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 1961년,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의 탈주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일방적으로 동서독 간 경계선을 철조망과 장벽으로 막아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죠. 동독은 이후 탈주자를 총격하고 가혹하게 처벌합니다. 이에 대응해 서독 정부는 ‘중앙기록보존소’를 세우고 동독 정부의 정치 폭력과 인권 유린 사례를 수집해 보존합니다. 동독과의 가장 긴 접경을 마주한 서독 니더작센 주의 작은 도시 잘츠기터에 세워진 ‘중앙기록보존소’는 28년간 유지됐으며 통독 이후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의 근거가 됩니다. 잘츠기터 보존소를 모델로 한 남한 시민단체의 북한인권보존소는 200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권의 날을 맞아 ‘북한인권보존소’ 최기식 소장, 만나봅니다.
기자 : 소장님 안녕하세요.
최기식 : 안녕하세요. 저는 북한 인권 정보 센터 부설 북한인권보존소 소장을 맡고 있는 법무법인 산지의 최기식 변호사입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03년에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져서 북한의 인권 상황을 수집하고 인권 상황이 어떤지 알리기도 했습니다. 또 이후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피해자 복권을 위해 자료를 수집해서 대비해왔죠. 당시에는 남한에는 정부의 북한 인권법이 없었기에 민간단체에서 먼저 단체를 만들어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고 2007년, 자료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부설 기관으로 보존소를 만들었습니다.
기자 : 가장 처음 드는 궁금증은 ‘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고 있나’ 일 것 같습니다.
최기식 : 인권센터 요원들이 탈북민들에게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요. 여기서 인권 침해 사례가 있다면 심층면접을 하죠. 그리고 원 자료인 설문조사와 설문조사에 대한 심층조사가 기록보존소로 옮겨오면 기록보존소의 요원들이 사람, 사건, 지역별로 나눠 컴퓨터 저장매체에 저장해서 나중에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관리합니다.
기자 : 보통 인권 문제 등을 기록, 보존한다면 옛 서독의 중앙기록보존소를 떠올리는데요.
최기식 : 네, 북한 인권 정보 센터, 북한인권보존소는 서독의 니더작센 주의 잘츠기터 중앙법무기록보존소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동독에서 인권 침해 상황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서독으로 옮겨온 이후 자신의 거주지와 가까운 경찰서나 수사기관에 자기가 동독에서 당한 피해 상황을 진술하고 이 진술을 잘츠기터의 기록보존소로 이관했습니다. 이후 보존소에선 이 진술을 사람별로, 사건별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한 것이죠. 그때는 컴퓨터 기능이 별로 없었으니 카드 형태로 해서 수기로 기록을 했겠죠. 그게 4만 3천 여건 정도 됐고 그것들이 통독 이후 동독 공무원들의 재임용, 형사 처벌, 피해자 복권, 보상 등을 위해 다양하게 사용됐습니다. 그걸 모델로 해서 민간에서 먼저 만든 것입니다.
기자 : 보존소에서 보존하는 자료는 증언입니다. 증언하는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자료가 나중에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자료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최기식 : 그래서 제가 법무부의 북한인권보존소 소장으로 일할 때도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이 ‘사람을 특정해라’ 입니다. 사람을 특정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 증언은 국제 사회에 북한에서 이런 인권 침해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추상적이고 두리뭉실한 그런 얘기밖에 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사람을 특정하게 되면, 북한의 법집행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이 기록된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조심스러워 질 수 있고요. 이름이 노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디 보위부 소속이다, 그 사람 계급이 어느 정도로 불리더라, 머리는 대머리다, 얼굴에 흉터가 있다더라, 나이는 어느 정도이고 키는 어느 정도이고 남자고 여자고… 이런 것들을 최대한 특정하여 나중에 데이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기자 : 그런데 북한인권보존소의 지금 작업들이 북한 법집행관들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사실 잘 모르는 상태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기식 : 이것이 막 알려지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내가 했던 강제 낙태, 폭행, 강간 행위가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는 걸 예측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런 행위는 위축될 수 밖에 없고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면 훨씬 그 행위는 위축될 수 있습니다. 두대, 세대 맞을 것이 한대로 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고 북한 주민들, 특히 갇혀있는 사람들의 인권은 조금 더 보장될 수 있죠. 현 시점에서도요.
기자 : 지금 소장님의 말씀이 북한인권보존소가 존재하는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최기식 : 그렇습니다. 기록하고 보존함으로써 예방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고요. 다른 또 하나의 효과는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이 북한의 법집행관들이 ‘나 계속 공무원 하고 싶소’ 라고 신청을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북한주민들에게 좋은 일을 했는지, 악한 일을 했는지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면 선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동독의 공무원들이 통독 이후 공무원 재임용을 신청했을 때 잘츠기터의 자료와 슈타지 문서, 재판, 공소장 등이 공무원 재임용 결정에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이 자료만 갖고는 이후 (피해자 처벌을 위한) 형사 소추를 100%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베이스 자료가 되는 것이죠. 이 자료가 없다면 출발할 수 없습니다. 이 자료가 있고 이 진술을 토대로 주변에 같이 수용돼 있었던 사람 또 다른 법집행관 동료들, 북한 내부의 판결문,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놔두면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이 되는 거죠. 그리고 (피해자 처벌을 위한) 형사소추가 가능한 것이고요.
기자 : 소장님은 법무부 산하의 북한인권보존소 소장도 역임했습니다. 지금 민간단체의 북한인권보존소 소장도 맡게 됐는데요. 자료로 본 북한 인권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최기식 : 법무부 기록보존소 소장을 할 때는 매주 수요일마다 생 자료를 봤는데요. 정말 우리가 오히려 그 자료를 보며 정신적으로 피폐할 정도로 상황이 굉장히 안 좋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기록을 보는 사람이 그렇게 느낄 정도면 그 상황을 직접 겪거나 목격한 사람은 우리보다 열 배 이상의 고통에 있는 것이겠죠. 강제 낙태가 가장 기억이 남습니다. 중국에서 탈북했다가 강제 북송된 여성들이 임신한 경우, 북한은 100% 강제 낙태를 하는데요. 임신 몇 주가 됐느냐에 따라 낙태의 방법이 다양했고 기록을 읽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하나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생 정도된 딸이 친구들과 모여서 남한 시디 노래를 듣고 그걸 따라 부르며 춤을 췄다고 엄마한테 집에 와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다음날 딸을 보위부에 신고를 했어요. 알고 보니 엄마는 보위부의 비밀 요원이었던 거죠. 처음엔 딸의 죄를 감췄지만 다른 친구들이 적발됐고 이 엄마가 이걸 신고하지 않으면 엄한 처벌을 받으니 딸을 신고했던 것이죠. 엄격한 감시 체계 아래서 딸도 신고할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기자 : 사실 지금에서는 북한 인권 사례를 자료로 보존하고 그걸 사용한다는 게 굉장히 막연하게 들립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최기식 : 그건 독일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그때 당시에 인권 침해 행위가 있었으니까,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총기 사격을 하니까 나중에 독일 총리가 됐던 빌리 브란트가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었는데요. 그 양반이 주도해서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를 만들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생각에는 다른 건 없었을 겁니다. 그냥 지금 동독 군인들이, 동독 법집행자들이 자유를 찾거나 동독에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니 이걸 기록하자. 그리고 보존하자.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30년간, 4만 3천 건이 됐습니다. 그 기록들은 충분히 역할을 했고요. 보이지 않는 미래이지만 시루떡 쌓듯 하나씩, 하나씩 쌓으면 나중엔 반드시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자 : 기록과 보존의 힘을 강조한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최기식 소장 만나봤습니다. 소장님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최기식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