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전인 1945년 9월 30일, 평양의 유명한 일본 요릿집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한국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석자들은 소련군 메클레르 소좌, 독립운동가 조만식 그리고 며칠 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온 소련 군대의 젊은 대위였습니다. 대위의 이름은 여러분 모두 잘 알고 있는데요. 바로 김일성입니다.
북한 역사 교과서를 보면 1945년 8월 김일성이 지휘한 조선 인민 혁명군이 일제를 쳐부수고 나라를 해방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헛소리일 뿐입니다. 조선 인민 혁명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해 8월의 며칠 동안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소련군대에 조선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이른바 혁명가들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들은 1930년대 말까지 만주에서 일본과 싸웠지만, 30년대 말 심한 위기에 빠졌고 결국 소련으로 망명했습니다.
북한의 선전자료는 김일성이 소련에 있었을 때 소련 군대와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조선 해방작전을 지휘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 이야기를 본 학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20여 년 전 공개된 소련과 중국의 자료들을 보면,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 무장투쟁의 참가자들이 40년대 초 했던 일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련 군대의 일반 병사나 하급 군관으로 입대했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1945년 소련은 해방된 한반도 북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공산당 정권을 세우거나 또는 지역에서 인기를 얻은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중순, 소련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사람들이 귀국했습니다. 당시에 한반도 북반부를 통치하던 소련 군인들의 입장에서 88여단 사람들은 한반도 북부에서 새로 생길 공산주의 정권의 핵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조선을 해방시킨 인물은 아니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쓸모 있고 믿을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아직 한반도 북부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이 크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평양에서 인기가 높았던 조만식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습니다. 조만식은 명성이 있는 독립운동가였는데, 그는 일본 총독부의 정책을 강력히 반대해 평안남북도에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소련군 사령부에서 북한 정치를 담당하던 매클레르 소좌는, 김일성과 조만식을 만나서 북한의 미래에 대한 토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본 요릿집 화방에서 열린 저녁 식사는 바로 그 토론의 자리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촬영한 사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요. 북한에서는 절대 금지된 자료이지만, 북한 밖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자료입니다.
토론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말하면 소련 군대를 대표한 매클레르 소좌는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를 지지할 수도 있지만, 조만식과 더 협력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1945년 12월까지 김일성은 북한 정치에서 주변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북한 어용 역사는 무조건 김씨 일가가 대를 이어서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5년 말, 소련군 하급 군관이었던 김일성이 몇 년 만에 절대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김일성의 정치 기술의 대단함을 잘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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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I LANKOV,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