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중국 공산군의 첫 번째 6.25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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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공산당 군대가 첫 번째 전투에 참가한 날입니다. 1950년 9월 중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고 서울 근처에서 인민군을 포위하고 며칠 만에 인민군을 소멸시켰습니다. 사실상 10월 초순, 인민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북한 정권에는 싸울 부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을 향해 긴급 전보를 보냅니다.

이미 30년 전, 러시아에서 공개된 자료를 보면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을 방문해 남한 침공에 대해 토론했는데요. 스탈린은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 소련이 군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중국은 태도가 조금 달랐습니다. 중국은 북한을 가치 높은 완충지대로 평가했고 5월 초순, 모택동은 중국군 파병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1950년 10월 초, 공황 상태에 빠진 김일성의 전보를 받고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한반도로 중국군을 보낼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흑해에 머물고 있던 스탈린은 자신을 찾아온 중국 특사 주은래와 만났고 모택동과 전보를 열심히 주고받습니다. 당시 이 전보들은 모두 극비 자료였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 모든 자료가 공개됐고 중국도 일부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자료를 통해 우리는 중국이 이미 5월부터 참전 준비를 하며 작전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중국군은 10월 중순부터 북한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에서 북한 측을 대신해서 싸운 것은 중국군이었습니다. 거의 무너질 뻔했던 김일성을 구조한 것은 중국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 역사책을 살펴보면 중국의 참전에 대한 내용은 매우 적습니다. 당시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국군이 그저 소규모 부대를 파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러나 한국에서 유엔군과 싸운 중국 군대는 30-40만 명으로 인민군보다 몇 배나 많았습니다.

당연히 오늘날 북한의 선전 일꾼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민족의 위대성을 선전하기 위해서 북한 선전 일꾼들은 외국의 지원을 언급하면 안 됩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일본군에 승리하고 북한을 해방했다는 사실을 북한 교과서에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선전일꾼들은 북한을 일본 통치에서 해방한 세력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고 소련군 대위 김일성 밑에 100명 정도의 병사가 있었을 뿐입니다. 모두 다 소련 군복을 입고 있었고 소련군 1개 대대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그들 중 1945년 8월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역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비슷한 사례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1930년대 김일성이 일본과 싸울 때도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간부였습니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가 지휘한 부대는 중국 공산당에 속해 있는 수많은 부대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북한 교과서에서는 이런 사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 업적의 근거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가리기 위해 북한 선전 일꾼들은 역사와 아무 관계 없는 거짓선전들을 오늘도 시끄럽게 해야만 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에디터:오중석, 웹팀: 김상일