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에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려 싱가포르에 갔습니다. 그와 같이 간 북한 대표단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닙니다. 그러나 김정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김여정이라는 여자입니다. 김여정은 서른 살인데 당중앙 부부장입니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이 만큼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가 고 김정일 위원장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북한 역사를 보면 김여정과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후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자신의 동생들에게 많은 권력을 맡겼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김영주라는 이름이나 김경희나 장성택의 이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영주는 1950년대 말부터 당중앙 조직지도부에서 부장으로 지냈습니다. 1950년대 말 중국, 소련과 관계가 가까웠던 고급간부들을 숙청한 김일성은 만주에서 유격대 활동을 했던 빨치산 출신들을 고위직에 많이 임명했습니다. 그래도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출신자도 100%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당연히 가족이었습니다.
1950년대 말쯤에 김일성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세습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김일성은 벌써 그 때부터 가까운 친족과 가족들을 다른 사람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은 아직 학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선택은 그의 동생 김영주였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김영주는 북한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 김여정은 서울을 방문해 남한 대통령과 만났고 남북 수뇌상봉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분단 역사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남북회담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1972년 7.4공동성명을 준비한 북한측 대표자는 김영주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에 들어와 김영주는 조금 위험한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로의 후계 준비를 빠른 속도로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김영주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카에 도전할 수 있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결국 1975년부터 김영주는 갑자기 모든 공식석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거의 20년동안 시골의 매우 편리한 조건하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1993년 다시 평양으로 올라왔고 별 의미가 없는 명예직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일 시대에 김영주와 똑같은 역할을 한 사람은 김경희, 장성택 부부입니다. 김경희는 자신의 남편인 장성택과 함께, 물론 김영주보다 작기는 했지만 많은 힘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1970년대와 비슷하게, 후계자 김정은의 등장은 김경희 장성택 부부에게 많은 위협이 되었습니다. 결국 장성택은 숙청되었고 김경희는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녀 역시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김정은, 리설주 부부는 자녀 2-3명이 있는데, 그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김여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능력도 있고 머리도 좋은 김여정은 앞으로도 한동안 힘이 아주 많을 것 같습니다. 그 후에 김영주처럼 조용히 은둔생활을 할 지 아니면 보다 더 나쁘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건 동생의 등장은 북한 김씨 왕조 문화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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