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난 주 '당일치기' 방북 과정에서 대규모 환영행사에 동원된 북한 주민들의 힘겨운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과연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인사들을 열렬히 맞이하는 북한 주민들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지, 탈북민들을 통해 들어 봤습니다. 취재에 진민재 기자입니다.
지난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평양 김일성 광장에 도착하자 북한 주민들과 아이들이 열렬히 환호합니다.
[ 북한 주민들 연도 환영 현장음 ] 환영! 환영! (아이들) 와~
청년들은 러시아 국기 색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흰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인공기와 꽃을 흔들며 연신 ‘환영’을 외쳤습니다.
또 다른 위치에서는 붉은 넥타이를 맨 소년단 학생들이 해바라기를 흔들고,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들은 폴짝폴짝 뛰며 환성을 지릅니다. 겉으로 보기엔 온 마음을 다해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습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이 김일성 광장을 방문해 환영 행사에 참석한 시간은 정오.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폭염의 날씨였습니다.
땡볕 아래서 환영 행사에 동원된 주민들의 고달픈 모습은 한 러시아 매체의 카메라에 담겨 외부에 고스란히 공개됐습니다.
영상 속 장면에서 한 주민은 팔을 치켜들고 흔드는 게 힘들었던지 팔을 잠시 내렸다가 화들짝 올려 다시 흔들어 대는가 하면, 오랜 기다림에 자세가 흐트러진 아이들을 혼내며 지도하는 선생님의 모습도 노출됐습니다.
철저하게 통제하고 편집을 해서 공개된 북한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입니다.
한국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동완 교수는 무더위에 야외 일정을 취소한 양국 정상이 정작 아이들을 땡볕에 세워뒀다고 지적했습니다.
[ 강동완 ]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아동들이 동원되어서 정치적 행사에 나선다는 것은 마땅히 규탄받아야 할 부분이고요. 더군다나 이날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예보를 보면 평양 낮 기온이 당시에 영상 33도 정도였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푸틴에게 말했죠. "원래는 야외 일정이었는데 너무 날씨가 무더워서 지금 실내에서 차담을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뜨거운 날씨에 본인들은 실내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일정을 바꿨는데, 그 날씨에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해서 이렇게 정치 행사를 한다는 건 마땅히 규탄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 북한에서 이런 대규모 환영 행사를 직접 경험한 탈북민들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북한에서 보위원으로서 근무하며 대규모 환영 행사에서 주민 통제를 맡았던 정현철(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 씨. 정 씨는 이번에 공개된 영상 속 주민들의 모습이 과거 북한에서 마주했던 주민들 모습과 쏙 빼닮았다고 털어놨습니다.
[ 정현철 ( 가명 )] 2006년도인가 김정일 (집권) 때 저는 행사에 (연도 환영 주민 통제 요원으로) 동원됐는데 (행사에 동원된 주민들을 보면) 100% 마음이 원하진 않은 것 같았어요. 그것도 행사 동원이니까요. (행사 동원이라는 게) 자기가 자발적으로 나가서 하는 게 아니고 조직적으로 몇 명씩 조를 짜서 딱딱 데리고 나가는 거라서 뭐 그렇게 썩 원하는 일은 아니죠, 솔직히. 일단은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요, 첫째도 둘째도. 뭐 (손님이) 온다는 시간이 만약에 11시라면 11시에 딱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그 (행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7시부터 나와 있어요. 대여섯 시간 전부터. 그러니까 그것 자체를 좀 지루해하죠. (손님이) 오면 어떻게 환영해야 하는 것도 연습하고 그러니까.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김일성 광장에서 환영 행사에 참석한 시간은 10분 가량. 이 10분을 위해 주민들은 며칠 전부터 밤낮으로 연습하고, 당일에는 5~6시간 전부터 현장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과거 1960년 대 김일성 주석 시대부터 북한에서 환영 행사를 지켜봤던 탈북민 최태선 씨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환영 행사에 참여해 추가로 배급받는 즐거움이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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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선 ] 197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당시 대통령) 찌또(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북한에 왔었어요. 그 다음에도 (과거 북한을 방문했던 인사가) 많아요.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 아랍 나라, 우간다 등등 평양시에서 계속 행사가 끊을 날이 없었다고요. 옛날에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땐 그때는 먹을 것도 많았고, 김정일 (집권) 때는 고난의 시기에 '굶어 죽어도 기와집 무너져 3년'이라고 김일성(주석)이 저축이 놓은 게 많아서 먹을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는 나와서 환영하고 하는 걸 진심으로 했어요. 그런데 (김정은 집권기인) 지금은 (행사 동원되는) 그게 얼마나 고달파요. (평소)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행사 동원 나와서는 (안타까워요.)
더불어 최 씨는 최근 북한과 러시아가 초밀착 행보를 보이는 데 대해 과거에 비해 확실한 온도 차가 느껴진다며 현재의 북러 관계에 회의적인 견해도 덧붙였습니다.
[ 최태선 ] (과거) 그땐 아주 러시아하고 김일성 (주석) 하고 친했고 (외교적으로) 뭘 좀 했다고요, 중국보단 나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푸틴 대통령도 겉으로 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이제는 푸틴 대통령도 국제사회하고 나토에서부터 모든 게 고립이 됐으니까 북한 김정은 (위원장) 하고 홀로 이렇게 왕래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북한 가서 동맹 맺고 뭐 좀 하자고 (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요.)
강동완 교수는 북한 주민들의 가공되지 않은 고달픈 삶이 여실히 드러난 점이 되레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북이 거둔 의외의 성과가 됐다고 꼬짚었습니다.
[ 강동완 ] 카메라 방향이 외신기자에 의해서 다른 각도에서 비췄을 때는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진심으로 정말 충성을 다해서 환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라기보다는 이 동원 체제에서 정말 끌려 나온 듯한 그런 행동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입니다. 실제로 주민들이 건성건성 하는 그런 모습도 영상을 통해서 누가 봐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원 체제에서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들이 이번 영상을 통해서 고스란히 다 노출됐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두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북한 체제 또는 김정은(위원장)의 이런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라는 점에서 오히려 거기에 큰 성과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남 이후 2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한 푸틴 대통령.
두 정상은 이번 만남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며 친밀한 관계를 과시했지만, 정작 러시아 매체가 공개한 영상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행사 동원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