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고양이 뿔 빼고 모든 게 다 있다는 북한의 장마당, 그런 장마당에서 파는 물건 하나만 봐도 북한 경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만 있는 물건부터 북한에도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른 물건까지, 고양이 뿔 빼고 장마당에 있는 모든 물건을 들여다 봅니다. <장마당 돋보기>, 북한 경제 전문가 손혜민 기자와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손혜민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12월 21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인 '동지'죠. 동짓날에는 예로부터 가족과 이웃이 한 자리에 모여 팥죽을 나눠 먹는 풍습이 있는데요. 하지만 한국에선 요즘 동짓날이라고 가족과 이웃이 모여 팥죽을 챙겨 먹는 일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동지인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요. 손 기자, 북한에선 동지가 중요한 명절이라고요?
손혜민 기자: 그렇습니다. 12월 연말이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기다리는 전통 명절의 하루가 동짓날입니다. 흔히 '동지 죽 먹는 날'이라고 하는데요. 1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짓날에는 동지 죽을 먹어야 한해 액운을 물리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가마솥에 가득 쑨 동지 죽을 온 식구가 마주 앉아 먹는 이유죠. 따라서 동짓날 새벽이면 대부분의 집집마다 동지 죽을 쑤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데요.
붉은 팥을 가마솥에 오래 끓이다가 그 안에 쌀을 넣고 팥죽을 쑨 다음, 붉은 수수 반죽으로 동그랗게 빚은 알을 넣고 끓이면 동지 죽이 됩니다. 뜨거운 동지 죽을 입으로 훌훌 불어 먹으면서 수수반죽으로 동그랗게 빚은 쫄깃한 맛을 내는 동그레 알(알심)을 수저로 한 알씩 건져 먹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먹을 것이 흔하면 북한에도 동짓날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북한에서 동지 문화는 명절 문화입니다.
진행자: 북한에선 이맘때가 되면 장마당 수수 가격까지 오른다고 하는데요. 팥죽 재료부터 다 만들어진 팥죽까지 장마당은 이미 동지 맞을 준비로 바쁘겠네요.
손혜민 기자: 맞습니다. 알뜰한 주부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동지 죽을 쑤기 위해 12월 초부터 저축 단지를 꺼냅니다. 매일 밥을 할 때 입쌀 한 줌씩 된장 단지에 넣으면 보름만 모아도 1kg는 됩니다. 쌀이 아니라도 매일 장사하며 벌어들인 돈에서 500원이나 1000원짜리 한 장을 된장 단지에 넣어두면 가족이 먹을 동지 죽 재료를 살 수 있습니다.
해마다 북한에서 동짓날이 다가오면 열흘 전부터 장마당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가정마다 동지 죽 재료인 쌀과 붉은 팥, 수수 반죽 덩어리를 사기 때문인데요. 일상적으로 쌀과 팥은 장마당 매대에서 팔지만, 수수 반죽 덩어리는 동짓날을 맞으며 장마당에 나오는 상품입니다. 다시 말해 수수 반죽 덩어리는 동지 명절 특수 상품인데요. 김장철이면 장마당 입구에 배추와 무 등 김장재료 장사가 진을 치듯이 동짓날 전이면 장마당 입구에 수수 반죽 덩어리를 전문 판매하는 장사꾼들이 진을 칩니다.
장마당이 생기기 전, 동짓날 전에는 가정 주부들이 집에서 직접 쇠 절구로 수수를 쪄 탈피했습니다. 그 다음 수수를 물에 불려 맷돌에 간 것을 보에 싸 물을 찐 반죽 덩어리를 조금씩 뜯어내 새알 크기로 빚었거든요. 하지만 90년대 이후 장마당이 발달하며 수작업으로 동지 죽 재료를 만들던 문화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수수를 절구로 치고 맷돌에 갈 시간에 장사를 하여 사먹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죠. 보통 장마당 하루 수익은 쌀 1kg 가격인데요. 수수는 쌀보다 가격이 싸므로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동지 죽 재료를 사들이는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가격입니다.
누가 동짓날 특수 상품인 수수 반죽 덩어리를 만들어 파는 지가 중요하겠죠. 대부분 장마당 매대에서 장사하지 않던 할머니들이 나섭니다. 반짝 장사로 돈을 버는 건데요. 수수 반죽 1kg는 수수 1kg 가격으로 판매되는데, 수수 1kg로 반죽을 만들면 1kg 300g이 나옵니다. 30%의 수분이 장사 수익이라는 말이죠. 현재 평안남도 장마당에서 쌀 1kg 북한 돈 1만 2천원(0.3달러), 수수는 8천원(0.2달러)이므로 수수 10kg 구매해 수수 반죽 덩어리를 만들어 팔면, 8만원(2달러)의 30% 수익을 계산해도 2만 4천원(0.6달러), 20kg면 올해 인상된 공장노동자의 월급(5만원, 1.25달러)과 맞먹는 수익이 나옵니다.
진행자: 북한에선 수수부터 빻든, 반죽을 사서 좀 편하게 해먹든, 아니면 사서라도 동지 죽을 꼭 먹는다는 얘긴데요. 더구나 북한에 '동지엔 열 집 팥죽을 맛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이웃과 팥죽을 나눠 먹는 문화가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위기입니까?
손혜민 기자: 그렇습니다. 김장 하는 날, 김장을 도와 준 이웃이나 남편의 친구를 초청하여 절임 배추 꼬개기에 양념을 얹어 나누어 먹는 문화와 비슷합니다. 열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이웃이 동지 죽을 가져다 주면, 그 다음 날 다시 그 이웃에게 자기가 쑨 동지 죽을 가져다 줍니다. 특히 주민 행정 말단 조직 책임자 인민반장을 집으로 초청해 동지 죽을 대접하기도 하는데요. 당국의 감시를 대리하고 있는 인민반장과의 돈독한 관계를 동지 죽으로 해소하는 셈이죠.
특히 남편을 공경하는 아내들은 반드시 공장기업소에서 일하는 남편의 점심 도시락으로 동지 죽을 넉넉히 싸서 보냅니다. 먹을 것이 귀한 북한 사회에서 동짓날만큼은 동지 죽으로 남편을 내세우는 아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가난한 살림으로 동지 죽을 먹지 못한 직장 동료와 나누어 먹으라는 인정이기도 하지만, 동짓날이라도 남편의 기를 살려주려는 아내의 깊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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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몇 안 되는 남북이 공동으로 쇠는 동지, 팥죽 드시는 분들 모두 올 한 해 힘들었던 일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내년에 더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텐데요. 북한 주민들은 올해 동지에 특히 어떤 걸 바랬을까요?
손혜민 기자: 올해는 북한이 지방발전 20 ×10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10년 간 해마다 20개 군에 지방산업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농 간 격차를 줄여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겠다는 김정은 정부의 의지인데요. 하지만 건설 비용은 주민 세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당 자금 일부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주민들이 느끼는 세부담의 무게는 버거웠죠.
지난 7월 말에는 평안북도 신의주와 의주, 자강도를 비롯한 국경지역에서 큰물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김정은 총비서가 수해복구 현장을 직접 돌아보며 수재민을 챙기는 애민 정신을 연출했는데요. 그만큼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로 민심이 악화되었음을 방증합니다. 하지만, 수해복구 건설도 상당 부분 주민 세부담으로 이어지면서 역효과를 불러왔습니다. 여기에 장마당에서의 식량 판매와 된장 판매까지 통제되고 달러 환율까지 폭등하면서 주민들의 생계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의 올해 액운은 실효성이 없는 당국의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장마당 장사를 통제하고 있는 사법기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말이면 북한에서 점쟁이 집 앞에 새해 운수 보려고 사람들이 밀려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부디 다가오는 동짓날, 붉은 팥죽 속에 액운을 날려 버리고 북한 주민들이 마음 편히 잘 사는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오늘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함께해 주신 손혜민 기자 감사합니다.
<장마당 돋보기>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