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7번의 탈북, 5번의 강제북송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변종혁 목사는 자유는 인간의 권리라며 자유를 억압하는 김정은 체제는 무너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울에서 한도형 기자가 변종혁 목사를 만났습니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다가 7번의 탈북, 5번의 강제북송을 거친 이후 2004년 1월 마침내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변종혁 목사.
변 목사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 식량을 구하겠다며 중국으로 떠난 어머니가 한 달이 넘어도 돌아오지 못하자 꽃제비가 되었고 11세였던 1999년 겨울 꽃제비보호소에 시체들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첫 번째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제가 처음 탈북한 계기는 꽃제비보호소에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시체더미를 보게 됐어요. 겨울이었는데 얼어있는 시체들을 쌓아놓고 있는 현장을 보고 나도 여기 있으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과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살던 큰아버지는 누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떠밀었고 이에 변 목사는 북한으로 돌아가 남동생과 두 번째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변 목사는 남동생, 3명의 꽃제비와 함께 얼어있는 두만강을 건널 때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며 쫓아왔고 3명의 꽃제비는 모두 끌려갔다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만난 큰아버지는 변 목사와 남동생을 고아원에 맡겼는데 변 목사는 이 시기 남동생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변 목사는 자신 또한 병에 걸려 쓰러졌고 중국 공안에 붙잡혀 첫 번째 강제북송이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국경 부근 중국 구류소에서 북한으로 강제북송된 변 목사는 벨트 등 소지하고 있던 물건 등을 통해 보위부에게 고문과 폭행을 당했고 꽃제비보호소로 넘겨졌습니다. 변 목사는 폭행의 공포로 인해 한동안 탈북할 엄두가 안 났지만 비교적 풍족했던 중국 생활이 떠올라 세 번째 탈북을 했습니다.
변 목사는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중 탈북민 청년들에 의해 중국 하북성의 한 가정집에 팔려갔습니다. 변 목사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팔려온 탈북민들을 만났고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탈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변 목사는 탈북민 청년들에게 돌려보내졌고 변 목사는 이후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됐습니다.
변 목사의 네 번째 탈북은 북한 남양에서 중국 도문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변 목사는 열차 아래에 달린 호수관 등에 올라타 10시간 동안 대기했고 중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변 목사는 용기를 내 큰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이를 통해 앞서 중국에 정착해 살고 있던 어머니와 누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엄마에게 동생 잃어버려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그때 안아주면서 왜 네가 미안하냐 내가 미안하지 그러면서 중국 어느 버스 정류장 앞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변 목사 가족은 이후 한국 선교사들과 연결된 모 조선족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교회에 앙심을 품은 탈북민, 조선족에 의해 두 차례 강제북송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교회의 도움으로 북한 관리자에게 뇌물이 전해졌고 변 목사 가족은 다시 탈북할 수 있었습니다. 변 목사에게는 이것이 다섯 번과 여섯 번째 탈북이었습니다.
이후 변 목사 가족은 한국을 가기로 결심하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독일 대사관 담을 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중국 공안들에게 체포됐고 변 목사 가족은 또다시 강제북송됐습니다.
변 목사는 이때가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전의 강제북송과 달리 한국으로 가려다가 붙잡힌 것이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것이라고 예상했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변 목사는 이때 자신의 가족들이 신의주에 위치한 보위부에서 1~2달에 걸쳐 하루 종일 양반다리를 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잘 때에도 똑바로 누워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잠을 자야했으며 움직이는 경우에는 구타가 진행됐다고 말했습니다.
변 목사의 가족은 이후 단련대로 끌려갔고 변 목사는 어머니와 누나가 이곳에서 약 2개월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줍고 나무를 하는 등 강제노동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변 목사는 보위부와 단련대에서의 한끼 식사는 각각 강냉이 20알, 쌀 30알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단련대에서 그냥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얘네들은 변절자다, 한국 가려고 하다가 잡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우리 가족을 거의 사람 취급 안 했어요.
변 목사 가족은 회령으로 이송되는 도중 관리자에게 뇌물을 줘 탈출했고 브로커를 통해 탈북했습니다. 이것이 변 목사에게는 일곱 번째, 마지막 탈북이었습니다. 변 목사 가족은 라오스, 미얀마를 거쳐 태국 방콕의 한 한인교회에 도착했고 (일부러) 태국 경찰에 의해 체포된 이후 태국 현지 한국대사관에게 인도되었습니다.
변 목사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했다”고 말했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에 (여전히) 감사함을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변 목사는 배고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자유에 대한 열망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변 목사는 또 어린 나이일 때부터 북한이라는 나라가 원망스러웠다고 밝혔습니다. 회령 시장에서 인신매매 등의 죄목으로 두 사람이 공개 총살되는 것을 목격했고 생존권에 대한 개념 없이 많은 꽃제비들이 방치된 채 죽어갔다며 다양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변 목사는 “주체사상은 자유를 억압하는 올무”라며 “김정은 체제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북한 주민들을 향해 “인간의 권리인 자유를 꿈꾸고 자유를 기대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사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올무거든요. 자유를 억압하는 거잖아요. 자유는 우리 인간의 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자유를 꿈꾸시기 바라고 또 자유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변 목사는 향후 활동 계획과 관련해 한국 내 탈북민 3만 5천 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3문화 아이들(TCK)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진행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변 목사는 또 중국에서 만났던 박용배 목사 등의 뒤를 따라 향후 북한 사역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한도형,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
기자: 지난 15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6번 탈북과 강제북송을 거쳤다고 말씀해주셨는데 하나씩 말씀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일단은 제가 처음 탈북한 계기는 꽃제비보호소에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시체 더미를 보게 됐어요. 겨울이었는데 얼어있는 시체들을 막 쌓아놓고 있었던 그런 현장을 보고 나도 여기 있으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그런 두려움과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그때 탈북을 하면 총살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겨울이어서 얼음을 타고 이제 탈북을 하게 됐죠. 거기가 어디였냐면 함경북도 유선이었습니다. 유선 맞은편 삼합이라는 곳 아무 집이나 들어갔더니 들어오면 안 된다 하면서 막 쫓아내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하나만 좀 물어보자고 개산툰이 어디냐고, 큰아버지댁이 개산툰이었는데 그냥 길 방향만 알려달라고 해서 이제 그 길을 따라 쭉 걸어가게 되었어요...그때 처음 큰아버지를 만나게 됐죠.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고 왜 혼자 왔냐면서 막 야단을 치셨습니다. 큰아버지 집에서 하루 딱 자고 다음날 저녁에 저보고 다시 북한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때 강제로 저는 삼봉을 통해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다행히 안 잡혔고 이제 남동생, 누나를 찾으려고 수소문을 했더니 누나는 배낭장사하러 청진이라는 곳으로 떠났고 동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청진까지 갈 수도 없고. 북한의 꽃제비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합실 아니면 시장에서 무리지어 다니거든요. 동생이 분명히 꽃제비가 되었을 것이다 하고 찾는데 밥 좀 달라고 다가오는 어떤 한 아이가 동생이에요. 막 부둥켜안고 누나 어디 있냐고 물으니 누나는 자기도 모른대요. 그리고 동생과 같이 다시 탈북을 시도한 거죠. 큰아버지가 개산툰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삼봉으로 갔어야 했어요. 겨울이었는데 동태를 살피니까 경계가 심한 거예요. 저하고 남동생하고 또 꽃제비 두 명이 더 있었어요. 같이 탈북을 감행하게 됐죠. 근데 원래 두만강 절반 이상 넘어가면 (북한 군인들이) 못 넘어가거든요. 그것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되는데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쏴댔어요. 한 아이가 총 맞고 끌려가고 다른 두 명은 도망치다가 잡히고. 그때 생각하면 되게 좀 마음이 아프고. 큰아버지를 다시 만났는데 또 야단을 치는 겁니다. 왜 누나는 안 데려오고 동생만 데리고 왔냐고. 큰아버지가 그때 비로소 이제 엄마하고 통화 연결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런데 엄마는 이제 국경 지역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중국 안쪽 좀 안전한 곳에 가 있었더라고요. 엄마하고 눈물의 통화를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희 보고 연길에 있는 고아원에 좀 가있어라. 엄마가 너희 데리러 올거다 하며 고아원에 저희를 맡겼어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동생을 고아원에 그냥 두고 나왔는지 아니면 데리고 나오다가 잃어버렸는지, 그 시기에 제가 동생을 잃어버렸어요.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잃어버리고 나서 제가 그때 겨울이었는데 굉장히 심하게 아팠어요.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일어나 보니까 병원인 거예요. 병원인데 앞에 보니까 군복 입은 중국 공안이 앞에 있는 거예요. 저는 중국 말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때 처음 잡히게 된 거죠. 한 20일 정도 중국 감옥에 있다가 북한 회령으로 북송을 했는데 그때 진짜 많이 맞았죠. 열한 살이었는데 조국을 배신했다고 엄청 때렸습니다. 보위부에서 끌고 갔는데 어떻게 끌고 갔냐면 차에 태워서 끌고 간 게 아니라 밧줄을 다 묶어서 한 줄로 세워서 겨울이었는데 맨발에 벗겨가지고 보위부까지 한 30~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우리를 많은 사람들 보라고 본보기로 보여주는 거예요. 보위부에서 한 군인이 잡혀있었는데 얼마나 군인을 때렸는지... 저도 많이 맞았는데 차고 있던 벨트 갖고 많이 맞았어요. 이후 꽃제비보호소로 옮겨지게 되었고 거기서 좀 생활을 하다가 나와서 꽃제비 생활을 몇 개월 정도 했죠. 그런데 자꾸 중국이 생각나는 거죠. 중국의 맛을 이제 봤기 때문에.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강물을 타고 탈북하게 됐죠. 혼자 탈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그 죄책감 때문에 큰아버지도 찾지 못하고 연락도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탈북민 청년들이 저에게 되게 잘해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돈 잘 버는 곳이 있다 해서 솔깃해서 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거기가 어디냐 하면 중국 하북성에 가게 된 거예요. 알고 보니까 저를 판 거예요. 남자가 없는 집이었는데 일을 시키려고 저를 팔아버린 거예요. 말도 안 통하지 못 살겠는 거예요. 계속 탈출을 시도했죠. 그러다 보니까 이 집에서 불안한 거예요. 한 2개월 만에 저를 물렸어요. 저를 팔았던 그 사람들한테 도로 물린 거죠. 물건이니까 물린 거예요. 그런데 그때 거기 있으면서 탈북민 저 혼자 팔려온 게 아니라 몇 명이 있더라고요. 왔다가 거의 다 도망쳤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다시 물려서 돌아오니 형들이 저를 엄청 때렸어요. 이 **새끼가 그냥 가서 살 것이지 뭐 하러 왔냐면서. 그러면서 꽃제비 생활을 또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공안에 또 잡혀서 북송됐습니다. 두 번째 잡혔을 때 또 회령으로 가게 됐는데 이 간부가 아는 거예요. 제 얼굴을 보고 또 왔네 그러는 거예요. 그 간부가 한 이야기가 아직 기억나는데 오죽하면 갔겠냐 하더라구요. 이후 다시 꽃제비보호소에 갔다가 도망쳤습니다. (또 탈북을 하려고 하는데) 그때는 장마여서 강으로는 탈북을 할 수가 없었고 북한 남양에 가면 맞은편이 중국 도문이거든요. 남양에서 도문으로 들어가는 화물열차가 있어요. 그 열차 보면 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 위에 올라가서 갔어요. (바로 열차가 출발한 것은 아니고) 한 10시간 정도 지났던 거 같아요. 잠들었는데 깨보니까 이제 중국인 거예요. 같이 갔던 형이 절 깨우는 거예요. 근데 그때 네 명이 같이 탔는데 세 명밖에 내리지 못했어요. 형 얘기는 가다가 떨어져서 죽었을 수도 있다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요. 중국에 도착한 이후 다시 꽃제비 생활하며 또 잡힐 수 있겠다 싶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큰아버지 집에 갔습니다. 울면서 동생 잃어버렸다고 미안하다고 하니까 그때는 큰아버지가, 다시 고아원에 두면 도망칠까봐, 집에 절 두었다가 엄마가 올테니 기다리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누나도 그때 넘어온 상태였고 엄마와 같이 살았더라고요. 그렇게 셋이 만났는데, 내가 엄마한테 동생 잃어버려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안아주면서 왜 네가 미안하냐 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중국 버스 정류장 앞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엄마, 누나와 중국에서 생활하게 됐죠. 그때 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저 같은 경우에는 소망방으로 가고 누나는 여자들이 있는 사랑방으로 가고 엄마는 교회에서 도와주는 집에 조그마한 셋방에서 살면서 세차장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교회 이름은 **교회입니다. 조선족 교회인데 한국의 선교사님들이 많이 연결돼 있는 교회에요. **교회 다음으로 북한 사역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교회에서 자기한테 도움을 안 줬다고 어느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 신고해버린 겁니다. 그때 소망방에 있는 아이들 3명인가 잡혀서 제가 또 회령으로 가는 거예요. 넘어가는 과정은 똑같아요. 중국에 한 며칠 있다가 국경 부근 구류소로 이동했다가 구류소에 사람이 10~15명 정도 차면 그때 북한으로 넘기는 거거든요. 북한에 나가면 저는 또 다른 데 안 가요. 또 꽃제비보호소를 가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같이 도움 받았던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의 첫째가 그때 북한 회령에 있었던 거예요. 거기하고 연락이 닿아서 쟤네 좀 빼달라 그렇게 된 거죠. 그 형이 꽃제비보호소에 돈 좀 주어서 저희를 빼서 무사히 중국으로 가게 됐고. 그리고 또 한 번 잡히게 됩니다. 조선족 교회 교인이었는데 중국 공안에 신고를 해서 그땐 저와 누나가 같이 잡혔어요. 그때도 또다시 어떤 사람을 보내서 돈을 좀 줘서 우리를 빼내고 다시 중국으로 넘어오게 됐죠.
그리고 마지막 잡혔던 때가 엄마하고 누나하고 베이징 독일 대사관 넘으려고 하다가 였습니다. 한 일곱 명이 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독일 대사관이 굉장히 높거든요, 의자를 하나씩 갖고 내렸는데 막 여기저기서 총을 들고 중국 공안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이미 알았다는 듯이. 알고 보니까 누가 돈 받고 신고한 거예요. 그때는 이제 서류가 다 나갔죠. 이 사람들은 한국을 가려다가 잡힌 사람들이다 라고 하는 서류가 북한에 나간 거예요. 그때 온 가족이 엄청 울었던 것 같아요. 밥맛도 없었고요. 왜냐하면 이제 북한 가면 죽은 거다 생각했으니까요. 그때 하나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제발 우리를 북송시키지 말아달라고. 공안들한테도 빌면서 우리 북한 가면 다 총살이다 좀 봐달라 했는데 전혀 안 통했고 결국 우리는 북한으로 북송을 당했죠. 신의주 보위부에서 한두 달 정도 있었는데 강냉이 한 20알 정도를 튀겨가지고 주고 소금 좀 주고 그러더라구요. 노동은 안 시키고 양반다리를 하고 손을 다리 위에다 올려놓고 움직이면 안 돼요. 이렇게 앉아서 허리 딱 펴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벌이죠. 하루 10분 휴식시간 빼고 그리고 화장실 가는 것 빼고. 화장실 갈 때도 물어봐야 돼요. 지도원 동지 화장실 가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고 가라 하면 가고 안 돼 하면 참고 그래도 안 돼 하면 그냥 싸고. 10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납니다. 잘 때도 절대 움직이면 안 되고 여기 이렇게 손을 가슴 위에다 올려놓고 자야 됩니다. 움직이면 들어와서 또 때리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단련대로 또 끌려갔습니다. 단련대에서 엄마, 누나, 저를 그냥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얘네들은 변절자다, 한국 가려고 하다가 붙잡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혹시 가족이 다 같이 도망칠까 봐 저는 일을 안 시키고 엄마하고 누나는 겨울이었는데 일하러 나가고. 그렇게 한 3개월 정도 이삭줍고 무말랭이 가지고 오고 나무를 해오고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밥을 또 굉장히 조금 줬어요. 삼십 알 정도. 보위부보다는 조금 더 줬어요. 그런데 엄마는 내가 배고플 나이니까 안 먹고 저한테 그냥 다 주고 누나도 주고 그랬습니다. 참... 그러다가 회령으로 이송됩니다. 중간에 잠시 여관 같은 감옥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간수장한테 돈을 주고 나오게 된 거죠. 저희는 그렇게 기적같이 탈출했습니다. 사실 갈 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거든요. 북한 가면 우리는 반드시 종신형으로 정치범 수용소 가거나 총살 당할 거라고. 근데 그렇게 반전이 돼버린 거예요. 그리고 브로커를 껴서 탈북하게 된 거죠. 그게 저는 마지막 탈북이었고요.
기자: 한국으로 오기까지 과정도 쉽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당시 우리 엄마가 심장에 문제가 있었어요. 심장 수술 하지 않으면 죽는다 해서 적십자회 등에서 후원을 해서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했어요. 다만 자녀는 한 명밖에 못 데려간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와 엄마만 한국에 먼저 오게 됐죠. 그전에는 당시 방콕에 한인교회가 있었어요. 저희에게 안내를 해줬죠. 집도 안내해주고요.
기자: 굉장히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끝끝내 탈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이유나 계기가 있었을까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세 가지인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일단 배고픔, 살기 위한 생존에 대한 이유죠. 두 번째는 이제 중국의 맛을 알다보니까. 중국에 가면 북한보다 훨씬 더 잘 살고 하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거죠. 자유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사실 온 거고. 그런 자유에 대한 열망 때문에 끝내 탈북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라가 너무 원망스러웠죠. 북한이. 어린 나이에도 김일성, 김정일 욕하고 다녔거든요. 북한은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북한은 나를 책임지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살았지만 중국인의 신분도 없었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래서 나도 어디 한 나라의 국민, 시민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기자: 북한 당국의 어떤 인권 침해 관련해 겪거나 목격하신 것이 있으실까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일단 저는 길거리에서 시체를 많이 봤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길바닥에 얼어붙은 시체도 봤었고 아예 굶어 죽은 가정도 봤었고. 어떤 사람이 사람고기를 팔다가 총살을 당한 적도 있었고. 시장에서 총살하는 것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회령시장에서 죄명은 뭐냐면 인신매매, 문서갈취 등이었어요. 또 가장 큰 인권 문제라고 한다면 꽃제비들이라고 생각해요. 장티푸스 걸려가지고 죽은 꽃제비들도 굉장히 많고 철도에서 죽는 꽃제비들도 많고. 저는 다행히 살아있는데 꽃제비들에 대한 인권 문제가 가슴 아프죠.
기자: 두 번째 잡히실 때부터는 벨트 같은 걸 다 빼셨다고 들었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맞아요. 그 이후에는 이제 빼고 가야 된다 해서 신발 끈까지도 다 버렸어요. 신발 끈은 이렇게 (두 손을) 조이더라고요. 이렇게 조이는 데 쓰거든요. 귀걸이도 다 빼고 어쨌든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다 빼고 가는 것 같아요.
기자: 한국에 도착하셨을 때 어떤 감정이셨을까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말 그대로 이건 생신인가 꿈인가 이럴 정도로 굉장히 좀 황홀했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가장 좀 기뻤던 것은 그거였어요. 안 잡히겠구나 이제... (웃음) 자유가 참 감사하고 대한민국이 국민으로 받아줘서 또 감사하고.
기자: 현재 가정은 이루셨을까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가정을 너무 이루고 싶은데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자녀를 많이 낳고 싶어요. 왜냐하면 제가 동생을 잃다 보니까, 동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픔이 있어요. 그래서 내 자녀들은 우리 동생처럼 키우지 않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도 있고 그리고 제가 혼자 많이 살았거든요. 너무 외로웠어요. 동생 생일이 12월 25일입니다. 근데 12월 25일은 성탄절이잖아요. 사실 하나님 만나기 전, 복음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성탄절이 너무 싫었습니다. 성탄절만 되면 되게 우울했고 죄책감이 더 많이 밀려왔고 엄마 눈도 못 맞췄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복음 깨닫고 나서. 오히려 내가 더 북한 복음화를 해야할 이유를 다시 새기고 동생 몫까지 내가 더 많이 뛰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전환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다만 아쉬움이 있죠. 동생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고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기자: 어린 시절 본인을 만나신다면 뭐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으신가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잘 버티고 잘 견뎠다. 죽지 않고 살아서 고맙다.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은 것 같아요. 또 한 마디를 더 붙일 것 같아요. 감사한 줄 알아라.
기자: 앞으로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탈북민 변종혁 목사: 일단 한국에 와 있는 3만 5천 명의 탈북민들이 다 복음 듣게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왜냐하면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야 됩니다. 저는 복음 안에서만 참된 자유와 참된 인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또 하나는 박용배 목사님의 박용배TV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제가 그 채널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플랫폼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길 바라고. 그리고 제3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에 팔려와서 결혼한 이후 낳은 아이들이 한국에 와 있는데 이 아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거예요. 한국, 북한, 중국도 아니고 정체성이 너무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이 아이들의 정체성 부분에 대해 도움을 주고 싶고요. 이 아이들은 한국, 북한, 중국도 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익한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또 북한의 문이 열렸을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많은 고아원도 세우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지금 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 10만 명 이상이라고 해요. 선배 목사님의 뒤를 따라서 저도 북한 사역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자: 지금도 많은 북한 주민분들께서 RFA 방송을 듣고 계시는데 직접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탈북민 변종혁 목사: 북한은 반드시 하나님이 쓰실 수밖에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북한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 조금만 견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 탈북민 3만 5천 명들 가운데 1만 명 가까이 되는 탈북민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 주체사상은 올무거든요. 자유를 억압하는 거잖아요. 미사일 한 번 쏘는 비용이 1년치 식량값이라고 하는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죠. 김정은 체제는 당연히 무너져야 합니다. 자유는 우리 인간의 어떤 권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자유를 꿈꾸시기 바라고 또 자유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