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미 입국 탈북민 “한국행 1억원 브로커 요구에 미국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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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2019년말 어린 두 딸과 북한을 탈출한 강미영(가명) 씨는 중국에서 한국행을 계획했지만 브로커의 무리한 비용 요구와 협박으로 탈북 2년 만인 2021년 11월 말 난민 자격으로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강 씨는 두 딸과 함께 미국에 도착했는데 탈북 난민이 미국에 입국한 것은 2020년 2월, 탈북민 1명이 들어온 이후 22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강 씨의 험난한 탈북 여정을 김소영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강 씨: 선생님, 저 지금 일 나가야 합니다.

지난해 11월 말 난민으로 미국에 들어온 강 씨는 얼마전부터 미국 정부의 취업지원을 통해 의류공장에서 옷을 분류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난민지원정책으로 제공된 무료 주택과 보조금은 3개월 이후 중단됐기 때문에 아이들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든 겁니다.

미국 정부가 난민들의 미국 초기 정착에 필요한 주택 임대료(렌트)와 같은 현금 또는 현물을 지원하는 난민정착지원 프로그램(Reception and Placement program)은 3개월로 한정됩니다.

양강도 혜산에서 남편, 두 딸과 함께 살던 강 씨는 탈북 시도로 몇번이나 보위부에 붙집혀 구금시설에 들어갔다 나온 후 무역회사 일자리까지 뺏기고, 큰 딸과 함께 장사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당한 신체적 고문으로 강씨의 몸은 오래 서있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강 씨 : (사람들이) 아주 부지런하다고 혀를 찼다고요, 나를 보고. 그런 저도 제가 벌어서 아이들하고 저하고 먹고 살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보통 평백성(주민) 능력으로 쌀 2킬로그램 벌기도 힘들고 1킬로그램 밖에 못 버는데.

평생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2019년 말 9살, 11살이었던 두 딸을 데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북한을 탈출한 강씨는 중국에서 한국인 브로커를 소개받고 무사히 한국행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쳤습니다.

브로커 비용으로 한명당 1천 5백~2천 만원(미화 약1만 2천~1만 6천 달러) 정도로 알고 있던 강 씨에게 브로커는 두 자녀를 포함한 3명에 대해 7천만원(미화 약 5만 6천 달러)을 요구했고, 이를 지불하지 못하면 강제로 북송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게 강씨의 주장입니다.

강 씨 :정상적으로 6천만원인데 7천만원으로 불리고, 이것도 1년 안에 물지 못하면 1억으로 물라는 계약서를 내놓길래 내가 못 쓰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3~4일 싸우다가 '우리를 다 죽여서 북한으로 보내겠다'하니까 제가 '북한 가겠다'고까지 했거든요.

결국 반강제로 계약서에 서명한 강 씨는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다니는 일반 탈북자들과 달리 브로커의 눈을 피해 산을 넘어 태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 19는 또 다시 강씨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태국 내 유엔 난민시설에서 2년간 머물게 된 강 씨는 당시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가려 했으나 브로커와의 계약서 문제는 당사자와 협의하라는 대답과 ‘간첩혐의’에 대한 조사만 이뤄지자 한국행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강 씨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는 한 탈북자의 말을 전해 듣고 미국 대사관을 통해 ‘난민’ 지위를 얻어 결국 아무런 연고자도 없는 미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어린 딸들의 미래 때문이었습니다.

강 씨 :아이들은 공부를 시켜야죠, 한창 피어날 아이들인데. 그런데 누군가 공부하러 미국가겠다고 신청했다는 말을 얼떨결에 듣고, 비행기 뜨기 이틀 전에 '저 미국가게 도와주십시오' 하니까 미국 대사관에 보내주더라고요.

그렇게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들어온 강 씨는 미국 서부의 유타주에 거주지를 배정받아 두 딸과 살고 있습니다.

강 씨는 북한에 남아계신 어머니를 꼭 데려오겠다는 바람과 함께 지난 2016년 전화 통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한국에 살고 계신 외할아버지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한국에 내 가족이 있다’는 믿음 하나로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는 강 씨는 꼭 나중에 외할아버지의 빈소라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기자 김소영,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