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수도 런던.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도로에는 승객을 태운 빨간색 이층 버스와 노란색 택시가 분주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취재진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손을 들어 저 멀리에서 오는 택시를 세웠습니다.
중동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택시 운전기사는 취재진이 한국 출신이라고 하니, “From the good one or the bad one?”, 즉 “착한 코리아에서 왔어요? 나쁜 코리아에서 왔어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 기자 ] 북한이 나쁜 코리아인가요 ?
[ 택시 기사 ] 그렇죠 . 북한은 … 국민들이 자국을 떠나는 걸 허용하지 않잖아요 .
이동하는 짧은 시간, 택시 운전기사의 말투와 표정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금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아가는 영국.
그중에서도 약 700명의 탈북민이 정착한 뉴몰든 사회를 영국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뉴몰든의 영국인들
지난 4월 28일, 뉴몰든의 ‘통일주방’에서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위해 비빔밥을 주문하는 영국인 여성을 만났습니다.
갈색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녀의 이름은 지나 씨.
밥 위에 각종 채소가 올라간 비빔밥이 처음인지, 지나 씨는 밥과 재료들을 섞지 않고 그대로 한 숟가락을 떠서 입으로 가져갑니다.
[ 지나 ] 좀 웃긴 이야기긴 한데 , 코로나 19 로 봉쇄됐을 때 한국 드라마를 엄청 많이 봤거든요 , 그러다가 한국 음식에 관심이 생겼어요 . 사실 제가 여기 뉴몰든 근처에 살아요 . 그런데 이 식당에는 오늘 처음 와 봤어요 .
그는 지난 2019년에 방영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재밌게 봤다고 말합니다. 내친김에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 지나 ] 사실 제가 북한에 대해 아는 건 , 한국 드라마를 통한 게 전부예요 . ' 사랑의 불시착 ' 있잖아요 . 그 드라마를 보고 북한에 대해 좀 알게 됐어요 , 그다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라서요 .

그는 뉴몰든이 영국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수백 명의 탈북민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 기자 ] 이 동네에 살면서 한인들과 탈북민들의 차이는 못 느꼈나요 ?
[ 지나 ] 못 느꼈어요 . 저는 런던에서 태어나 자랐고 , 그 덕분에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 자라면서 한국인 친구들도 있었지만 , 남한 사람 , 북한 사람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놀았어요 . 막연히 전부 한국에서 왔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 북한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
그녀는 양손으로 어묵 국물이 든 종이컵을 쥔 채 쑥스러운 듯 웃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지나 씨에게 뉴몰든은 맛있는 한국 음식을 언제든 접할 수 있는 곳이고, 한국인 친구들은 다 같은 ‘코리안 (Korean)’입니다.
낮 12시가 지나면서 통일주방이 분주해집니다.
어느새 가족과 친구끼리 모여든 손님으로 대부분 식탁이 가득 찼습니다.
주방에서 꼬마 김밥을 말고 있던 통일주방의 주방장 이정희 씨가 유리창 너머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 나가 맞이합니다.
통일주방의 단골손님인 영국인 해나 씨, 친구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통일주방에 들렀다고 합니다.

[ 해나 ] 저는 통일주방에 거의 매주 와요 .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하는데 , 이곳이 뉴몰든에서 제일 맛있는 한국식당이에요 .
[ 기자 ] 이 식당이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운영하는 곳인 줄 알고 계셨나요 ?
[ 해나 ] 그럼요 . 갈등이 있는 남북 두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이런 장소를 만들었다는 게 정말 멋져요 .
알고 보니 그녀는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영국의 비영리단체, ‘커넥트 북한’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 해나 ] 탈북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저도 북한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 아직 탈북민들과 한국 사람들의 억양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 사실 생각해 보면 억양이 다른 건 영국도 같아요 . 사투리가 심한 지역도 많고요 . 많은 영국인들이 ( 남북의 ) 차이를 못 느껴요 . 그냥 여기는 하나의 공동체예요 .
오랫동안 탈북민 사회와 가까이하며 뉴몰든을 지켜본 해나 씨는 점점 활기를 띠는 이 지역이 자랑스럽습니다.
[ 해나 ] 뉴몰든은 원래 유명한 한인 타운이었지만 , 최근에 많이 발전하고 있어요 . 사람도 많고 , 식당이나 시설도 많아지고요 . 이렇게 활기찬 ' 하이스트리트 (High street)' 를 보면 정말 행복해져요 .
‘커넥트 북한’에서 탈북민 정착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캐서린 씨도 탈북민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희망과 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탈북민들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도 큰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합니다.
[ 캐서린 ] 저는 지속적인 교육과 지원으로 탈북민들이 영국 사회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도우려 합니다 . 이 사회에서 탈북민들이 ' 해낼 수 있다 ' 는 자신감을 얻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
이렇듯 뉴몰든 시는 한인과 탈북민, 그리고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며 돕고자 하는 영국인들이 모여 활기찬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아이들은 죄가 없잖아요 ."
영국은 한반도와 인연이 꽤 깊은 나라입니다.
1883년에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뒤 당시 한양에 영국 영사관을 설치했고, 6.25 한국전쟁 때는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차로 약 4시간 떨어진 도시, 맨체스터.
맨체스터 시청 앞에는 커다란 기념비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붉은 양귀비 화환 수십 개가 이를 둘러싸고 있는데,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입니다.
기념비 뒤에 펼쳐진 잔디밭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Korean War, 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 한국전, 신 앞에 잊힌 이는 없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한국전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비입니다.

지난 5월3일, 탈북민 인권운동가 박지현 씨와 함께 영국인 참전용사 브라이언 호프(Brian Hough) 씨를 만났습니다. 올해 90세인 호프 씨는 1952년 8월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박 씨가 호프 씨에게 파란색 표지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적힌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책의 제목은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바로 유엔 참전국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 박지현 ] 한국 전쟁에 참전한 많은 국가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 영국도 여기 있네요 . 이 책을 드리고 싶어요 .
호프 씨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했고, 떨리는 손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봅니다.
[ 브라이언 호프 ] 제가 한국 부산에 도착했을 때 18 살이었습니다 . 저는 맨체스터 지역에서 자랐어요 . 당시 여기는 매우 가난한 도시였습니다 . 그래서 18 살의 저는 가난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8~9 천 마일을 건너 다다른 ( 한국이란 ) 나라는 저에게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
백발의 노인 호프 씨는 당시 장면과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듯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 브라이언 호프 ] 당시 한국의 상황은 한 마디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끔찍했어요 . 제가 기차를 타고 이동 중에 잠시 멈춰서 미군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쉬고 있었어요 . 그때 누군가가 ' 저길 봐 !' 라고 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 아마 한 20 명은 됐을 거예요 . 굶주린 어린아이 20 명이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밥을 달라고 사정하지도 않고요 . 지금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 그 뒤로도 굶주린 채 신발도 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었습니다 .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 그 기억은 평생 남을 거예요 .
호프 씨는 작년 6월, 한 한글학교의 초청으로 뉴몰든을 방문했습니다.
70년이 지나 뉴몰든에서 마주한 작은 한반도, 그에게 ‘남쪽에서' 혹은 ‘북쪽에서'와 같은 출신 지역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 기자 ] 뉴몰든을 방문해 보니 어떠셨어요 ?
[ 브라이언 호프 ] 내가 늘 생각했던 것 그대로예요 . 뉴몰든에서 그들은 남한 사람도 아니고 , 북한 사람도 아닙니다 . 그저 코리안이에요 . 아이들을 보세요 . 아이들은 편견을 갖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 서로를 싫어하지 않아요 .

그러나 호프 씨에게 ‘북한’과 ‘북한 주민’은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현실입니다.
[ 브라이언 호프 ] 아직 북한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 내가 전쟁 때 한반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친절하고 밝은 사람들이었는데 . 70 년이 지나도록 정치인들과 열강들은 이렇게 나라를 나눠놓고 도대체 뭘 얻으려고 하는 걸까요 ?
호프 씨는 지난해 뉴몰든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줍니다.
70년 넘게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당시의 참혹한 모습이 아닌, 전쟁이 무엇인지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
이것이 참전용사 호프 씨가 바라는 통일된 한반도 어린이들의 웃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브라이언 호프 ] 언젠가 세계 지도를 펼쳤을 때 , ' 북한 ' 또는 ' 남한 ' 을 보는 게 아니라 , 하나의 코리아를 보길 희망합니다 . 저는 진심으로 그날이 오길 바랍니다 .
유럽 영국의 도시 뉴몰든에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탈북민이 한 지역에 모여 사는 곳입니다. 참혹한 현실을 박차고 나와, 꿈과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난 이들은 낯선 땅에서 각자의 정착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눈물과 웃음, 좌절과 성취로 채워가는 뉴몰든 탈북민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봤습니다. |
에디터: 박정우, 노정민 웹: 이경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