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씨 “북 인권유린 세계에 알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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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국전쟁 발발 후 71년이 지났지만 북한의 인권 유린 실태를 알리기 위한 탈북 국군포로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로 90세인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씨는 북한에서 겪은 모든 경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의 이정은 기자가 김성태 씨를 만나봤습니다.

1950년 6월 30일 열아홉의 나이로 북한군의 포로가 된 김성태 씨.

경기도 포천 출신인 김 씨가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귀환하기까지는 약 51년이 걸렸습니다.

올해로 90세인 김 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억류된 기간동안 국군포로로서 경험한 강제 노동, 차별 대우 등 북한 당국의 인권 유린 실태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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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하는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씨 /RFA PHOTO

김성태 씨: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억압당하고 탄광에서 (강제 노역하고). 포로 그 딱지 붙어서 사람들은 대학도 가는데 대학도 못 나오고. 아들도 군대도 대학도 못 가고. 이런 차별을 하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한 북한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세계에다 만방에다 폭로하고 싶습니다.

김성태 씨는 지난달 24일 북한의 국군포로 송환 거부,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내용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앞서 지난해 7월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노예문제 특별보고관, 고문문제 특별보고관 앞으로 진정서를 내고 북한의 국군포로 대상 인권 유린에 관한 진실을 밝혀줄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다른 탈북 국군포로 4명과 함께 북한과 김정은 총비서를 상대로 북한의 불법 억류와 탄광 노동 강제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김성태 씨는 북한 내 국군포로로서 겪은 학대와 차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김 씨는 1950년 6월 30일 경기도 양주에서 부상당한 중대장을 업고 달리다 역시 부상을 입고 북한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사람들은 굶주림과 전염병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김성태 씨: 이 포로 생활이라는 것이 사람으로서 겪어보지 않고는… 그렇게 멸시를 당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식량의 양도 줄이다 보니까 사람이 쇠약해지고. 목욕도 못하지. 목욕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저 야만 생활입니다.

1953년 7월 18일 김 씨는 함경북도 회령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휴전협정 체결 이틀 전인 1953년 7월 25일, 군사재판에서 조국반역죄로 13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정치범 신분인데다 도주를 수차례 시도해 감시 대상이었던 김 씨는 13년 형기를 꼬박 채웠습니다.

1966년 7월 석방된 후에는 함경북도 온성군의 추원탄광으로 보내졌고 20년이 넘도록 탄광에서의강제 노역에 처해졌습니다.

이 후에도 국군포로 딱지 때문에 김 씨와 그 가족은 늘 보위부의 감시 대상이었고 평등한 기회를 제공받지도 못했습니다.

김성태 씨: 국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포로의 아들이기 때문에 대학도 못 가요. 공부도 못하고 군대도 못 가고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합니다. 보위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보위원들이 집을 빙빙 돕니다.

2001년 6월 북한에 억류된 지 51년 만에 김 씨는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김성태 씨는 한국 정부가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송환할 것을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성태 씨: 국군포로 중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국군포로도 좀 고향에 오게끔 돌려보내달라고 그 말 한 마디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정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