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고향인 실향민들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한번가보는 것입니다. 황해도가 고향인 민명기 씨는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은 후손들이 꼭 고향을 방문해 ‘선친들의 묘소를 참배하라’는 말씀이었다며 언젠가 꼭 고향을 찾을 것 이라고 다짐합니다.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벽성군이 고향인 민명기 씨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이현기 기자: 민명기 씨는 오랫동안 워싱턴 황해도민회와 함께해 오셨는데 고향이 황해도 어디십니까?
민: 황해도 벽성군입니다.
이: 언제 월남하셨습니까?
민: 해방된 다음에 국민학교 입학하자마자 7-8살때 부모님 따라서 월남했습니다.
이: 어린시절 고향이 그리우시지요?
민: 옛날에 가방을 뒤에 메고 10리 되는 곳에 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개울을 건너서 학교를 가야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바지를 올리고 개울을 건너서 10명-5명씩 떼를 지어서 학교에 가던 생각, 고향이 시골이어서 옆에 산이 있었는데 진달래꽃도 많이 피는 것도 보았고 우리 고향 산천이 매우 아름다웠어요. 그런 어린시절 고향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이: 어린시절 고향에서 즐겨 먹던 과일은 무엇입니까?
민: 그 당시 감나무가 많았습니다. 집 주위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도 따 먹고 고염도 따 먹은 생각 농사를 짓기 때문에 참외를 많이 심었나 봐요. 참외도 많이 따서 먹던 생각이 나지요.
이: 어린 시절 기억나는 친구들이 있는지요?
민: 친구들은 지금 생각이 안 나요. 막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이니까. 우리 또래가 몇 명 있었는데 또래가 있었다는 것이 생각이 들지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수가 없어요.
이: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 있으셨다고요.
민: 아버님이 한 3년전에 돌아가셨는데 88세에 돌아가셨어요. 항상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세대에는 고향에 갈 수 없지만은 우리 세대는 갈 수 있을 지 모르니까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조상의 묘도 찾아보고 옛날 집도 들러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이: 그동안 실향민들을 위해 5도민회와 황해도민회 회장으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 동안 실향민들과 함께한 지난 일들을 회고해 주시지요?
민: 제가 한 20년 동안 황해도민회에서 봉사했습니다. 실무자, 사무총장부터 시작해서 이사장 2006년도부터 황해도민회회장을 맡아 올해 말까지 맞게 됐는데 그동안 황해도민회 회원들이 서로 참여해주고 협조와 후원을 해 줘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 황해도 사람들은 무엇보다 단결심이 강해요. 황해도민들을 석전경우라고 하잖아요. 돌밭을 가는 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무런 불평도 없이 묵묵히 자기일만 충실히 하는 그런 뜻인데요. 그래서 황해도 사람들의 기질을 석전경우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참 힘들어도 20년 동안을 묵묵히 황해도민회가 잘 성장해 왔습니다. 이렇게 황해도회가 성장한 것은 서로 협조가 잘 됐기 때문으로 봅니다.
이: 워싱턴 황해도민들은 어떤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민: 전체적으로 실향민들은 통일을 바라지요. 죽기 전에 고향땅을 밟는 것이 소원이고 또 그전에 이산가족상봉하는 것도 소원인데 소수만이 만나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이: 워싱턴 민주평통에서 워싱턴 일원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위해 현재 등록을 받고 있고 북한과 논의해 성사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민: 미국 시민권자로서 워싱턴에서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하자는 취지에서 이달 말까지 접수를 받고 있는데 원하는 실향민들은 접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황해도민회에서 특별히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민: 한국에는 이북 5도 위원회 내에 탈북자들을 돕는 기구가 있고요. 우리도 한국 5도위원회와 관계를 맺어서 미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도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올해 주요행사나 계획이 있습니까?
민: 3월에 총회를 하고 이산가족상봉과 그리고 탈북자 지원에 힘쓸 예정입니다.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벽성군이 고향인 민명기 씨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