시 서독에서는 동독을 탈출해 온 사람들을 위해 민주사회에 대한 교육과 다양한 지원을 해줘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통일은 북한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힘없고 약하지만 일반 주민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베라 여사의 얘기를 듣고 남북한 청년은 통일을 위해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궁금해 합니다.

구 동독 사람으로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서독으로 추방됐던 베라 렝스펠트 씨. 베를린 장벽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구 동독 사람으로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서독으로 추방됐던 베라 렝스펠트 씨. 베를린 장벽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RFA PHOTO/이진서)



남한 청년: 통일이 되기 전 동독 사람들의 역할과 통일을 원했던 서독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인지요?

베라 여사: 물론 서독도 통일에 대해 얘기를 하긴 했지만 통일을 위해 시위를 한 것은 동독 사람들이었습니다.

(라이프찌히 거리의 음악)

매 시각마다 모든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리고 거리 모퉁이 마다 자릴 잡고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 평온한 모습으로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엄마. 이것은 통일이 된 지금 볼 수 있는 도이췰란드의 평범한 모습입니다.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이번 행사에 참가한 남한학생 이영소 씨입니다.

이영소: 중국에서는 뉴스도 잘 못보고 하니까 그냥 그곳에서 (북한유학생)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한다. 이런 것만 보니까 적대적으로 돼 있잖아요. 북한 친구들과 같이 살아도 북한 친구들과 같이 예배를 드려본 것은 여기서 처음이거든요. 유일하게 못하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여기서 하니까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고 미리 통일을 한 번 느껴보는 것 같았어요.

건축학을 전공하는 이상진 씨는 독일의 통일은 분단 때처럼 강대국에 힘의 논리에 의해 우연히 찾아 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데요.

이상진: 철저한 준비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런 집회를 통해 시기가 맞아떨어졌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의 음악)

독일 주민들은 통일 후 30년 동안 동쪽지역 재건을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데 합의해 통일 분담금을 내고 있다고 현지 안내원은 설명합니다. 통일이후 도이췰란드의 전체 물가는 올랐으며 실업률은 증가했습니다. 공산주의 환경에서 자란 옛 동독사람은 자유화가 된 후 상대적 빈곤감에서 서독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했고 서독사람들은 동독사람을 게으르다고 맞받아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옛날의 분단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독교북한선교회 이수봉 목사입니다.

이수봉: 삶의 현장의 있었던 사람들의 고백은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런 점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줬을 것이라 생각하고요. 그리고 보니까 체제가 변환되고 세월이 가니까 다 적응하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미래를 준비할 때 철저히 준비하면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또 우리가 노력하면 반드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남북한 청년들과 함께 통일연습 도이췰란드 편을 들으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뽈스카와 체코 공산주의 몰락이 주는 교훈을 방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