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반세기가 넘는 기다림 끝에 헤어진 가족들을 만난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잠시의 만남을 뒤로 하고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서울의 노재완 기자가 남측 상봉자 윤흥규 씨를 만나 상봉 소감을 들어봤습니다.
“아버지 사진은 안 가져오고 어머니 사진만 갖고 왔더라고요.”
지난 24일 이산가족 윤흥규(92)씨가 살고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전날 이산가족 상봉을 마치고 돌아온 윤씨는 오랜 이동의 피로감 때문인지 수척해 보였습니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윤씨는 올해 92살로 당초 이번 상봉에서 여동생을 만나기로 했지만 여동생이 몸이 불편해 상봉장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윤흥규씨: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이 내 여동생이고 이번에 허리가 아파서 상봉장에 나오지 못했어. 여동생 남편만 나오고. 그래서 상봉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지. 여동생이 왔어야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사위들이 뭘 알어.
윤씨는 금강산 숙소에서 이틀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여동생을 만나지 못한 실망감 때문입니다.
윤흥규씨: 처음에 북측 안내원을 따라갔지. 상봉장 테이블에 두 사람이 있는데 여자 2명이 아니라 남자 2명이 있더라고. 그래서 여기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지. 그러더니 북측 안내원들이 여기가 맞다고 하는 거야.
윤씨의 여동생은 현재 신의주에 살고 있습니다. 신의주에서 금강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몸이 좋지 않아서 못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윤씨는 석연찮은 부분도 있다고 말합니다. 여동생이 나오지 못하면 편지라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는 겁니다.
윤흥규씨: 자기 남편이 오빠를 만나러 나오는데 전하는 말도 없고 그냥 잘 듣고 와서 얘기해달라고만 했대. 편지 같은 것도 없고.
윤씨는 여동생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며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윤씨는 여동생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방 가득히 와이셔츠와 양말, 속옷 그리고 300달러의 돈을 챙겨갔습니다.
조금이라도 살림에 도움이 될까 싶어섭니다. 그러나 여동생의 남편은 어떤 이유에선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윤흥규씨: 내가 달러를 준비해서 가졌지. 매부한테 돈을 주니까 안 받을래요 하면서 그냥 가져가서 쓰라고 하더라고. 가져간 선물은 다 줬는데 돈은 안 받는다고 해서 도로 가져왔지.
윤씨가 북의 가족과 혜어진 지는 꼭 70년이 되었습니다.
해방되면서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 정권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지주와 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윤씨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것에 불과한데도 ‘지주’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윤씨는 갑자기 찾아온 폭력적인 상황 속에 분노하며 이남으로의 탈출을 결행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윤씨는 이런 혼란한 상황이 곧 정리되리라 생각했고 잠시 고향을 떠나 있다가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고향으로 와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흥규씨: 내가 외아들이면 나오지 못했지. 그런데 4남매니까.. 어머니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네가 정말 나가고 싶으면 나가거라 말씀하시더라고. 그렇게 허락받고 나왔어.
그러나 서울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윤씨는 그 과정에서 국군 헌병대 장교로 입대하게 됐습니다.
헌병대의 특성상 서울에 머물면서 치안 유지 등의 업무를 하다가 윤씨는 미8군 헌병사령부로 배속되었습니다.
이후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결혼 생활 10년쯤 되었을 때 아내가 암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해 재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윤씨는 대신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윤흥규씨: 우리 와이프가 부잣집 딸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랑 결혼해주고 나한테 잘 해줬는데 내가 어떻게 재혼하겠어. 자식도 없이 이렇게 50년간 혼자서 살아왔어.
고향을 떠난 22살의 청년은 어느새 90대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회견 내내 정정한 모습으로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윤씨는 부모님 이야기에는 잠시 울컥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윤씨는 부모님의 임종을 못 지킨 것이 가장 한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윤흥규씨: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 보는 것이지. 내가 살던 옛날집에 가보고 싶고 부모님 산소도 보고 싶어. 그거 말고 무슨 소원이 있겠어.
이번 상봉에서 여동생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야속한 듯 윤 씨는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겼습니다.
윤흥규씨: 동생이 몸은 좀 아프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다행이고. 죽은 것보단 낫잖아요. 다른 형제들은 다 죽었는데.. 여동생이 남은 삶도 건강하게 잘 살길 바라고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도 잘 지내길 바랄 뿐입니다.
윤씨는 또 죽기 전에 남북이 통일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이산가족들의 수시 상봉을 위해 개성에 면회소를 지어 마음대로 만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재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