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민족의 대명절 추석입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텐데요. 북한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라면 더욱 간절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뉴욕에 사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을 김지선 기자가 만났습니다.
평안북도 강개에서 태어난 황인섭 할아버지는 6.25 전쟁 발발 다음해인 1951년 1월 4일,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내려왔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11살이었던 황 할아버지는 북한이 전쟁준비를 위해 어린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전쟁을 철저히 준비했던 상황들이 정확히 기억난다고 밝혔습니다.
황인섭: (초등학교) 2학년때 전쟁이 나가지고, 우린 벌써 우리도 전쟁나는 것 어렸을 때도 알았어요. 밤에 (북한)군인들이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더라고요. 소달구지를 끌고 이제 밤에는 몰래 자꾸 탄약같은 것을 나르는거에요. 그러고 있다가 어느 주일 날 아침인데, 자기네들 방송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이남에서 쳐올라와서 우리가 지금 전쟁한다고.
황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 대동강을 건너 월남 한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밝혔습니다. 목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너 살을 애는 추위속에 강을 건넜고, 당시 물을 건너다 죽거나, 추위를 못이겨 사망한 사람들도 많이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황인섭: 저녁에 밥을 먹고 있는데 식구들이..."쾅" 집이 막 흔들리더라고요. 아버지가 잠깐 있으라고 숫가락 놓고 나가셨다 들어오시더니, 대동강 다리 끊겼다. 빨리 옷들 준비해라...그냥 숫가락 있는대로 다 놓고, 밥먹던거 다 놓고, 그냥 내복, 그때는 추울 때잖아요 1.4 후퇴니까. 1월 4일 그때거든요....물이 나갔다 들어왔다해요. (물이) 나간 다음에 (목) 여기까지 차는 데를 넘은 거에요. 찬물이지요. 겨울이니까. 넘어오니까 그때서부터 죽은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벌써. 건너와서 처리를 못해서 얼어 죽은 사람들이 생긴거야.
황 할아버지는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서의 여러 불합리한 모습을 목격한 후 도미를 결정했습니다. 그의 나이 35세, 간호사였던 아내는 33세였습니다.
언젠가 통일이되면 북한에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밝힌 황 할아버지는 비옥하고 잘 살았던 북한에서의 어린시절이 생생하다고 말했습니다.
황인섭: 공산화 되면서 이제 땅 다뺐고 국유화하면서 사람들...처음엔 잘 나눠줄줄 알고 다 열심히 일했어요. 그땐 잘 살았어요. 그때는 이남보다 이북이 더 잘살았어요....그리고 강냉이도요 (팔뚝만한) 이런거 그냥...한 강냉이 나무에 그냥 열 개씩 막 이렇게 달려가지고, 우리가 산에 올라가 놀다가 배고프면 따가지고 불 떼가지고 구워먹고 그랬거든요.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는 동무들과 연못에 물을 빼 물고기 잡았던 것, 그 놀이를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황인섭: (고향에) 가지요. 가야지요. 다 이 실향민은 어쩔 수 없어요. 우리 미국에 와도 한국 가고싶은 생각이랑 똑 같죠. 당연히 가봐야죠. 내가 자라던 데. 가서 딴 건 다 하고 싶지 않고요. 그냥 이런 (큰) 연못이 있어요. 들어오는 물 막아서 다른 길로 물 빠지게하고 그걸 푸는 거에요. 그럼 그냥 붕어, 메사구(메기) , 게 뭐 하여튼 장어 다 나오는거에요. 그걸 꿰매가지고 30개 만들어서 다 집으로 가져오고...그랬어요 어렸을때...
1936생으로 올해 만 83세인 허경화 할아버지는 황해도 성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평안남도 개천군에서 살았다고 추억합니다.
허경화: 내가 태어난 고향은 황해도 성화군이고, 외정 말엽에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평안남도 개천군이라고 청천 강변에 살았어요.
한국에서 17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던 허 할아버지는 친인척의 권유로 뉴욕 땅을 밟았습니다. 그의 나이 40세,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허경화: 미국에 온것은 75년 1975년 2월에 왔어요. 내가 학교 교사를 했는데, 여자고등학교를, 거기 학교에서 17년 근무하고 왔으니까 꽤 오래 살다왔죠 한국에서.
요즘도 고향 생각이 나냐는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허 할아버지는 고향 땅에 묻고 온 어머니 생각이 나, 꼭 한번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허경화: 내 어머니가 거기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묻혀있는 그 곳이 우리가 경영하던 사과 밭, 과일 밭에, 제일 꼭대기 모서리에 거기에 묻혀있는데...내 눈에 선하거든요. 헌데 지금은 물론 다 개간되고 다 흩어졌을 거에요. 그러나 내 마음에는 그곳에 집중돼 있어요. 어머니 묘소에 한번 가서, 그리고 옛날 동네 가서 이렇게 돌아보고싶다는 마음은 간절한데, 이제 내가 80대 중반인데 언제 뭐 갈 수 있겠어....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고향이 더욱 그립다고 합니다. 하루 속히 통일이 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게되길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