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청춘만세>
저는 진행자 윤하정입니다.
먼저 오늘 이 시간을 함께 꾸며갈 세 청년을 소개할게요.
김필주 : 안녕하세요. 저는 함경북도 새별에서 태어나서 17년을 살고,
대한민국에서 11년째 살고 있는 탈북청년 김필주입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고향 분들에게 남한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 참여하게 됐습니다. 반갑습니다.
강예은 : 안녕하세요, 저는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강예은입니다.
대학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있고요.
남북통일에 관심이 많고 북한 청취자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예브게니 소코브 : 안녕하세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예브게니 소코브라고 합니다.
남한에 온 지 2년 정도 됐고, 전문 통역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북한 청취자 여러분께 러시아와 남한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재밌게 들어주세요.
<청춘 만세> 지난 시간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의 예브게니 씨와 북한 새별 출신의 필주 씨가
왜 남한에 왔는지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예브게니 씨는 어려서부터 드라마나 음악 등을 통해 남한 문화를 접했고,
특히 남한이 경제적으로 잘살아서 대한민국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고 하는데요.
반면 예은 씨 또래의 남한 친구들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러시아를 형의 나라로 생각했던 북한도 이제는 친밀감이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청년들의 얘기 계속해서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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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 저는 러시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 생각보다 안전하고 깨끗한데
남한에서는 서비스라고 하죠, 북한에서는 봉사.
식당이나 찻집을 가면 친절한데
러시아의 경우 친절하지는 않더라고요, 불친절한 것도 아니지만.
예브게니 : 그것도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예요.
예은 : 사회주의 체제에 있던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융통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예브게니 : 아무래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을 한만큼 돈을 받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이 일하고 평등하게 돈 받는 건데, 그렇게 안 되잖아요.
진행자 : 열심히 일하나 덜하나 똑같은 돈을 받으니까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예은 : 그래서 서비스, 봉사가 낙후된 거죠.
어딜 가도 친절한 모습을 못 보는 게
‘이건 그냥 내 일이고, 내 일이 끝나면 나는 퇴근하고 집에 간다’는 생각이라서 그렇고.
진행자 : 맞아죠, 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길을 헤매다
딱 3분 늦게 공연장에 도착한 적이 있어요.
물론 늦었으니까 공연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잖아요.
그런데 표 파는 곳의 창문이 닫혔고, 제가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계속 손으로 끝났다는 표시만 하고.
재밌는 건 러시아는 물론이고 체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남한에서는 10분, 15분 늦어도 들여보내주거든요.
필주 : 그리고 상황은 확인해 주죠.
진행자 : 그러니까요, 일단 물어볼 수는 있잖아요.
내가 늦었는데 들어갈 수 있느냐.
그런데 러시아나 체코의 담당자들은 ‘나 근무시간 끝났다’인 거죠(웃음).
예은 : 북한도 비슷할 것 같아요.
필주 : 맞아요, 예를 들어 북한의 구호 중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가 체화돼 있어요.
그러니까 당이 결심해야, 뭔가 지시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가이드, 안내원은 당에서 시키는 대로 인도해야 해요.
어느 장소에 가서 정해진 말을 하고, 다른 곳에 가서도 정해진 대로 말하고.
자기가 떠오른 게 있다고 부연설명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부풀려서 한 말이긴 한데, 그 정도로 시키는 일 외에 자기가 잘하는 척을 하면 안 돼요.
그게 체화된 사람들이라 봉사정신이 저조하다기보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남한에 왔을 때 당황스러웠던 게 ‘알아서 해라’.
뭘 알아서 하라는 건지.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제가 망아지이고 드넓은 벌판에서 마음대로 하라는데
고삐를 풀어줘도 내가 못 놀겠는 거예요.
왜냐면 북한에서는 어미가 따라다니면서 여기에서 이렇게 놀고,
어느 정도 놀다가 집에 와야 한다고 알려줬는데
그냥 풀어놓으니까 도무지 못 놀겠는 거죠.
예브게니 : 자유라는 게 쉽지 않아요.
필주 : 네, 자유를 얻었어도 제가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예브게니 : 맞아요, 러시아에도 아직 사회주의 잔재가 있어요.
자본주의가 도입됐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요.
왜냐면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랐고,
시청을 비롯한 관공서의 행정직원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사회주의 관습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아요.
진행자 : 그럼 제가 러시아에서 ‘왜 이렇게 불친절해’라고 느낀 것처럼
예브게니 씨는 남한에 와서 ‘너무 친절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예브게니 : 사실은 정말 많이 놀랐어요.
그런데 당연한 것 같아요.
돈 많이 벌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나라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러시아에서는 돈을 조금 받아서 일을 못해도 어차피 안 잘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 돈 벌면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거든요.
필주 : 저는 하나원이라는 남한정착기관에 있을 때
서울 토박이 형님이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데,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은 적이 있어요.
‘이 사람 남자가 왜 이래’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일단 서울말이 간지러운 데다 친절하니까 더 이상한 거예요.
예은 : 친절해서 이상했어요?
필주 : 네, 그때 드는 생각이 ‘나한테 뭘 뺏어가려고, 나한테 친절한 이유가 뭐야’.
예은 : 인사만 하는 건데요?
예브게니 : 나한테 사기 치려 하는구나.
러시아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해요(웃음).
필주 : 네, 그래서 옆으로 비켜 앉았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그 형한테는 저의 그런 모습이 상처였대요.
진행자 : 사실 저도 예브게니 씨를 2년 전에 처음 만났는데
인사를 해도 잘 웃지도 않고 받아주지 않아서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요.
필주 : 러시아가 북한의 형 맞다니까요(웃음).
예은 :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필주 : 첩자, 간신배라고 생각하는 거죠. 뭔가 정보를 캐려나 보다.
예브게니 : 아니면 착한 척한다고 생각해요.
필주 : 북한 당국에서 제가 세뇌교육 받기로는 그렇게 친절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거죠.
저만의 과도한 해석인지 몰라도
국가에서 다 해결해주니까 굳이 친절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감정소모를 해가며 들러붙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진행자 : 남한에서는 비행기 타거나 관광시설 갔는데 불친절하면 그 기관에 적어서 내요.
‘직원이 불친절하니까 친절 교육을 하라’고 알리는 거죠.
(러시아 여행 때) 신기했던 것 중의 또 하나는 보통 세계적인 관광지에 가면
그 나라 언어, 영어, 프랑스어 정도는 표기를 해두잖아요.
러시아에서는 어디에서도 영어를 본 적이 없어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일주일 있으면서 웬만한 관광 명소는 다 가봤는데
영어로 된 표기를 보지 못했어요.
예브게니 : 관광도시에서는 점점 생기고 있는데.
진행자 : 제가 4년 전에 갔을 때는 없었어요.
그래서 길을 그렇게 헤맨 거예요(웃음).
필주 : 정말요? 이런 거 보면 정말 북한의 형 맞네요(웃음).
예은 : 북한은 외래어도 다 바꾸잖아요.
예브게니 : 그래서 (러시아에) 관광객들이 많이 안 오는 거예요.
관광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하는데, 러시아 국토는 넓어서 통일적으로 개발하기 힘들어요.
진행자 : 그런데 예를 들어 수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니까
주요 관광지에 영어표기를 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예은 : 남한의 주요 관광지 안내판에는 영어, 중국어, 일어로 적혀 있어요.
진행자 : 지하철만 타도 중국어, 일어까지 나오잖아요.
예은 : 러시아는 그런 게 없어요.
진행자 : 일부러 안 하는 거 아니에요?
예브게니 : 잘 모르겠어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는 관광객이 정말 많을 텐데, 왜 그럴까요.
예은 : 제 생각에는 체제 수호를 위한 게 아닐까.
공산권 국가들끼리만 주로 교류했기 때문에 언어를 지킬 수 있었고,
지금은 과거에 대한 자부심이나 향수가 있어서 자기네 언어를 더 지키려는 것 같아요.
진행자 : 그럼 북한에서는 과거에 러시아어를 배웠단 말이죠. 남한에서 영어를 배우듯이.
그런데 이제 그것도 바뀌고, 예전만큼 러시아에 대한 친밀도가 없는 건가요?
필주 : 제가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예전보다는 상당히 멀어졌죠.
대신 중국과 가까워졌고.
러시아가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다 보니까 자연스레 러시아와는 멀어진 것 같고.
탈북자인 제 머리로 지구상의 국가를 떠올려보면
당시 북한 당국이 북한 주민들에게 얘기했던 국가예요.
즉 북한 체제와 다른 국가들은 언급을 안 해요.
그래서 저는 지구상에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있는지 몰랐어요.
러시아가 가까웠던 이유도 사회주의 국가였는데, 다른 길을 선택하니까 멀어졌고.
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이 식량난을 겪기 시작한 것도
우호국들이 하나둘 민주주의로 바뀌면서 북한을 도와주지 못해서 비롯된 거예요.
그러면서 그 나라들을 언급하는 일이 줄어들고,
주민들의 머릿속에서도 그 국가가 점점 사라지는 거죠.
북한에서 유일하게 외국 영화를 접할 수 있었던 게 러시아 영화였어요.
제가 고향에 있을 때는 15년 전이니까 당시 러시아 전쟁 영화를 많이 봤죠.
그렇게 외국 매체는 러시아가 우위에 있었고, 그 다음 중국.
따지고 보면 다 공산권 국가들이죠.
예은 : 지금은 어때요?
필주 :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죠. 일단 북한 주민들이 그 영화들을 안 봐요.
진행자 : 왜?
필주 : 재미가 없어서. 북한 당국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사상이 담긴 것만 보여줘요.
그러니까 안 보고 한류를 접하죠.
진행자 : 예은 씨 세대에서 러시아 체제가 바뀌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데도
러시아를 그렇게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것은 과거의 영향도 있겠지만...
러시아 현대 문학이나 음악 등을 친구들이 좋아해요?
예은 : 아니요. 일단 러시아 문화는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서유럽이나 미국 문화가 주도하고 있고, 취향이 맞지 않으면 즐기지 않아요.
진행자 : 맞아요, 고전음악이나 발레는 여전히 러시아가 대단해요.
그런데 과거의 남한 문화는 러시아 사람들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 거예요.
지금 남한 문화에 예브게니 씨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재밌기 때문이거든요.
반대로 지금의 러시아 문화는 그다지 재밌지 않아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도 생기지 않는 것 같아요.
필주 : 북한이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대중체조라고 생각해요.
아리랑 같은 건 한두 명으로는 안 돼요.
러시아도 비슷하죠. 예술성이나 웅장함은 있지만
한류처럼 개인 간의 섬세한 감성 교류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는 거죠.
공산권은 전체, 그런 차이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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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남한의 드라마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필주 씨가 말한 것과 비슷한가요?
또 남한 사람들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러시아의 모습은 북한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다음 주에는 필주 씨가 왜 남한에 정착하게 됐는지 들어볼 텐데요.
남북한,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마저 들어보겠습니다.
<청춘 만세>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지금까지 진행에 윤하정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