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로 보는 북한] 무한 소환되는 배신의 아이콘 ‘지갑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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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1년도 바람'을 보고 교훈을 배울 것을 요구하는 학습제강

-사라졌던 영화 모임이 재개, 김일성 시기의 빨치산 회상기가 재소환되는 배경은?

-1941년의 교훈은 2025년을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유효한가?

[ 진행자]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이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간부 당원 근로자 대상 학습 제강 <'41년도 바람'의 주인공들이 지닌 투철한 혁명적 신념에 대하여>를 다뤄보고 있습니다. 김지은 기자 안녕하세요.

[ 김지은 기자] 안녕하세요. 영화 '41년도 바람'은 1991년도에 제작된 영화로,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시기를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입니다. 1941년, 일제 관동군 100만 대군의 대토벌이 시작되면서 중국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고 부대가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쇠약해진 때였습니다. 여기에 쏘련과 일본과의 중립 조약이 맺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절망에 빠진 시기, 배신한 사람과 신념을 지킨 사람을 대비시키며 정세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변절하지 말라는 주제의 영화입니다.

[ 진행자] 그렇죠. 1940년대 초 김일성이 인솔하던 부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이 영화 속에서 배신한 주인공의 실제 인물은 빨치산 경위 중대장이던 '지갑룡'입니다. 경위 중대는 부대 지휘관 즉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사장인 김일성의 신변을 지키는 부대입니다. 이런 사람인 '지갑룡'이 변절했다는 건데 현재 지갑룡은 북한에서 배신자, 변절자의 상징입니다.

[ 김지은 기자] 북한에서는 그렇게 주장하죠. 그런데 조선족 출신의 유순호 씨가 2018년 펴낸 '김일성 평전' 등 많은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좀 다릅니다..

김일성은 당시 경위중대장이었던 지갑룡에게 자신의 상관인 2군 정치위원, 위증민을 찾아 오라 보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지갑룡은 임무 받고 나갔다가 한참 뒤에 헤매고 돌아왔는데 자신의 여자인 김정숙이 김일성과 살고 있으니 그걸 참지 못하고 깊은 산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런 얘기를 참 그럴듯하게 바꿔서 배신자로 만들고 책과 영화를 만들고 아직 주민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 일제 패망 후 이미 중국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부모나 가족 등의 이유로 해방된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동북에 남은 빨치산이 귀국한 대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임무를 받고 부대를 떠난 지갑룡이 제날짜에 부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서 지갑룡의 여자였던 김정숙은 김일성의 여자가 됐습니다.

뒤늦게 부대를 찾아오던 지갑룡이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며칠간 제정신이 아닌 채 한숨만 쉬던 지갑룡은 부하 대원들에게 "내가 김일성한테 어떻게 가겠냐, 못 간다. 난 산을 내려가겠다. 혹시 나에게 총을 쏠 수 있어 너희 총을 내가 가져간다. 저 아래 개울 다리 밑에 걸어 놓겠다. 하지만 나는 일제에 투항하진 않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갑룡을 언급하면서 혁명의 신념이 없으면 아무리 오래 투쟁해도 변절할 수밖에 없다고 썼습니다. 김일성과 같이 10년 가까이 산에서 일제와 싸웠던 지갑룡, 지갑룡은 아내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된 건데 지갑룡이 살아있다면 뭐라고 할까요? 김일성의 항일 투쟁기는 이렇게 부풀려지고 또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바꿔왔죠. 하나하나 따지자면 100회를 방송해도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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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항일빨치산 시절 찍은 김일성과 김정숙의 흑백 사진 / 연합뉴스

그런데 이렇게 영화를 시청한 후 그 내용에 근거해 진행하는 학습회 또 영화 소감을 발표하는 영화 감상회 이런 사상 교육은 한동안 진행되지 않았죠. 그러다가 최근 다시 등장한 이유가 뭘까요?

[ 김지은 기자]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다른 건 할 게 없지 않습니까? 수십 년 동안 김정일 시대부터 또 지금에 이르는 김정은 시기까지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 고난이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는데 뭘로 충성을 이끌어 내겠습니까? 결국에는 과거의 영화를 꺼내서 주민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민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보라고 불을 끄면 다들 그 자리에서 엎드려 있습니다. 자는 것이죠. 이게 현실인 겁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은 1940년대의 신념이 지금 2025년에 적용이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 진행자] 사실 불가능하죠. 그런데 북한 당국은 억지로 그렇게 지금 이끌어가고 연결시키는 거죠.

[ 김지은 기자] 주입시키는 거죠. 1940년대의 고난은 국제 정세로부터 비롯됐고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이었습니다. 2020년대 중반을 지나는 지금의 위기는 사실상 김정은 위원장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제, 괴뢰 남한이 북한을 침략하기 위한 책동으로 포장해 이렇게 지금 북한이 어렵게 됐다고 주민들을 호도하지만, 3대 세습을 이어가기 위한 핵 개발 야욕이 불러온 결국 자신들이 만든 고난입니다. 주민들도 이 영화가 만들어진 91년과는 다르게 판단할 겁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수령에 대한 절대적 의리를 지켜야 할까? 북한 주민들도 반응은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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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자] 이번 문건은 '우리의 혁명적 신념을 지켜 싸워온 항일 혁명 투사들이 피어린 투쟁사를 지나간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 따라 배우고 본받아야 할 삶의 교본으로 새겨 안아야 한다'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화 '41년도 바람'은 김일성이 전염병이었던 빨치산 출신 전문섭이 쓴 회상기 '필승의 신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1959년부터 출간된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이 회상기라는 단행본은 북한 거의 모든 가정이 있을 정도로 많았고, 그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김 기자님 가정에도 회상기가 몇 건 있었죠?

[ 김지은 기자] 아유, 많았죠.

[ 진행자] 저희 집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1980년 이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습니다. 최용권, 허형식, 김책이 이끄는 부대의 활동에 대한 회상을 대부분 없애고, 김일성 부대의 활동에 대한 회상 내용만 남긴 겁니다. 다시 말해 김일성 일가의 업적만 부각한 건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 우상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서의 끝부분에 혁명적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인간들을 여덟 부류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도 과거와 거의 바뀐 부분이 없습니다. 김 기자님이 특별히 주목한 부분이 있을까요?

[ 김지은 기자] 네, 8가지 부류의 인간은 '개별적 간부들에 대한 환상과 우상화에 빠진 사람들'을 첫 번째로 꼽고 '당의 신임을 놓고 저울질하면서 눈치놀음하거나 당에 속을 주지 않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고 처세술에 능한 사람', '당 정책 관철에 투신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당이 맡겨준 혁명 초소를 끝까지 지키지 않고 먹을알(이익)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고 처세술에 능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을 강요한다고 생각합니다.

[ 진행자] 그대로 따른다면 아마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까요.

[ 김지은 기자]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이 문건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영화를 통해 당국이 강조하는 부분은 '배신을 하지 말라'일 겁니다. '41년'의 어려움이나 수령에 대한 신념을 지켜라 이런 부분도 나오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배신은 죽음이다, 배신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됐습니다. 지금 탈북을 거의 못하는 북한에서 배신이란 수령을 따르지 않는 것, 국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수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믿으면 광복을 맞은 항일 투사들처럼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 진행자] 북한이 요구하는 혁명적 신념이라는 것도 사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슬러 억지로 주민들이 의식 변화를 차단하려 하는 북한 당국의 처사는 이루지 못할 꿈을 쫓고 있는 겁니다. [문서로 보는 북한]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김지은 기사, 수고하셨습니다.

[ 김지은 기자] 고맙습니다.

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